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내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충분히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특별한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법이므로.
“어.”
교과서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핏물에 급하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아침부터 가슴이 끓듯이 뜨거워 체하기라도 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고한결이 놀라 앞의 녀석의 등을 툭툭 쳐 휴지를 받아냈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코피는 휴지 뭉치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일 때까지 쉼 없이 흘러내렸다. 피로 젖어 책상 위에 진득하게 붙은 휴지더미를 보고서 고한결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나는 결국 손을 들어 선생님을 불러야 했다.
바로 보건실로 가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 나는 텅 빈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따라붙던 유현재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머리가 핑 돌았다. 계단에서 비틀거리고 있으니, 누군가 후다닥 달려와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뭐야? 너 누구한테 맞았어?”
이주현이 놀란 얼굴로 내 몰골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얼굴이며 교복 상의까지 피로 얼룩덜룩해져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나름대로 유머랍시고 던진 말이었다.
“내가 누구한테 맞을 놈으로 보이냐?”
“아니면 왜 이러는데?”
“몰라.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보지.”
“그런 것치곤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
나는 결국 이주현의 부축을 받고 보건실까지 겨우 걸어갔다. 그냥 일반적인 코피인 줄 알았던 보건 선생님도, 흐르는 피의 양을 보고 놀라 기함했다. 이미 흐른 양이 제법 되어 피부는 허옇게 질려 있었다.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왜 고집이야, 너 지금 얼굴 새하얗게 질렸어. 피 조금만 더 흐르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그래, 쌤 말이 맞아. 유찬희 너 뭐 1급이라고 다 안 죽는 줄 아냐?”
덩달아 따라와 심각한 상황에 끼어들게 된 이주현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과다 출혈의 원인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점멸한다. 큰일이다. 또 기절이군.
*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소리로나마 상황 파악을 하고 일어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의 발소리, 웅성대는 소리를 제외하고 딱히 다른 소음이 들리진 않았다. 희미한 약품 냄새에 나는 이곳이 병원임을 직감했다. 병원이라면, 작정하고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마나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적당히 스트레스를 핑계 삼아 넘어갈 스토리를 생각하며 나는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거센 빛을 받아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깼군요.”
내 앞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피곤하고 예민한 인상을 가진, 안경을 낀 남자였다. 남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곧 그가 의사가 아니란 점을 눈치챘다.
“회복력이 대단하네요.”
“누구세요? 여긴 어디고….”
“아.”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갔다.
“여기는 국마연입니다.”
“국마연? 국립 마나 연구소요?”
남자는 내가 질문을 덧붙이자 성실하고 짧은 대답을 하며 들고 있는 차트에 뭔가를 계속 적어 내려갔다. 남자의 가운 왼쪽에는 아마도 그의 이름일 것인 글자 석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전정우.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나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유찬희?”
“…….”
“아버지는 전투부 보안국장. 얼마 전 치룬 랭킹전에서 1급 차지함. 한마디로 타고난 금수저에 엄청난 수재.”
전정우는 마치 교과서를 읽어 내려가듯 무미건조하게 나의 정보를 읊어댔다. 이 정도의 정보는 사실 뭔가를 캐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어찌됐든 모르는 인물의 입에서 내 신상 정보를 듣는 건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병원도 아니고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할 텐데 물어보지도 않네요. 별로 경계심이 없는 타입인가요?”
“아뇨.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주실 것 같아서 안 물은 것뿐인데요.”
“그래요? 딱히 숨길 건 없는데.”
“되게 수상쩍어 보이세요, 지금.”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인상이 이렇다 보니.”
전정우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기계적으로 내 말에 대답했다.
“그래서.”
“…….”
“왜 갑자기 마나가 이렇게까지 증폭 됐을까?”
나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국마연, 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한 결과이긴 했다. 가끔 심하게 다치거나 마나에 타격을 입은 랭커들이 병원 대신 이곳을 찾긴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치료라기보다는 뭔가를 ‘고치기’ 위해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했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연구소였다. 다친 랭커는 그들에게 환자가 아니라 연구 대상이었다.
“국마연은 본인 허락도 없이 사람을 마음대로 막 다뤄도 되나 봐요?”
“당연히 안됩니다. 됐으면 찬희 군 깨기 전에 이미 이유까지 알아냈겠죠.”
“웃긴 소리인 거 본인도 아시죠?”
“웃긴가? 나 평소에 재미없단 소리밖에 못 듣는데.”
“됐습니다. 그냥 빨리 갈게요.”
“보호자 올 때까지 기다려야죠.”
“보호자?”
“그래요. 보호자. 부모님 혹은 법적으로 등록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보호자.”
“부모님까지 부를 일 아니잖아요. 그냥 갈….”
“부를 일이 아니라고요? 여기 와서 안정제 투여 안 하고 괜히 병원에서 수액이나 맞고 있었으면 찬희 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과장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다시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이 연관되는 순간 안 그래도 복잡한 일들이 더 꼬일 게 분명했다.
“이미 연락 드렸나요?”
“그럼요. 학교에서 연락 드렸죠.”
“전 어떻게 하다가 여기 오게 된 거죠?”
“찬희 군 친구가 데려다 줬습니다.”
“친구요?”
“네. 키는… 이 정도에, 좀 딴딴하게 생긴 친군데.”
모호한 묘사였지만 나는 이내 그 사람이 이주현이라는 것을 유추해냈다. 이주현은 왜 여기로 나를 데리고 온 것일까? 또 다른 의문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전에, 복도에서부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걸 듣고 나는 부모님이 도착했음을 알아챘다.
“찬희야!”
엄마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달려왔다. 멀쩡한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기껏 해 봤자 엄마 혼자 올 줄 알았던 나는, 바로 뒤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슬쩍 전정우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보안국장님께서 오시는 건 우리도 다소 신경 쓰이는 일이다 보니.”
내가 누워있는 1인실 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서 있었다. 아버지와 전정우가 서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들 녀석이 소란스럽게 굴었습니다. 많이 신경 써 주셨을 텐데.”
“아닙니다. 덕분에 흥미로운 사실도 알아냈고요.”
“흥미로운 사실이요?”
“아, 아버님은 모르는 상태인가요?”
천연덕스러운 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가서 설명 드릴게요.”
“빨리 갈 필요가 있겠니. 아직 안정제도 좀 남았는데.”
아버지는 엄마에게 남아 있으라 간단히 말하고 전정우와 함께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영원히 숨길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병원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야, 응? 또 엄마 아빠한테 숨기는 거 있니?”
“제가 뭘 숨겨요.”
“찬희야. 엄마는…. 요즘 많이 두렵네.”
유찬희의 부모에 대한 애정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고 스스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잔뜩 찡그린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죄송해요.”
한숨처럼 나간 사과의 말에 엄마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가 힘이 안 돼서 미안해.”
“엄마 도움이 뭐가 필요해요, 제가 애도 아니고.”
“아버지는 다르잖니. 힘든 일이 있으면 아버지한테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담해. 응?”
약해진 마음이 순식간에 자조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상담하라고? 정말 그걸 해결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걸까?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여자가 과연, 자신의 남편이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누구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그걸 알든 모르든 유찬희와, 유찬희의 가족이 마땅히 혐오 받아야 할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엄마는 아버지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셨어요?”
갑작스러운 딴소리에 엄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엄마가 저 남자의 본성과 정체를 알고도 결혼할 마음이 들었는지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니? 생각도 안 나는데.”
“진짜 생각 안 나요?”
“어휴. 20년 전 일인데 그럼 생각이 나겠어? 요즘은 하루 전 일도 깜빡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엄마의 표정은 묘하게 상기되어갔다. 그 변화를 눈치채자마자 나는 아주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저 표정, 저 행동.
“사랑… 하셨겠죠?”
엄마는 괜한 질문을 한다며 대답을 피했다. 나 또한 일부러 다시 침대에 누우며 자연스레 엄마를 등졌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속이 메슥거렸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사랑이란 이렇게도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구나. 내가 유현재 하나를 위해 이 모든 불행을 견디는 것 또한 예외는 아닐 터였다.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나를 방으로 부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버지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멀뚱히 서 있었다. 이마를 짚고 앉아 있던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착잡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찬희야.”
아버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조금 잠긴 듯 더 낮아진 톤으로 겨우 대답했다.
“네.”
“도대체….”
아버지가 다시 이마를 짚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