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10분 뒤에 이사님 도착하십니다.”
나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잘 다려진 셔츠가 팔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구겨졌다. 몸에 딱 맞게 맞춰진 명품 브랜드의 수트는 처음 입었을 때보다 제법 편해졌다.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서 있던 비서 한 명이 내게 재킷을 입혀 주었다. 이젠 타인이 재킷을 입혀 주는 것도 익숙했다.
“이사님 오시면 바로 행사장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챙겼다. 담배와 라이터, 지갑 정도였다. 재킷의 단추를 잠근 뒤 나는 거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오늘 자선 행사에는 중요한 분들이 많이 오시니 준비해 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저번처럼 그런 일이 있었다가는…….”
“문 비서님,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요?”
거울에는 짙지 않은 그레이 컬러의 체크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조여 맨 내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다크서클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서 잘 한다고요.”
“이사님께서 특별히…….”
“아, 시끄러워요.”
나는 손을 들어 대충 문 비서의 잔소리를 정리한 후 문밖으로 나섰다.
“이사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셨는데 대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뭘 기다려요, 그걸.”
“……알겠습니다.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지하 2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문 비서와 같이 타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을 담은 조그만 반항이었다. 물론 문 비서는 쉽게 나를 쫓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사님께서 계속해서 연초를 끊으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 안 피곤해요?”
“비즈니스 매너입니다. 아무래도 담배 냄새에 예민한 분들도 많으니까요.”
“제가 비즈니스 하는 것도 아닌데 웬 비즈니스 매너죠?”
“이사님과 함께 움직이지 않습니까. 결국 이사님의 얼굴이십니다.”
“한재민 상판이 더 잘생겼는데 내가 왜 걔 얼굴을 해요.”
“언행은 조금만 부드럽게 해주십쇼. 제발…….”
문 비서가 마지막엔 빌듯이 말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벌기 힘들죠?”
“아닙니다.”
“스무 살짜리 꼬맹이 성깔 상대하고 있으면 현타 안 오세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로봇이에요? 맨날 똑같은 말이네.”
“……내리시죠.”
“행사 끝나고 고한결 집으로 갈 거예요.”
“이사님과 저녁 식사 일정이 있으신데요.”
“안 가요. 체할 일 있나.”
“……이사님께 일단 말씀은 드려놓겠습니다.”
“굿.”
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뒷좌석 문을 여니 한재민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 비서, 얘 향수 안 뿌렸어?”
“그게…….”
“냄새 역해서 뿌리기 싫다고.”
“네 담배 냄새가 더 역해.”
한재민은 더 이상 대화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한재민의 제스처를 보고 운전기사가 바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는 부드럽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언제까지 이딴 오피스텔에서 살 거냐?”
“내 마음이야.”
나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았다.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울렸다. 요즘 좋아하게 된 락밴드의 노래였다. 고한결의 추천으로 알게 된 밴드였다. 고한결은 대학생이 되더니 락에 심취해 밴드부에 들어갔다. 랭커 때려치우고 가수나 하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점점 더 이상해졌다. 어쨌든 추천해 주는 노래는 좋아서 계속해서 듣는 중이었다. 시끄러운 노래는 의외로 심신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십여 분 정도를 달리던 차는 곧 어느 호텔 입구에서 멈췄다. 말이 자선 행사지 재벌들의 돈 자랑이나 다름없는 놀이판이었다.
“어머!”
행사장에 들어가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내게 알은척을 해왔다. 가장 처음은 전투부 보안 부장의 와이프였다.
“찬희 군, 언제 또 이렇게 잘생겨졌대요.”
“감사합니다.”
“이제 완전히 남자네.”
“원래 남잔데요.”
문 비서가 내 발을 꾹 밟았다. 생각보다 더 무게를 주고 밟아 제법 아팠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뒤 다시 미소 지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부장님은 잘 지내시죠?”
“아유, 그이는 요즘 바빠요. 아직 게이트 관련해서 처리하지 못한 게 많다고……. 그래도 우리 한 이사님이 적극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한재민이 옆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야 뭐, 저희 부지 쪽에서 생긴 일이니까요.”
“그래도요. 요즘 사람들은 게이트 무서운 줄 모르고, 땅값 떨어진다고 쉬쉬하느라 바쁘다니까요.”
여자가 나를 흘끗 보고는 다시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찬희 군은 이번에도 A급 게이트에 차출되었다면서요?”
“아, 네. 그렇게 됐네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내내 실더였다가 다시 헌터 생활 하려니 고되겠어요.”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 중학생 때까진 또 헌터 과정 배웠고요.”
“어쩜, 이렇게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지. 유 국장님도 두 개 다 훌륭하게 하셨었잖아요.”
아버지에 대한 언급에 나는 다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부모를 한 번에 잃어 슬픈 아들의 표정.
“그렇게 가셔서 얼마나 슬펐는지…….”
“그러게요.”
“그래도 참 시간이 가긴 가네요, 벌써 2년이나 흘러서 이렇게 아드님이 장성하셨으니.”
나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부모님에 관한 얘기는 최대한 침묵할 것. 그것이 스스로 정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
한재민이 내 후견인이 된 이후로 한성은 적극적으로 랭커 육성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전투부 보안국장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랭커 타이틀의 형을 둔 나는 아마 한재민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 없는 꼭두각시일 것이었다. 심지어 불안정하긴 해도 형보다도 더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으니 최고의 전투 인력까지 될 것이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2년 내내 나는 유도현의 마나를 컨트롤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전보다 피를 쏟거나 쓰러지는 불상사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나는 내 몸에 맞지 않았다. 한성 병원 소속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점점 내 마나와 유도현의 마나가 섞이고 있긴 하나 문제는 그게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금술을 이용해 억지로 타인의, 그것도 죽은 사람의 마나를 뺏은 것이다 보니 원인을 찾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피나 토하는 기계로 살아야 하는데요?”
내 물음에 연구원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섞인 마나가 본인 것으로 되지 않는 이상, 기존에 있던 마나조차 쓰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그럼…… 뭐 불구라도 된다는 말이에요, 제가?”
“불구라기보다는…… 랭커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기가 찬 나머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유도현의 마나를 뺏어 온 것이 결국엔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단 거잖아.
“한재민한테는 보고했어요?”
“하루에 세 번씩 브리핑 진행합니다.”
“그럼 알고 있겠네.”
“이사님께서는…….”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을 숨기고 랭커 생활을 계속하길 원하십니다.”
“마나도 못 쓰는데 무슨 랭커 생활을 해요?”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찬희 님이 사업에서 워낙 중요한 인물이시다 보니.”
“중요하고 자시고 일 자체를 못하는데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요?”
이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해결이 되었다. 한재민은 내게 심플한 해결책을 내려 주었다.
“게이트 앞에서 얼굴만 비쳐.”
“뭐라고?”
“어차피 1급 판정받은 이상 굳이 다시 검사받지 않으면 번복될 일도 없고, 아무도 네가 마나 불구자가 된 줄은 모른다고. 그러니까 게이트 앞에서 얼굴 비치고 기사에나 올라가.”
“미쳤구나?”
“뭐가 미친 거지? 가장 현실적이고 합당한 방법인데. 지금 사업을 위해선 네가 필요하고, 너는 피나 토하는 무능력자가 됐고. 네 가치를 증명하려면 그것 말고 또 방법이 있어? 체술이나 연마해 보든가. 유현재도 무능력자 시절에 체술로 다 쇼부 봤었으니까.”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한재민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르니,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해졌다.
“……이렇게만 하면.”
“…….”
“유현재는 계속 유학 생활 지속할 수 있는 거고?”
“진짜 열부 납셨네.”
한재민이 비꼬듯 말했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현재뿐이었다.
“너네 아버지가 물려준 돈도 많은데 왜 나한테 그걸 물어봐?”
그야 너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간단하게 죽여버린 미친놈이니까. 나는 그 말을 꾹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무튼 네 말대로 할게.”
“쓸데없는 토 안 달아서 좋네.”
한재민이 몸을 일으켜 내 머리를 헝클이곤 나가라 손짓했다. 나는 한재민의 방을 나오자마자 그의 손이 닿은 머리를 거의 뽑아버릴 정도로 털어댔다. 그렇게 2년이, 남은 10대가 모두 지나 지금의 스무 살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