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76화 (76/115)

76.

체육 대회는 소위 말해 개같이 멸망했다. 일단 나와 유현재는 1등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남자 녀석들이 아예 여자애들을 들고 그냥 뛰었기 때문이었다. 반장과 고한결은 목에서 피가 나도록 부정행위라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에 유현재도 나를 들고 뛰긴 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남에게 번쩍 들릴 정도의 무게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에게 들쳐매지는 기분은 생각보다 좀 요상했다.

“유현재 힘 존나 세더라.”

“그니까. 유찬희 키가 좀 작긴 해도 저거 다 근육일 거 아냐.”

“아니, 딱히 작진 않은데.”

고한결과 반장이 나와 유현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키 차이를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근데 어떻게 1등을 한 종목도 못하냐?”

“그러니까. 하다못해 뭐 미션 달리기라도 제대로 해보던가.”

“아니,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을 데리고 오래.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교장 있잖아.”

“되겠냐고.”

고한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뒷정리를 끝내니 해는 어느새 반쯤 떨어져 있었다. 농땡이 피우지 말라는 체육부장의 말에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유현재와 함께 100L짜리 쓰레기봉투를 들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유찬희!”

누군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체육복을 걷어붙이고 잔뜩 땀을 흘리고 있는 이주현이 있었다.

“왜 이렇게 마주치기가 어렵냐?”

“1등 한 거 자랑하러 온 거야?”

“그런 유치한 이유는 아니고.”

이주현이 옆에 있던 유현재를 흘끗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너 그때 괜찮았냐고.”

“아, 맞아. 그때 고마웠다.”

“뭐. 내가 한 건 딱히 없어. 그 뒤에 쌤이 오셔서 다 처리했거든.”

“쌤? 무슨 쌤? 보건쌤?”

“아니? 특관쌤.”

“특관쌤이 왔다고? 왜?”

“몰라. 엄청 급하게 오시더니 너 데리고 간다고 하셨어.”

“나를? 국마연에선 네가 데리고 왔다고 하던데.”

“응. 쌤 차에 같이 타고 병원 가고 있었는데, 접촉 사고가 났거든. 쌤은 그거 처리해야 하고 너는 진짜 위험해 보여서. 그냥 제일 가까운 국마연으로 데리고 갔어.”

“근데 왜 국마연이야? 보통은 병원 가잖아.”

“특관쌤이 마나 때문일 거라 했거든. 그래서 원래는 한성병원 마나연구센터에 가고 있었어.”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아났다. 한성병원?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특관담임이 갑자기 보건실로 쳐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한성병원에 데리고 가려 한 건 분명 의도된 바일 것이었다.

“그럼 스파이가…….”

“어? 스파이?”

“아냐. 아무튼 고마워.”

유현재 또한 눈치챈 모양인지 심각한 얼굴로 이주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나가 어떻길래 그렇게까지 피를 흘리는 거야?”

“그냥. 좀 지병이 있었어.”

“지병이 있다고?”

얼렁뚱땅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주현이 제법 눈을 크게 뜨며 놀라 되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주현은 생각보다 제법 집요했다.

“그때 진짜 심각했었다고. 너 그러다 나중에 헌터 활동 할 때 지장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안 그래도 국마연에서 많이 도와주시고 계셔.”

“그래?”

이주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금수저가 좋긴 하네.”

좋은 의도의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비꼬는 듯한 말투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위권의 경쟁의식에서 열등감은 필수 요소였다. 이주현에겐 벌써부터 그게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넘기고 이주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야. 우리 이거 버리고 얼른 가야 돼. 너도 얼른 가.”

나는 유현재를 끌고 이주현을 지나쳐 갔다.

“되게 기분 나쁘게 말하네, 재.”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나는 모른다고 해서 널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야 너는…….”

나 좋아하니까. 뒷말은 삼키고 내가 침묵을 지켰다.

“너 좋아하니까?”

유현재가 되레 내가 잘라먹은 말을 붙여 주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웃길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아직 나에 대한 감정도 남아 있을 녀석에게, 너 나 좋아하잖아.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나는 뻔뻔하지 못했다.

“그러게. 그러네.”

유현재는 담백하게 수긍하고는 나를 지나쳐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어쩌면 우리 사이의 적정선은 이 정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

[찬희야, 체육대회는 재밌었어?]

어이없을 정도로 다정한 어투였다. 나는 또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한재민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마치 안부 인사를 건네듯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 덕분인건지, 혹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물리적인 접촉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특관담임이 한재민의 사람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는 세상만사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늘 어딘가에 앉아 정해진 교육 과정으로만 수업을 이끌어가는 교사였다. 그가 무언가의 이유로 한재민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쉽사리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나와 특별한 접점이 없었다. 일부러 자주 동선이 겹친다거나, 말을 건다거나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유현재는 1달 뒤 바로 영국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다소 촉박한 기간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듯. 유현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장 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스티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사진 속 나와 유현재는 밝게 웃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할까.

나는 뒤늦게 유현재를 붙잡는 상상을 했다. 말 그대로 상상이었다. 강해져서 돌아오고 싶다는 유현재를, 내가 붙잡을 처지는 되지 못했다.

그냥 보내 줘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내가 다시 죽게 되면,

우리는 다시 그때로…….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무언가 머리를 빠르게 스쳐갔다. 나는 조심성 없이 허공에 외쳤다.

“시스템!”

조용했다. 늘 그랬듯.

“빨리 나와.”

그리고 나타났다. 늘 그랬듯. 그리고 상황에 적절한 질문을 내게 던져주었다.

<세이브 하시겠습니까? (2/3) Y/N>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세이브 해 줘.”

허공에 떠 있는 Y에 붉은 빛이 깜빡였다. 로딩창이 뜨더니 이내 세이브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죽어도 다시 이 날짜, 이 침대 위로 올 것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다시 돌아와 유현재를 보내지 않으면 됐다. 다시 유현재가 나에 대한 감정을 리셋한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됐다. 그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져 눈이 감겼다. 오로지 그 생각 단 하나만으로.

*

바로 전날이 체육대회였음에도 우리는 예외 없이 특관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담임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우리에게 체력 단련을 가장한 극기 훈련을 시켰다. 한 차례 세트가 끝나고 나는 조심스럽게 담임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저, 선생님.”

담임은 간이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하다 나를 슥 쳐다보았다.

“저 쓰러졌을 때 도와주셨다고 들어서요.”

“누가 그러디?”

“주현이요.”

“아.”

담임이 이주현을 흘끗 바라보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가다가 접촉 사고 나서 깽값만 물었지, 도운 건 없어.”

“그래도 마나 문제란 걸 아신 게 선생님이라고 하시길래요.”

“그래, 너 말 잘했다.”

담임이 핸드폰을 들고 삿대질 하듯 나에게 흔들어댔다.

“도대체 마나가 불안정해질 이유가 뭐란 말이냐? 나이가 몇인데 설마하니 컨트롤도 못하는 건 아닐 테고.”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목 뒤에 손을 갖다 대며 딴청을 피웠다.

“저도 잘…. 아무튼 그래서 고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유찬희 너, 그 병인지 증상인지 나을 때까지 당분간 훈련 나오지 마.”

“네?”

“괜히 훈련 시간에 쓰러지거나 피 토하면 어떡할 건데?”

“아니, 이제 그럴 일 없을 텐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래, 말 나온 김에 그냥 지금 가라.”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너 쓰러지면 내가 시말서 써야 하거든? 선생님은 그거 이제 귀찮다. 나으면 진단서 떼서 다시 와.”

“아니, 잠깐만요!”

나와 담임이 벌이는 소란 때문에 쉬고 있던 모든 구성원들의 눈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유현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빨리 나가라니까. 애들 4세트는 더 해야 돼.”

담임은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뒷걸음질 쳐 강당 문을 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교실 건물이 있는 곳까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저렇게 매사를 귀찮아하는 인간이 한재민의 끄나풀이라고? 뭐 책임지게 하기만 해도 질색팔색할 것 같은 아저씨를? 나는 속으로 잔뜩 담임을 욕하며 교실로 돌아갔다. 갑자기 교실에 돌아온 나를 보고, 수업을 하던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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