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전정우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연구원이 바늘을 빼주고 소독 솜으로 팔뚝을 문질러 준 뒤 집으로 곧장 가면 된다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로비로 나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 바로 앞에는 아버지가 준비해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거참 숨 막히는 루트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현재 없으면 이제 뭔 재미로 살지.
아버지를 도발한 건 순전히 내 욱하는 성격 내지는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에 아버지가 장단을 맞춰 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반응이라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반응?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조소했다. 머리 꼿꼿한 어른이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나쁘지 않다 여기는 아이는 대체 성장기부터 어떤 문제를 겪었던 것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그러니까 내 명의의 것)을 들어 메신저에 들어갔다. 가장 위에 있는 건 아무래도 유현재. 나는 그 이름 세 글자를 눌러 내용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나 조만간 한재민 뒤통수 때리러 갈 건데]
[너한테 허락 받아야 돼서]
[가도 돼?]
확인 이모티콘이 빠르게 떴다. 확인을 빨리 한 것치곤 답장이 상당히 느렸다. 나는 참을성 있게 창을 내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유현재의 답변을 기다렸다.
[같이 가]
말리는 것도 아니고, 같이 가자는 건 좀 웃겼다. 나는 소리를 죽여 웃다 말고 운전을 하는 기사님의 눈치를 봤다. 괜히 아버지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와, 찬희야.”
한재민은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수트를 입고, 웃기게도 잘 가꿔진 난 화분 앞에 화훼 전용 가위를 들고 서 있었다.
“못 본 새 많이 컸네. 역시 애들은 다른가.”
“너도 많이 달라졌네.”
“아, 나 요즘 난 키워. 얘네 동양란인데, 예쁘지?”
한재민이 자신의 무릎 정도까지 오는 화분 몇 개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얘네 진짜 웃긴 게, 햇빛을 받으면 드럽게 못생겨져. 다 시들고.”
실제로 햇빛이 든 창가 쪽의 이파리들은 비교적 푸릇한 다른 잎들에 비해 물 빠진 연둣빛으로 보였다.
“그래도 요즘 말 잘 듣는 건 얘네밖에 없다니까. 햇빛 쬐면 쬐는 대로 시들고, 적당히 시원하게 해 주고 물 주면 살아나고. 얼마나 투명하냐.”
“딱히 식물 얘기 하자고 온 거 아닌데.”
“나도야, 이 꼬맹아.”
한재민이 일부러 이파리가 닿은 무릎을 세게 털고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옆에 현재 군은 왜 붙이고 오셨을까? 경호? 감시?”
“알 바 없잖아.”
“아니면 쫀 건가? 쫄?”
“말장난할 거면 대답이나 제대로 해.”
한재민이 가위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 뻔뻔한 낯짝을 보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좋은 말 할 때 적당히 굴러 들어왔으면 됐잖아. 아니면 처음부터 얽히질 말든가. 먼저 와서 소원 들어주면 다 해 주겠다고 잉잉거린 게 누구지? 잘 자란 도련님이라 그냥 하다가 무서우면, 뭐 발이라도 쉽게 빼 줄줄 알았나?”
한재민이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유현재의 손이 내 손 위로 올라왔다. 언제든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드라마 안 봤어? 한번 발 들이면 나가기가 진짜 개 힘들어. 적어도 새끼손가락 하나는 잘려야 내보내 주잖아. 아, 물론 그건 진짜 따까리 기준이지만.”
“그래서 협조 안 하면 죽이겠단 뜻으로 학교에 그런 걸 설치한 거야?”
“음.”
한재민이 날카로운 가위 끝을 내 가슴팍에다 꾹꾹 눌렀다. 두껍지 않은 천 너머로 뾰족한 칼날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니지. 너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내가 들인 돈이며 품이 얼만데. 왜 널 죽여, 아깝게.”
“…….”
“똑똑하잖아, 그치?”
한재민이 고개를 들어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지지 않고 한재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현재. 찬희랑 행복해지고 싶지?”
유현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한재민은 굴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그럼 그 아저씨 밑에 있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와야지. 찬희 데리고.”
한재민의 말투는 제법 단단했다. 원래부터 화술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 아저씨가 어떤 아저씬 줄은 알아?”
“…….”
“극악무도하고, 잔인하고, 야, 그냥 사이코패스야. 당장 법원에 넘겨도 무기징역은 받을 만큼.”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유현재는 나를 의식한 건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아무래도 내 아버지이다 보니 나쁜 말을 듣는 건 거북한 모양이었다.
“말씀이 지나쳐? 꼬맹이들아, 이게 사실적시라는 거야. 알겠어?”
“너는 뭐 대단하게 정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지껄이네.”
“나? 나도 뭐 좋은 인간은 아닌데.”
“…….”
“적어도 그런 식으로 사람 하나 병신 만들어가면서 살진 않지.”
‘병신’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한재민이 유현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만해.”
“무섭나 보네. 찬희야.”
“뭘 원하는데, 그래서. 용건만 말하자.”
“이미 너희 아버지한테 구구절절 다 일러바쳤으면서 다시 또 딜을 하자고? 건방지네. 지금의 넌 나랑 동등한 처지가 아니라 내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이야.”
한재민이 결국 가위를 바닥에 던지고 이번엔 내 볼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국마연에서 하는 실험 있지?”
“…….”
“시치미 떼지 말고. 거기에 네 몸 팔아 주고 있잖아.”
“어감 한번 좆같네.”
“그거 다시 이쪽으로 넘겨.”
“……뭐라고?”
“우리 병원에서 진행할 거다. 앞으로 너에 대한 모든 것은.”
“그건…….”
“뭐, 동시에 기증해 줘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가 먼저 알 거거든.”
한재민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내 뺨을 조금 더 세게 치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결국 보다 못해 한재민의 손목을 잡아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맞부딪혔다. 스파크라는 게 보인다면 아마 낙뢰가 내렸을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손은 떼고 말하세요.”
“교육 한번 잘 시켰네.”
한재민이 손을 내렸다. 그의 손목엔 마치 화상을 입은 듯 붉은 핏줄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꽤 징그러운 모양새였다. 나는 유현재를 힐끗 쳐다보았다.
“유학 가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한재민의 뒤에 있던 남자들이 금방이라도 우리를 칠 듯 다가왔다. 한재민이 상처 나지 않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냅둬. 끼어들지 마.”
남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둘 다.”
완전히 말려 들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너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아.”
한재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희 같은 애들은 말이지, 햇빛 하나 없는 데서 대충 물만 주고 키워야 쑥쑥 큰다고.”
“…….”
“아버님께 꼭 전해드려. 편하게 사시려면 아들내미 이렇게 싸고돌지 말라고.”
한재민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제법 센 악력이었다.
“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유학이나 잘 다녀와. 얜 절대 안 죽으니까.”
나는 순간, 절대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전정우의 표정이 떠올랐다. 날 죽게 하지 않겠다는, 어찌 보면 굉장히 비슷한 맥락의 대사였지만 다가오는 어감은 달랐다. 자신을 인간적이라 칭하던 전정우가 생각났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적어도 두 사람이 말하는 인간적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욕망 그 자체임엔 틀림없었다. 그 안에서 나는 결국 도구일 뿐이었다. 나의 인간적임은 전혀 그들의 고려 대상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인간적인 욕망은 무엇일까.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나는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내 시선을 느끼고 뒤에서 가볍게 손을 잡아 왔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
“넌 그냥 그대로 유학 가.”
숨 막힐 정도로 거대한 건물을 빠져 나오고서야 나는 겨우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유현재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요는 아닌데, 그냥 내 생각이야.”
내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
대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유현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야 돼.”
“……응.”
“넌 강해, 그렇지?”
유현재의 물음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결코 망설이지 않은 척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게 너와 나, 모두 약점 없이 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야.”
이해하고 있음에도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터져 나왔다. 나는 애써 그것을 누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난 무조건 강해질 거야. 어쩌면 너보다.”
“이미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꼭 힘만이 아니더라도, 그냥 모든 것이.”
“…….”
“다 너보다 강해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미안해. 너무 이기적인 말이라서.”
“너 진짜 재수 없고 착하네.”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유현재는 전혀 웃지 않았지만 나는 길 위에 서서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저렇게까지 바보일 수 있다니. 저렇게까지, 나만 생각할 수 있다니. 맹목적인 사랑은 가끔 너무 우스운 모양새를 할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우스움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래, 나보다 꼭 강해져. 알겠지?”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모든 사건을 정리하기에는 지금이 딱 적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