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축 늘어진 끈을 들고 나는 유현재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유현재도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들고 있던 끈을 흔들며 말없이 그를 재촉했다.
“……뭔데?”
“연습.”
“연습?”
“체육대회 연습. 우리 그때 이후로 못했잖아.”
유현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안해져서 손을 거두려는 순간, 유현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자. 연습.”
체육 대회 전날이었던 터라 운동장은 연습을 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습을 핑계 삼아 데이트를 하거나 썸을 타는 놈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지만. 나와 유현재는 겨우 자리를 잡고 발에 끈을 동여맸다. 내가 끈을 묶는 동안 유현재는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왼발부터 가자.”
내가 유현재의 허리에 손을 감자, 몸이 움찔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유현재는 망설이다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제대로 잡아.”
“잡고 있어.”
우리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몇 번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 넘기고서야 목표한 100미터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어떡하지.”
“왜?”
“우리 이래선 꼴찌 할 것 같은데.”
“…….”
“몰래 마나 써서 적당히 빨리 이동해 보는 건 어때?”
내 제안에 유현재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찬희 너 편법 싫어하잖아.”
“싫어하지. 근데 반장이 더 무서워.”
“연습을 더 하자.”
유현재가 정석적인 답을 내놓았다. 나는 말없이 왼발을 내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몇 번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유현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해답을 주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 모습이 모순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비밀 모두 지금 당장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쉽다, 그치.”
“그러게.”
“현재야.”
우리는 잠시 쉬자는 핑계로 발목 끈을 그대로 묶은 채 벤치에 앉았다. 내 부름에 유현재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 성격 진짜 이상하지.”
“갑자기 무슨….”
“나도 알아. 비밀은 많고 말은 안 해 주고, 혼자 해결하려 하고. 만약 네가 그런다면 나는 너무 화가 날 것 같아. 진짜 이기적이지.”
“……알고 있는데 그러는 거야?”
“진짜 성격 더럽다. 나.”
“그렇게까진 아닌데……”
“근데 진짜 나만큼 성질 더러운 사람은 이 세상에 엄청 드물 거야. 적어도 이 학교엔 나밖에 없을걸.”
“…….”
“그니까 내 겉가죽이랑 똑같은 사람이 와도…… 네가 헷갈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이 말을 하고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유현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이 침묵을 견디고 즐기려 노력했다.
“그래. 너 같은 애는 너밖에 없지.”
“맞긴 한데 너무 빨리 수긍하는 거 아냐?”
“그런 널 좋아하는 내가 그냥 한심한 사람인거고.”
“우리 뭔 단점 배틀 하는 거야?”
“말해 줘.”
단정하게 정리 되어있던 유현재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막 해가 지려는 터라 붉은 노을빛이 온통 유현재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예쁘다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했다.
“다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
유현재가 내뱉은 말의 전제는 결국 내가 숨기는 비밀이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거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말해 줘.”
“……정말?”
“나는 그걸 해결하려 노력하겠지. 그 모습을 보기 싫으니까 네가 말하지 않는 걸 거고.”
“…….”
“근데 난 거짓말을 못 하겠어.”
“응.”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부딪히면 나도 힘들겠지.”
“응.”
“내 자신이 무력하고 바보같이 느껴질 거고, 또 어떤 경우엔 슬프거나 화가 날 수도 있겠지.”
“응.”
“근데도 알고 싶은 거야.”
유현재가 머리를 정리하며 운동장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 일이니까. 그러니까 말해 줘. 언제든.”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는 그제야 밝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기다릴게. 멀지 않게만 말해 줘.”
“정말로… 감당할 수 있어?”
“그래. 당연히.”
당연히 안 될 걸 알고 있다. 이 사실은 나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잔인한 상황이기에.
“뭐든 받아들일 준비를 매일 하고 있어.”
준비로는 되지 않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걸, 유현재는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기다릴게.”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전정우는 여전히 감정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로봇처럼 빳빳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전정우가 안내한 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순순히 침대로 올라갔다.
“며칠간 저번과 비슷한 증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오.”
의외라는 듯 전정우가 차트에 뭔가를 휘갈겼다. 뭐든 데이터로 기록될 것 같은 삭막한 곳에서 차트에 직접 글씨를 쓰는 모습은 뭔가 낯설었다. 나는 명백한 시비조로 질문을 던졌다.
“시한부도 고칠 수 있다니, 명의네요.”
“아,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군요.”
“직접 말해 주시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미성년자잖습니까. 보호자에게 말하는 게 안전하죠.”
전정우는 마치 내 질문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빠르게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그것이 못내 짜증났다.
“그리고 저는 고칠 수 있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노력해 보겠다고 했을 뿐이지.”
“되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시는 타입?”
“신중하다고 해두죠.”
전정우가 차트를 내려놓고 죽 늘어져 있는 기계 중 하나를 끌어와 전원을 켰다.
“손목 좀 걷어 주시겠습니까?”
전정우가 내 손목에 젤을 바르더니 패치 같은 것을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심전도 검사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심장 쪽이 아니라 손목이긴 했지만.
“이게 뭔데요?”
“그땐 허락을 구하지 못해서 하지 못했는데 마나량을 제대로 측정해야죠.”
“이런 걸로 마나량 측정이 되나요?”
“되니까 사용하는 거겠죠? 어린 시절 1차 선별 할 때 기억하시나요? 그때도 기계 안에 손만 넣었잖습니까.”
순간 기계의 본체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정우는 기계에 출력된 내용을 확인하고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높네요. 이 정도로 높은 건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나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 기존 마나와 유도현의 마나까지 더해졌으니 당연한 결과 값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불안정한 것도 거의 처음 보고요.”
“…….”
“마치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마나를 섞어놓은 것 같아요.”
내가 계속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전정우는 손목에 붙여놓은 패치를 하나씩 떼기 시작했다.
“이게 제대로 융화되지 않는다면 저번 같은 일은 계속 일어날 겁니다.”
“그렇겠죠.”
“물과 기름을 섞는 방법이 뭔 줄 아십니까?”
“…….”
“비눗물을 넣는 거죠. 그러니까 또 다른 액체를 아예 주입 시켜버리는 겁니다.”
“아, 네.”
“아마 똑똑하셔서 바로 이해하셨으리라 믿지만, 어쨌든 저희는 이제 찬희 군의 몸에 비눗물을 넣어 볼 겁니다. 뭐, 진짜 비눗물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그 비눗물이 뭔데요?”
“이거죠.”
전정우가 들고 온 것은 붉은 액체가 담긴 밀봉 팩이었다. 붉은 액체는 마치,
“아무리 봐도 혈액이죠.”
“진짜 피예요?”
“그럴 리가요.”
전정우는 능숙한 손짓으로 액체가 든 팩을 고무관에 연결시켜 살균된 바늘까지 이어 붙였다.
“그냥 수액 맞는 느낌으로 한숨 주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게 뭔데요?”
“걱정 마세요. 임상 실험을 모두 거친 약품이니까.”
나는 찝찝한 표정으로 아까 전 내밀었던 손목을 다시 전정우에게 내주었다. 혈관을 찾아 바로 바늘을 찌른 전정우가 곧 테이프로 바늘 주위를 동여맸다.
“그럼 1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돼요?”
“그럼요.”
전정우가 차트를 들고 방을 나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첨언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 싶으면 옆에 호출 벨을 눌러주세요.”
옆을 보니 붉은색 버튼이 하나 있었다. 제법 병실 같은 구조이긴 했다.
“물론 실시간으로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쾅. 나는 닫힌 문을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감시하고 있다는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하냐고. 어차피 뭔가 움직일 일도 없었지만 감시당하는 기분 자체가 썩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핸드폰이라도 만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잠에 반항할 틈도 없이 눈이 감겼다. 수면제라도 넣어놓은 걸까.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