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단순히 오피스텔이라 부르기엔 무색할 정도로 넓은 집은, 나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통제되어 있었다. 특히 연구실이라 불리는 가장 큰 방은 이들이 올 때가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게 그 신약이에요?”
“네. 일단 가장 큰 개선은 역시 마나 응고를 막는 것이고요, 두 번째로는 구역감이나 어지럼증 같은 부작용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갔습니다.”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으려나. 솔직히 말해서 크게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방 한쪽 벽에 놓인 의료용 침대에 누웠다. 방 안에 있던 기계들의 전원이 켜지더니 곧 작은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편하게 눈 감고 계시면 됩니다.”
“제발 편하게 해 주세요. 네?”
2년간 늘어난 건 말꼬리 잡기와 뻔뻔스러움뿐이라, 나는 예전 같았으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을 상황도 제법 천연덕스럽게 넘길 줄 알게 되었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자 팔뚝에 굵은 바늘이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투약 때는 하루 종일 코피를 흘려 수혈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갔었는데, 이번엔 어떨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지금 몸 상태는 어떠세요?”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밥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새하얗게 질리는 내 얼굴을 보고 연구원 한 명이 급하게 준비된 봉투를 건넸다. 먹은 게 없으니 토할 것도 없어 나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이번에도 실패네요.”
“역시 투약 주기가…….”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얘기가 고작 저런 거라니. 시큼한 위액이 목구멍을 통과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화장실…….”
“움직이지 마시고 그냥 여기에 토하세요.”
“됐고 화장실 좀 간다고요…….”
“움직이면 더 안 좋아지실 수도 있어요.”
나는 제지하려는 연구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점멸하길 반복하며 어지러움을 극대화시켰다. 무릎이 저려올 때까지 변기를 잡고 토하고서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저기요, 진통제 좀…….”
누군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이 멈췄다. 커다란 실루엣이 화장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현재…….”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긴 어떻게…….”
유현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십 분간 진행된 구역질 때문에 얼굴은 말이 아닐 터였다. 나는 볼을 타고 줄줄 흘렀던 눈물을 닦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왜 네가 여기 있어.”
“…….”
“뭐야, 이거 꿈인가?”
나는 오랫동안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2년 전보다 머리가 좀 더 길고, 키가 좀 더 컸으며 어깨가 더 넓어진. 늘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관념적인 유현재가 내 눈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만져지는데…….”
나는 약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유현재의 팔뚝을 잡았다. 유현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럼 환각은 아닌 것 같고…….”
“…….”
“진짜야?”
유현재의 표정은 도저히 한 번에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진짜야.”
“말도 하네.”
“오늘 귀국했어.”
“오늘?”
“어. 오늘.”
“근데 어떻게 여기에…….”
유현재는 대답 대신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2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가 오로지 근심뿐인 한숨으로 가득하지 않길 바랐다.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쁜 만남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모셔 왔지.”
화장실 밖 복도에서 한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백 마디 말보단 그냥 상황 한 번 보여주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 말이야.”
“한재민……. 너 진짜…….”
“왜? 뭐 문제 있어?”
나는 비틀거리며 유현재를 지나치려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는 몸에 결국 유현재가 나를 붙들고 부축을 해 주었다.
“매일 이런 건 아닌데 하필 네가 이럴 때 와서.”
“…….”
“좀 그렇네. 꽤 괜찮은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유현재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도…… 안 나은 거야?”
“보는 대로.”
“…….”
“넌 잘 지냈어?”
유현재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잘 못 지내긴 했겠다. 괜한 걸 물어봤네.”
“……잘 지냈어.”
“그래?”
“비교적 잘 지낸 편이었어.”
“잘됐네.”
“돌아오면 너랑 할 얘기가 많았는데.”
“하면 되지.”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그래.”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뿐이야.”
“너는……!”
유현재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많이 컸네, 현재야.”
조금 안정된 상태가 되자 유현재의 외양이 더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유현재는 어떤 면에서든 2년 전보다 모든 게 자란 듯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론데.”
“너도 많이 큰 것 같은데.”
“그래? 난 키는 그대로던데.”
“어른 같아.”
“너만 할까? 이제 형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찬희야.”
“응.”
“아저씨랑 아줌마 그렇게 됐을 때…… 다시 못 돌아온 거 미안해.”
“그게 왜. 내가 너 돌아오지 말라고 고사까지 지냈는데.”
그때 뒤에서 짝, 하고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한재민이었다.
“눈물의 상봉은 여기까지 하고.”
그새 연구원들은 내게 진통제 몇 알을 주고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유현재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유는 단 하나야.”
한재민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짝다리를 짚었다.
“지금 유찬희의 상태를 보여주고 결정하라고.”
“뭐?”
“유찬희는 보다시피 아직도 저래. 약도 얼마나 더럽게 안 듣는지. 2년 동안 이 짓만 반복하고 있어.”
한재민이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한성은 끝까지 저 자식 후견인 역할을 존나 열심히 하고 있는 상태지.”
“그래서?”
“쟨 지금 우리가 제공하는 약이 없으면 죽어.”
유현재의 손이 잘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만약 아직도 너희가 그렇게 절절한 사이라면 당연히 유찬희를 살리고 싶겠지?”
“…….”
“그냥 바로 한성 입단해.”
“……뭐?”
“이쪽에 입단해서 여기 소속으로 일하라고. 대우도 잘해 줄 테니까.”
“그래.”
유현재가 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유현재의 팔을 잡았다.
“야! 그렇게 쉽게 정할 일 아니야.”
“나도 쉽게 정하는 거 아니야.”
“그럼. 사랑하는 찬희가 여기 묶여 있는데 현재가 어디 가.”
한재민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유현재마저 한성에 입단하게 된다면, 결국 랭커판, 아니 이 나라는 무조건 한재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의미도 없긴 했지만, 원래의 소설 줄거리라면 유현재는 한재민을 죽이고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곧 그 세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자 목표였으니까.
“입단할게.”
“오케이.”
하지만 이렇게 쉽게 한성으로 오는 유현재는, 그것도 나 때문에 오는 유현재는 이미 모든 시나리오의 통제 밖에 있었다.
“어서 와. 생각보다 괜찮아, 여기.”
“대신.”
한재민의 눈썹이 꿈틀댔다.
“찬희는 나을 때까지 활동 중단시켜.”
“오.”
한재민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유현재는 굳은 얼굴로 한재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가는?”
“내가 해 줄게. 그 간판 역할.”
“눈치 빠르네. 유찬희가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자나 다름없단 걸 바로 알고.”
유현재는 아무 말 없이 한재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재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대신 완전히 화려한 컴백으로 간다. 문 비서.”
“네.”
옆에 서 있던 문 비서가 빠르게 대답했다.
“기사 좀 내. a급 게이트 토벌 실패한 유찬희의 몰락, 때맞춰 돌아온 유현재 한성길드 입단.”
“알겠습니다.”
“재밌네? 완전 소설 같아. 그런 것도 좀 추가해. 학창 시절부터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고, 유현재가 유찬희 부모한테 당했던 나쁜 짓도 적절히 추가하고.”
‘나쁜 짓’에서 한재민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물론 깊은 관계까지 올릴 필요는 없고. 그런 거 있잖아. 신데렐라 스토리.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사실은 힘을 숨긴 진짜였다, 뭐 이런 거.”
“재밌냐?”
“어. 재밌다니까. 넌 안 재밌어? 원래 사람들이 제일 환장하는 게 이런 반전 스토리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가야지, 현재야?”
볼일이 끝난 한재민이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컴백 준비 해야지.”
유현재가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마주친 눈에서 나는 많은 갈등을 읽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고 해도 돼?”
유현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유현재가 나와 얘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재는 곧 한재민의 뒤를 따라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익숙하게 큰 방 문을 닫고 내 침대가 있는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침대에 엎드려 눕자, 그제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돌아왔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