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90화 (90/115)

90.

나는 망연자실한 자세로 계속 사라진 시스템 창이 있는 곳만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나온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관리자는 아마도,

“유도현…….”

도대체 왜 유도현은 내게 이런 형벌을 내린 걸까. 잠시 관리자 모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짐작건대 유도현의 마나가 내게 다량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다면, 유도현의 마나가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이제 시스템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걸까?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나는 고작 이 세계에 얼떨결에 들어온 타인일 뿐인데.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평범한…….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나의 삶은 애초부터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 빙의했던 여덟 살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하하…….”

형, 나한테 왜 이래? 유도현은 대답이 없다. 당연했다. 나는 강령술을 썼을 당시 나를 바라보던 유도현을 떠올렸다. 빙의 전의 내 얼굴, 이라고 판단했던 그는 어쩌면 빙의 전의 내가 아닌, 다른 기억의 오류로 착각한 누군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러니까 예컨대 내가 기억하는 ‘소설’ 과 ‘내 얼굴’ 같은 것은 모두 ‘관리자’가 집어넣은 허상이라던가…….

“찬희야!”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현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까맣게 변한 핏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이렇게 됐네.”

“괜찮아?”

“어, 괜찮아. 근데 왜 왔어.”

유현재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삼켰다.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한재민이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랑 그렇게 눈이 마주쳤는데 어떻게 안 와.”

“넌 내가 안 미워?”

내 물음에 유현재가 나를 곧게 쳐다보았다.

“미워.”

“그래?”

“내 말은 늘 듣지도 않고, 맨날 멋대로 하다가 다쳐 오는 게 싫어.”

유현재가 소매로 내 얼굴 주변의 마른 핏자국들을 닦아냈다. 잘 다려진 하얀 셔츠가 금세 얼룩덜룩해졌다.

“내가 우리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 줄 알아?”

내 질문에 유현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혹시 이렇게 됐으니 유현재가 날 용서해 주지 않을까?”

“찬희야.”

“완전 패륜이지? 정 떨어지지? 근데 어쩔 수 없이 든 생각이었어.”

“…….”

“내가 2년 동안 한재민 밑에서 숨죽여 시키는 대로 일한 것도. 실험 대상이 되어 준 것도.”

“…….”

“다 네가 날 용서해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때문에.”

“…….”

“그래서 그랬어. 이런 걸로는 죄를 갚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찬희야.”

“응.”

“2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는데,”

“응.”

“네가 밉고 싫고 그런 감정보다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열 배, 아니 백배는 많았어.”

“……정말?”

“물론 부모님과 함께 자랐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

“그런데, 너랑 만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너무 힘든 거야.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었어.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금 감정에만 솔직해도 될지, 그게 과연 내게 옳은 선택인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유현재의 솔직한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쉽사리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과연 유현재가 나를 용서해도 될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유현재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자.”

“…….”

“한재민한테서 벗어나야 돼.”

“……뭐?”

“그래야 우리가 살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고한결이었다.

“…고한결?”

“어. 어쩌다 보니 계속 연락 중이네.”

“얼른 받아.”

나는 끊긴 대화에서 찝찝함을 느꼈지만 일단 고한결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왜.”

-이거 뭔데, 기사. 이거 다 사실이야?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너 정말 유현재 때문에 불법 약물 쓴 거야?

“…….”

-너 유현재 좋아했잖아.

“뭐?”

-좋아했잖아! 그런데 무슨, 열등감이니 시기 질투니. 이게 말이 돼?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버벅거리며 고한결의 말에 반박했다.

-내가 고등학교 내내 너를 봤는데 그걸 모를 것 같냐?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널 관찰한 시간이 얼만데. 누굴 속여?

“관찰?”

-아무튼 이거 완전 개또라이 헛소문 같은데, 조만간 만나서 해명하길 바란다. 알겠냐?

“뭐라고?”

-유현재도 귀국했지? 너희 만날 거 아냐. 데리고 와. 난 팩트만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황당하고 일방적인 전화 통화가 끝났다. 나는 핸드폰을 쥔 채로 어수룩하게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얘는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러게.”

나와 유현재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유현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유현재의 체취였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로 손이 올라갔다. 유현재가 작게 웃었다.

“너무 오랜만이네.”

가장 큰 의문과, 해결할 수 없는 진실을 뒤로한 채 우리는 키스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커다란 어둠보다는 바로 눈앞에 있는 지금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

나는 거실에 주저앉아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에는 커다랗게 유현재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한성 기업, 영국 MOD 산하 교육기관 출신 1급 헌터 유현재 영입…] 커다랗게 화면을 채운 글씨와 함께 기자의 목소리가 거실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유현재 군은 귀국 후 바로 한재민 이사와 접촉하여 길드 입단을 구두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유찬희 군의 소위 ‘가짜 랭커’ 쇼를 잠재우기 위한 해결책이자 어수선해질 길드를 잠재울 해결책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자 화면은 다시 앵커들이 있는 스튜디오로 전환됐다. 앵커들은 여전히 이 사건에 대해 말을 이어 갔다.

‘유현재 군은 어린 시절 유찬희 군, 그러니까 고 유규환 전 전투부 보안국장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고 하는데요. 이 사실은 당시 유도현 랭커의 죽음과 관련되어 한 번 이슈라이징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죠.’

‘네. 당시 유도현 랭커의 전투 장소에 유찬희 군과 유현재 군이 함께 있었고, 유현재 군의 불의의 행동으로 유도현 랭커가 죽은 것으로 많이들 알려져 있는데요. 이제는 이 사실 또한 다르게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재 각종 포털과 커뮤니티에서는 유규환 전 보안국장이 일부러 모든 책임을 유현재 군에게 짊어지게 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죠?’

‘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수사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바보 같다. 나는 거기까지 뉴스를 보고 TV를 껐다.

“이제 알아서 뭐 어쩌게.”

그동안의 보상이라도 너희가 해 주게?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한껏 올려 조소했다.

[유현재: 몸은 괜찮아?]

[유현재: 또 메스껍고 그러면 말해야 돼.]

나는 유현재가 보낸 메시지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답장했다.

[괜찮아. 얼른 와.]

[보고 싶어.]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이었다.

*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식탁 앞에 섰다. 제법 괜찮게 꾸며진 아일랜드풍 주방이었음에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새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낸 뒤 뚝딱거리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채워놓은 반찬들이 많아 뭔가를 더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대충 그럴듯한 모습을 한 계란말이와 콩나물국이 완성되었다. 막 불을 줄이려는 순간, 집 문이 열렸다.

“유현재!”

“와, 이거 무슨 냄새야?”

“너 한식 제대로 먹긴 했어? 안 했지?”

“으응, 뭐 그냥 대충?”

“이 형님이 진짜 특별하게 만든 거다.”

유현재가 웃으며 잘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았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이란 반찬은 죄다 꺼내놓은 터라 식탁은 손 놓을 틈도 없이 빼곡했다.

“와,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그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한 게 있긴 하지.”

국이랑 반찬 하나뿐이긴 하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유현재를 식탁에 앉혔다.

“얼른 먹어 봐.”

“알겠어.”

유현재는 반찬 몇 개를 집어먹으며 연신 감탄했다.

“너무 맛있는데?”

“그래? 야, 저것도 먹어 봐.”

나는 아직 유현재가 손을 대지 않은 계란말이를 가리켰다.

“아직 따뜻해 보여. 금방 한 거야?”

“먹어 봐, 얼른.”

유현재는 유달리 어설프게 잘린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유현재가 계란말이를 꿀꺽 삼켰다.

“어때?”

“어…….”

“맛없어?”

“아니, 너무 맛있어서 나만 먹어야 할 거 같네.”

“뭐?”

“그, 너는 먹지 마. 어차피 만들었으니까 별로 땡기지도 않지?”

“야, 맛없지?”

“아냐. 너무 맛있어, 내 입엔.”

“내 입엔?”

“그냥 보편적인 사람들의 입엔 맞지 않을 수 있어도 내 입엔 맛있단 뜻이야.”

유현재가 열심히 변명하며 이번엔 콩나물국을 떠서 먹었다.

“와.”

“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 이것도 나만 먹을게.”

“야, 맛없으면 먹지 마.”

“아니, 내가 다 먹을 거라니까?”

나와 유현재는 밥을 먹는 내내 티격거리다 웃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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