91.
“여기.”
고한결이 가방에서 꺼내 내민 것은 이든사우스 사인 시디였다. 나는 신기한 얼굴로 시디 커버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사인이 있었다.
“너 능력 좋다? 어떻게 구한 거냐, 이거?”
“니 이름 팔아서 구했지. 탑랭커 유찬희가 이든사우스 팬이라고.”
커버를 열어보니 실제로 시디 안쪽에는 구구절절 펜으로 쓰인 감사 글이 쓰여 있었다. 유찬희 헌터님, 저희 이든사우스를 좋아해 주셔서 너무 영광이고, 감사하고……. 나는 테이블 위에 그걸 내려놓고 우스갯소리인 양 대답했다.
“그래도 일 터지기 전에 받아서 다행이다. 지금이었으면 해 주지도 않았을 텐데.”
“넌 그게 할 말이냐.”
“맞는 말이긴 하잖아. 이제 완전 국민 사기꾼 됐는데.”
“근데 유현재는 언제 귀국한 거야? 갑자기 뉴스 나와서 깜짝 놀랐네.”
“얼마 전에 했겠지. 나도 잘 몰라.”
“구라 치지 마. 귀국하자마자 너한테 바로 달려왔겠지. 그 유현재가.”
나는 순간 어떻게 고한결을 속여야 할지 고민했다. 언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너무 굳게 믿지 않고 있고, 심지어 내 말조차 거짓말이라 하는 녀석을 내가 완벽히 속일 수 있을까? 사실, 속이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았다.
“……나랑 유현재가 그렇게 친해 보였어?”
“그걸 왜 지금 묻냐?”
“뭐, 친했던 게 맞긴 한데. 왜 사… 랑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그냥 눈에 보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딱히 추측한다거나 떠본 건 아니야.”
눈에 보이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게 딴에는 제법 감성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고한결이 별안간 자기 자신에게 감탄하기 시작했다. 캬, 고한결. 좀 있어 보였다. 좀 괜춘했다. 나는 그런 실없는 말을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당시엔 아는 척 안 했는데?”
“너희가 말 안 하니까 그랬지. 굳이 남의 연애사 알고 싶지도 않고.”
“……의외네.”
“이거 봐. 맞잖아, 그치? 너네 사귀었지? 솔직히 말해 봐.”
“그때도 말 안 했으면 지금도 말할 때까지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어때?”
“야. 그냥 말해. 질질 끌지 말고.”
“그냥 멋대로 생각해.”
“존나 사귀었네. 야. 꺼져. 이 사기꾼들아. 이거 다른 의미로 사기꾼이네, 유찬희.”
고한결이 너무나도 여상한 말투로 나를 대해 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고한결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꿰차던 녀석을 의심하던 것도, 벌써 3년 전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해. 일단 이렇게 있어야지.”
“그럼 하루 종일 이렇게 집에 처박혀 있겠다고?”
“나가서 괜히 욕먹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니.”
“일단…… 그, 해결부터 해야 하지 않겠냐. 네 마나 문제.”
“그건 지금 바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
“아예 방법이 없는 거야?”
“신약 개발 중이긴 해. 그래서 내가 한재민한테 묶여 있는 거고.”
“……뭐? 그럼 너 스무 살 넘어서도 계속 한성 후원 받는 게 그것 때문이었어?”
“어디 가서 떠들지나 마.”
내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자 고한결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럼…… 유현재가 한성 길드 입단한 것도 너 때문이겠네.”
“…….”
“맞지?”
“왜, 이것도 존나 대단한 사랑 같냐?”
“근데, 너 국마연이랑 원래…… 뭐 있었잖아.”
고한결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의외의 말에 날카로운 대답이 나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너 알고 있는 게 도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별로 없어. 아는 거.”
“별로 없다고? 그럼 있긴 있단 거네?”
“그……, 어차피 뭐 졸업도 했고 해서 하는 말인데.”
“뭐.”
“이주현 말이야. 걔가 알려 줬어.”
“걔가……?”
“어. 걔가……. 나보고, 혹시 네가 한성병원 가려 하거나 그럴 낌새가 보이면 무조건 국마연으로 가게 하라고……. 내가 이유 물으니까, 다 널 지키기 위해서래.”
“날 지키기 위해서?”
“어. 이상한 사람들 오면 자기한테 꼭 말해 주라고.”
“이주현이?”
“응.”
나는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짚었다. 도대체 이주현은 또 뭐였을까. 일단 한성과 대척점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무슨 의도로 나를 ‘도울’ 생각을 한 건지가 궁금했다.
“너 이주현 번호 있어?”
“글쎄……. 한 다리 건너서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왜, 연락하게?”
“해야지.”
“걔 근데 지금 해담 소속이잖아. 걔랑 만난 거 어디 보이기라도 하면 어떡해.”
“넌 참 오지랖도 넓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고한결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겠다며 누군가에게 연락을 넣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이주현과 국마연, 누군가가 나를 도우려 했다는 것.
*
일은 생각보다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한성에 입단해 바로 활동을 시작할 줄 알았던 유현재에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직 학기가 채 끝나지 않았고, 유현재는 엄연히 MOD 소속인지라 정식으로 길드 활동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현재는 월등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을 예정하고 있었음에도 아직 졸업일이 지나지 않아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었다. 굳이 하려면 자퇴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도 제법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뉴스로 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탑급 랭커의 부재에 대해 떠들어대는 전문가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도 계속 부재했는데, 무슨…….
[현재 한 달 이내로 열릴 것이라 감지되고 있는 게이트는 전국에 걸쳐 총 6개입니다. 그중 2개가 B급, 나머지는 C급 이하일 것으로 보이고요. 윤 박사님께서는 유현재 헌터의 부재가 국가보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 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유찬희 헌터가 사실상 사라진 이상, 현재 1급 헌터는 총 13명으로 좁혀집니다. 그중 해외로 파견을 나간 헌터는 4명, 부상 등으로 활동 상황을 추측할 수 없는 헌터가 3명. 유현재 헌터를 빼면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5명 정도 입니다. 1급 헌터 2명 정도가 B급 게이트를 무난히 토벌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까지 크게 위기라 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가 문제죠.]
[탑급 인력에 관해서는 차혜련 전투국장이 입장을 발표한 바 있는데요.]
[네. 앞서 말한 5명 중 1명은 해담 소속, 2명은 한성 소속, 그리고 2명은 무소속 혹은 1인 길드 활동 중입니다. 차 국장은 길드와 관계없이 해당 헌터들을 소집해 TFT를 만들 것이라 했는데요.]
[아무래도 해담 소속 랭커의 역할이 중요해지겠네요. 이주현 랭커죠?]
[네. 공교롭게도 현재 이슈의 중심인 유찬희, 유현재 헌터와 동기이자 동문입니다.]
[흥미롭네요. 이주현 헌터의 행보는 어땠나요?]
[졸업 후 바로 해담으로 입단해 소위 말하는 공무원 생활을 지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유찬희 헌터에 비해 눈에 띄지 않은 것도 있고요.]
[유현재, 유찬희, 이주현. 소위 말하는 랭커 명문 학교, 세울고 46기 동기죠?]
[네. 1급 헌터들이 한 번에 3명이나 나와서 이슈가 되기도 했었죠.]
[세 사람 모두 막 헌터 활동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과 지점이 다른 것들이 흥미롭네요.]
흥미롭긴. 개뿔이. 나는 거기까지 보고 채널을 돌렸다. TV 화면에선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였다. 그러니까 이거 내용이, 자기가 잘나가는 헌터라고 거짓말하고 재벌가랑 사기 결혼해서……. 아 됐다. 나는 TV를 껐다. 마침 딱 유현재에게 문자가 왔다.
[유현재: 학교 문제 때문에 잠깐 다시 영국 갔다 와야 할 수도 있겠다]
[유현재: ㅠㅠ]
나는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답변을 보낸 후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빨리 와.]
답장은 몇 분 뒤에야 왔다. 보이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글자였다.
[유현재: 응, 얼른 갈게]
그러자마자 또 다른 문자가 핸드폰 상단에 떴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010-xxxx-xxxx: 오랜만이네.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다른 말없이 전화가 가능하냐고 답을 보냈다. 이주현 또한 답장 대신 내게 전화를 바로 걸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물어볼 게 있어서.”
-만나야 될 일이야?
“만나서 물어보려 했는데, 그냥 전화로 물어봐도 될 것 같네. 게다가 너 나랑 만나는 거 어디 사진이라도 찍히면 좀 그렇지 않아?”
-뭐, 그건 그렇지. 물어볼 게 뭔데?
“누가 시켰어?”
-뭐?
“고등학교 때. 뒤에서 나 감시했다며.”
-야, 감시란 표현은 좀 그렇다.
“그럼 뭐야? 마니또라도 되냐?”
-그건 또 뭔 개소리냐…….
“아무튼, 누가 시킨 거냐고.”
-이미 지난 일을 끄집어내야 돼?
“지났으니까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이주현은 오랫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주현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이기도,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인물이기도 했다.
-너희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