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85화 (85/115)

85.

오후 내내 호텔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뉴스로 상황을 파악했다. 뒤늦게 찾은 어머니의 시신까지 합쳐 부모님은 한성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될 예정이라 했다. 코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조차 없었다. 상주는 호텔에 갇혀 있는데, 부모님 시신의 향후 행방을 멋대로 정하는 전투부가 웃겼다. 다 웃긴 상황이었다.

‘화재의 원인은 가스 누출… ’, ‘최고 저택 보안국장의 집도 피할 수 없었던 안전 불감증’

뉴스는 이제 화재의 원인에 대해 조명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인 그 보도를 보며 내내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음 장면으로 한성 병원 응급의학과 부장이 나와 부모님의 사인을 밝혔다.

“두 시신 모두 주요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후 부검 예정에 있습니다. 이미 병원에 도착했을 땐 소생 불가의 상태였으며 별다른 외부 충격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장의 말이 점점 페이드아웃 되며 기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이와 같이 사인과 화재 원인이 명확한 터라 수사는 빠르게 종결될 예정이며, 고 유규환 보안국장의 자녀인 유찬희 군과, 또 다른 동거인 유현재 군은 당시 집에 머무르고 있지 않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kbn뉴스, 이혜림입니다.”

뉴스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누군가 호텔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김구현이었다. 그는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네. 보시다시피요. 부장님이 더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아무래도 급한 업무와 사후처리를 맡게 되었다 보니.”

“왜 부장님이 하시는 거예요?”

“실무 라인은 대체자가 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곧 상속 관련해서 미국에 계신 찬희 군의 고모님이 오실 예정이니 그 부분은 염려 마시죠.”

“고모님이요?”

“네. 국장님의 여동생이라고 하시더군요.”

얼핏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부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되나요?”

“네. 불편하시다면 방이나 호텔 자체를 옮겨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좀 사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그 부분은 저희 직원이 사 와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지금 찬희 군이 돌아다니기엔 시기상조인 듯싶어서요.”

“마음대로 하세요.”

김구현이 숨을 돌리고선 나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안일한 얼굴이시군요.”

“울고 있을 줄 알았나요?”

“……10대 자녀가 갑자기 부모님을 잃으면,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죠.”

“모르겠어요. 울어도 될지.”

“왜 그런 말을…….”

“감상적인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말이에요. 한 사람을 평생 부모 없이 살게 만들었는데, 제가 열일곱에 부모를 잃었다고 울어도 되냐는 말이죠.”

김구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

“찬희 군이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

“잘못한 건 어른들이니까요.”

“……현재한테는 소식 갔나요?”

“아직 따로 전달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비행 중이라 뉴스 확인도 못 했을 테고요.”

“그럼 알려 주지 마세요.”

“네?”

“알려 주지 마시고 그냥 공부하게 내버려 두라구요. 상속 절차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돈으로 무조건 유현재 유학 제대로 마치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내 말에 김구현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김구현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에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내일은 한성 병원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준비해 놓을게요.”

김구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장례가 병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어차피 내일은 무조건 한재민과 만나게 될 터였다. 어떤 방패막도 없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

“오래 자리 못 비워. 상주라서.”

“나도 오래 붙잡아 놓을 일 없어.”

한재민의 차에서, 나와 한재민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앞만 보고 대화했다.

“네가 시킬 게 뭔데.”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 생긴 거야?”

한재민이 웃으며 운전대에 손을 올렸다. 살짝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아닌 척하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멍청해. 이렇게까지 해야 말을 듣는 게.”

“소모적인 말 하지 말자.”

“소모적인 말을 하지 않게 네가 만들어 줘야겠지?”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일부러 크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래?”

“앞으로 소모적인 말 하지 않게, 네 말 잘 듣겠다고.”

“그건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뭘 하면 될까, 내가.”

“인터뷰 잡을 테니까 거기에나 나와.”

그 뒤로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교복 입고 나오면 더 좋고. 한재민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된 그의 차림은 누가 봐도 평범한 조문객이었다. 자동차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한 명이 내가 앉아 있던 조수석을 열었다.

“내리시죠.”

“네.”

“이사님 들어가셨으니 5분 뒤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한재민의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쭉 돌아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찬희니?”

차에서 내린 건 차혜련이었다. 차혜련 역시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핼쑥해 보였다. 형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하루 만에 저렇게 변한 건 아닐 테고,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 바람 쐬는 거야?”

“네. 곧 들어가려고요.”

“같이 들어가자.”

차혜련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차혜련이 먼저 상투적인 위로를 건넸다.

“갑작스럽게 부모님 여의어서 많이 힘들 텐데 의젓하구나.”

“괜찮습니다.”

“네 나이 땐 좀 더 울어도 돼. 많이 힘들면 언제든지 도움 청하고.”

“감사해요.”

“어릴 때 이모, 이모 하면서 많이 따랐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그러게요.”

“그래서 말인데,”

차혜련이 장황한 서두를 끝맺고 조심스레 본 내용을 말했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후원자가 되어 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후원자요?”

“그래, 후원자. 당장 학교도 다녀야 하고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잖니. 생활적으로든 법적으로든 내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싶어.”

“……왜요?”

경계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경계심이 생겼다. 도대체 왜? 물론 차혜련은 유도현과도 각별한 동료였고, 부모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렇지만 그것이 선뜻 후원자가 되어 줄 정도로 깊은 관계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조카인 차수현이 나와 데면데면해진 것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이유가 뭐가 있니. 마음에 걸려서지.”

진심이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좀 더 고민해 볼게요. 미국에서 고모님도 오시구요.”

“미국 영주권자시라면서. 실질적인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같이 상의해 봐야죠.”

차혜련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생각해 봐. 알겠지?”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혜련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장례식장 본관으로 걸음을 향했다.

*

장례식은 빠르게 끝났다. 비공개 장례식이다 보니 제법 간소해진 것도 있었다. 한재민은 발인이 끝나자마자 내게 문자로 인터뷰 일정을 통보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정확히 이틀 후였다.

“많이 힘드실 텐데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듯해 보이는 여자가 먼저 나와 한재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에 녹음기와 노트북을 두고 우리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러나 첫 질문부터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 튀어 나왔다.

“성인이 되실 때까지 한재민 이사님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던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내 놀란 얼굴에 기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가요?”

나는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맞습니다.”

기자의 뒤에 서 있던 한재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일단 이런 거구나. 시작이란 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평소에도 친분이 있었는데, 이번 일로 흔쾌히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했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한재민과 눈을 마주하고 미소 지었다. 우리는 정말 완벽한 파트너 같았다. 아니, 그래야 했다. 적어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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