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내가 결정해.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선 주도권은 무조건적으로 나한테 있는 것 같으니까.”
“…….”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으로 투박하게 눈물을 닦아낸 나는 쿨쩍 코를 한 번 먹은 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유현재에게 말했다.
“이따 저녁에, 얘기하자.”
“집에서?”
“너 편한 곳.”
“그래. 네 방에서 하자.”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유현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두려워해, 찬희야?”
“…….”
“어떻게 내가 무조건 너를 싫어할 거라고 장담해?”
“…….”
“내가 널 얼마나…….”
“…….”
“……는지 알면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지간한 일에도 유현재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모종의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그리고 유현재는 단 한 번도 나를 의심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망설이는 건 역시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나의 죄는 그들의 자식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에도.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나는 말없이 뒤돌아 교실로 향했다. 몇 방울 흐르던 눈물은 이내 그치고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그러나 저녁에 가지기로 한 유현재와의 시간은 의외의 상황 때문에 무산되었다. 유현재가 유학 관련 수속을 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홀로 방에 앉아 유현재의 귀가를 기다렸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덤덤하게? 아니면, 울기라도 해야 할까? 때맞춰 알림음이 울렸다.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한재민의 핸드폰이었다.
[지금 나와]
나는 습관처럼 무시하려다 얌전히 답장을 보냈다.
[용건이 뭔데]
[나오기나 해]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난 후 문자 한 통이 추가로 도착했다.
[현재는 이미 여기 있으니까 ㅎㅎ]
씨발, 진짜. 욕을 짓씹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가 바로 현관으로 뛰어갔다.
“찬희야! 어디 가니?”
엄마가 실내화 소리를 내며 달려와 내 등을 붙잡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요.”
“이 시간에? 누구?”
“……아실 필요 없잖아요.”
“아버지가 너 절대 혼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라고 했어. 엄마한테 말 안하면 안 내보내 줄 줄 알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무시하고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그건 상대가 엄마가 아닐 때였다.
“현재 데리러 가요.”
“현재는 아버지가 보낸 차 타고 오는 중이라고 하던데.”
“네?”
“방금 네 아버지랑 통화했어. 같이 타고 온다고 하더라.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오지 않겠니?”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버지랑 같이 있대요?”
“그럼. 혹시 현재랑 연락했니?”
“……아뇨.”
“그럼 그냥 집에 있자, 응? 엄마랑 같이 있자.”
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핸드폰을 켜 문자를 다시 읽어 보았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유현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더니 누군가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현재야, 나…….”
-아이고. 찬희야.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가볍게 입술을 떨었다. 익숙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태연자약하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랑 있다니까 왜 굳이 연락을 하려고 해?
“……너, 왜 유현재 핸드폰을.”
-같이 있다니까? 내가 잠깐 핸드폰 맡아 주고 있는 거야.
“헛소리하지 마. 정말 같이 있는 거 맞아? 유현재 바꿔 줘.”
-찬희야. 네가 유현재 바꿔 달라하면 내가 넵! 하고 뭐, 바로 현재한테 전화기 넘겨야겠어? 누구 좋으라고. 그냥 밖으로 얌전히 나오기만 하면 될 걸 또 자꾸 일을 꼬네.
“…….”
-안 그럼 내가 말해버린다.
“…무슨….”
-너희의 그 막장드라마 같은 가족사 말이야.
“뭐……?”
-아, 진짜 나 얼마나 웃겼는지 모르겠네. 유도현 진짜 모범 망령 시민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착하게 살아왔는지.
“네가 어떻게 그걸.”
-내가 말했지, 찬희야.
“…….”
-난 너희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어.
“…….”
-그러니까 닥치고 빨리 나와.
전화가 끊겼다. 한재민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집 밖으로 나가 봐야 했다. 나는 결국 말리는 엄마를 설득해 대문 인터폰이 보이는 길 바로 앞까지만 가기로 하고 겨우 집을 빠져 나왔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한재민이라도 바로 집 앞이다. 엄마도 지켜보고 있고, 언제 어디서 목격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을 터였다. 나는 느리게 대문을 열고 나가 텅 빈 골목을 살펴보았다.
부드러운 엔진음이 들리더니 바로 앞 코너에서 외제차 한 대가 천천히 바퀴를 굴려 다가왔다. 운전석에는 답지 않게 안경을 낀 한재민이 앉아 있었다.
“얼른 타.”
“유현재는?”
“어허. 얼른 타.”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결국 한재민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한재민이 다시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 건너편 코너에서 또 다른 차가 다가왔다. 익숙한 차 넘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낯익은 운전기사와 뒤에 앉은 아버지, 그리고,
“유현재……?”
아버지와 유현재가 탄 차가 내 옆을 지나쳤다. 나는 굳은 채로 지나쳐가는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핸드폰 한 대 수신 조작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너…….”
“이래서 이론만 배운 헛똑똑이들이 실제로 다루기 쉽다니까.”
나는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뒷좌석에 앉은 누군가가 빠르게 코와 입을 틀어막아오는 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마취, 수면제 뭐 그 비슷한 것일 거라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빠르게 정신을 놓아버릴 리 없었으니까.
*
눈을 떴을 땐 역시나 병원과 비슷한 구조의 방에 누워 있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굳이 따지면 국마연 내부와 비슷한 듯했다. 팔뚝에는 여러 개의 바늘이 꽂혀 있었고 머리와 가슴 이곳저곳에는 전극 패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너무 잘 가네.”
중년의 여성 한 명이 가운을 입은 채 라텍스 장갑을 끼고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그녀가 입은 가운에 새겨진 ‘한성 병원’ 자수로 이곳이 한재민의 구역임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도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국마연에서 하던 거랑 똑같은 거니까. 아니, 좀 더 진보적인 연구라고 해야 하려나? 아무래도 국가단체다 보니 거기는 좀 보수적이지. 많이.”
“이거 납치예요.”
“그거야 한 대표님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고.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미안해, 학생.”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느샌가 갈아입혀져 있는 한성 병원의 환자복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팔뚝이랑 손목은 전부 다 찔러놔 가지고. 아무래도 다리도 써야 할 듯하네.”
이렇게까지 주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들이 몸속으로 한 방울씩 주입되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발등의 핏줄을 찔러오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감 기한이 촉박해서 이렇게 한꺼번에 해볼 수밖에 없네.”
“한재민 어딨어요?”
“어휴, 버르장머리 없긴. 요즘 애들 진짜 싸가지 없다더니 맞네. 대표님한테 막말도 하고.”
“어디 있냐고요.”
“어딨긴. 그분도 쉬셔야지. 여기 있어 봤자 뭐, 너 자는 거 자장가 불러주는 거 말곤 더 해? 듣고 싶어?”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중년의 여성은 내 신랄한 욕을 듣고도 별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주사한 곳을 테이핑했다.
“얌전히 주사 받고 시키는 거 몇 개만 하면 학교 가기 전까진 집에 보내 줄게. 여기 침대도 좋잖아. 그냥 푹 자.”
“말이 되는 소리예요?”
여자는 테이핑이 끝난 발등을 가볍게 찰싹 치고는 장갑을 벗어 대충 가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가 이틀은 밤을 샌 상태라 진짜 피곤하거든. 마흔만 넘어도 몸이 이래. 그러니까 혹시 이상 생기면 옆에 있는 버튼 누르고, 국마연에서 해봤지?”
여자는 내가 성질을 부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방을 빠져 나갔다. 나가기 전 잊지 않고 경고도 야무지게 내렸다.
“맘대로 움직였다간 진짜 한 대표 열받아서 뭔 짓 할지 나도 몰라. 얌전히 있어, 알겠지?”
쾅. 나는 순식간에 고요해진 방 안에서 그저 천장만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당장 바늘을 빼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한재민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상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들고 나왔던 옷가지나 핸드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 씨발.”
나는 눈을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조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반강제로 납치까지 해올 필요가 있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질문이 길어질수록 답은 미궁에 빠졌다. 유현재와 함께 있다고 굳이 거짓말을 해가면서 나를 데리고 온 건, 글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나는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렇게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