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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 사용 설명서-68화 (68/115)

68.

유도현은 잠시 멈춘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와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현재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지만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양분이 돼.”

“그래.”

“내 뼈와 살이 되어서.”

“그래.”

“날 미워하는 만큼 내 힘이 돼.”

“그래.”

유도현의 형상을 한 그 물질들은 다시 연기가 되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연기가 몸속으로 반쯤 들어오자마자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쿨럭거리며 뱉어냈다. 핏덩어리였다. 피를 본 유현재가 사색이 되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찬희야, 그만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현재.”

나는 다시 쿨럭였다. 이제는 코에서도 피가 흘러 나왔다. 뜨거운 뭔가가 역류해서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손으로 피를 닦아내며 유현재의 답을 기다렸다. 유현재는 빠르게 대답했다.

“응, 찬희야. 응.”

“내가 왜 이 짓을 한 줄 알아?”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유현재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이기려고.”

“어?”

“아니, 널 죽이려고.”

유현재는 믿기 힘든 말을 듣고 놀란 듯했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유현재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한때는 그랬던 거 이해해.”

“한때?”

“응. 한때.”

“그러면 나 용서해 줄 수 있어?”

“내가 말했잖아, 이미…….”

“널 죽이려고 이런 짓까지 했던 나를 용서한다고?”

나는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이제는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에서 나온 피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코에서 나온 피는 입안으로 들어와 내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쿨럭거리며 다시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잖아.”

유도현의 사념이 모두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쯤엔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이러한 말을 하라고 따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랑이라고.>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랑이라고.”

<너 따위가 나를 용서하고 말고야.>

“너 따위가 나를 용서하고 말고야.”

<언제까지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머리에서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나는 마지막 사념까지 모두 흡수를 마쳤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바람이 잠잠해졌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도 모두 깔끔하게 사라졌다. 속에 있던 마나가 커졌음이 바로 느껴졌다. 성공한 것이다. 유현재는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그래, 충분히 이해했다.

“가도 돼.”

유현재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귀찮다는 듯 얼굴에 범벅인 피를 옷자락으로 닦아냈다. 얼굴에는 피 말고도 다른 것들이 마구 묻어져 나왔다. 팔 위로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유현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리 가.”

“찬희야.”

유현재가 천천히 나를 감싸 안았다. 귀에 바로 맞닿는 심장은 여전히 세게 뛰고 있었다.

“울지 마…….”

내가 울고 있다고? 도대체 왜? 나는 그제야 팔에 묻어 나온 다른 액체가 눈물임을 깨달았다. 자각을 하니 더더욱 서럽게 울음이 났다.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우는 소리에 유현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왜 울어, 네가 그런 말 해놓고.”

유현재의 옷 앞쪽이 피와 눈물로 물들었다. 축축해진 느낌이 얼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유현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계속해서 안아 주었을 뿐이었다.

“맨날 몰래 울어.”

유현재가 속삭였다.

“내 앞에서도 울어 주길 바랐는데 드디어 울어 주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유현재의 품에 더더욱 세게 얼굴을 묻었다.

“근데 이렇게 우는 건 생각을 못했어. 그래서 예상보다 더 슬프다.”

슬프다, 라는 직접적인 말이 내 머리에 더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슬프네. 찬희야. 네가 우는 거 보는 거. 근데 앞으로 내 앞에서만 울어 줬으면 좋겠어.”

이상하지? 유현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또 다시 저었다. 파묻은 얼굴을 떼어냈을 땐 이미 온 얼굴이 열기로 가득했다.

“멜로드라마 그만 찍지 그래?”

한재민의 말에 나는 퍼뜩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쪽은 누구세요?”

유현재가 진작에 했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한재민이 여전히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유현재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난 너 잘 아는데.”

“저를 안다고요?”

“응. 당연하지. 근데 넌 아직도 날 몰라?”

“제가 그쪽을 어떻게 압니까?”

“와, 나 아직 일 좀 더 해야 하나 봐. 그래도 뉴스에 겁나 자주 나오는 사람인데.”

유현재가 그 말을 듣고서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혹시…… 한성 그룹 한재민?”

“딩동댕. 정답.”

“그쪽이 왜 여기에…….”

“뭐, 일종에 후원자 자격으로 온 거지. 찬희의 서포터랄까.”

“서포터? 후원자?”

유현재는 대략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피를 모두 얼굴에서 닦아내고 한재민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끝이야.”

“왜, 이제 시작이지.”

한재민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태껏 실컷 나 이용해먹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널 쓸 차례 아닌가? 왜, 이제 와서 막 사랑도 생기고. 힘도 생기고 하니까 못해먹겠어? 다른 마음이 생겨?”

여전히 잡고 있는 유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찬희야, 싫으면 하지 마.”

“와, 사랑꾼 납셨네.”

“하기 싫다는 거 강요하지 마세요.”

“애기들아.”

한재민이 우리를 어르고 달래는 표정으로 불렀다. 유현재는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한재민을 노려보았다.

“니들은 아직 애새끼들이라 모르겠지만 어른의 세계는 좀 냉정하거든?”

“…….”

“주는 게 있는데 받는 게 없으면 진짜 짜증난다고.”

“…….”

“왜? 쉽게 해결될 일을 굳이 어렵게 해결해야 하니까.”

한재민이 유현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해하지? 너 똑똑하잖아. 얘가 아는 것보다 더.”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생각보다 널 잘 알아.”

대화의 주체는 자연스럽게 유현재로 넘어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재민을 쳐다보았다. 유현재의 뒷조사를 한 건 당연했지만 저런 말을 하며 도발할 이유는 없었다.

“한재민, 그만…….”

“너 내숭 잘 떨더라?”

유현재가 그 말에 반응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만해요.”

“연기 존나 잘하더라. 진짜.”

“연기 아닌데요.”

“와. 내가 본 게 있는데.”

“뭘 보셨는지 몰라도 더 이상 제 뒤 캐지 마세요.”

“협박하니까 너무너무 무섭네.”

“장난치지 마시고요.”

“장난 아닌데. 너 같은 애 앞에서 장난쳤다가 목 날아갈 일 있으려고?”

유현재의 이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찬희야, 어떡하냐. 넌 유도현을 흡수해야만 겨우 얘를 따라갈 수 있는데.”

“그만해.”

유현재의 으름장에 이제서야 한재민이 양손을 들며 나 몰라라 하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나는 유현재를 타일렀다.

“쟤 원래 저래. 더 이상 상대하지 마.”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길들여놔서 그런가, 찬희 말은 기똥차게 듣네.”

한재민이 궁시렁거리며 차로 향했다.

“안 타냐, 애기들아?”

한재민이 뒷좌석 대신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 택시도 안 잡히는 데야.”

*

유현재는 연락이 되지 않는 내가 걱정돼 집 밖으로 나왔다가, 한재민이 보낸 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의 차를 덥석 타버린 유현재도 유현재지만, 도대체 한재민이 왜 이곳에 유현재를 끌어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재밌잖아.”

한재민다운 개소리였다.

“난 이걸 보면 현재가 찬희 냅다 버려버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랑이 찐하네. 어린애들이라 그런가.”

유현재는 그새 한재민의 개소리와 도발에 적응한 건지 하, 하고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나보다도 빠른 적응력이었다.

“아무튼 잘됐어. 둘이 사이좋아진 거, 생각보다 나한테 이득이네.”

“누가 유현재 여기 끌어들인대?”

“와, 찬희야. 아직도 현재의 사랑을 모르겠니?”

한재민이 자기가 더 상처받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슴 쪽을 장난스레 움켜쥐었다.

“현재는 네가 지금 당장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가자 해도 갈걸? 안 그래?”

유현재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개무시하네.”

한재민이 괜히 머쓱하다는 듯 말했다. 전혀 머쓱하지 않으면서 하는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너는 존나 인생이 죄다 장난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재민이 백미러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처럼 세상 진지한 사람이 어딨다고.”

차는 집 대신 어떤 저택의 앞에 섰다. 경계하는 표정으로 한재민을 바라보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 집이고. 너네 그 피범벅 된 옷으로 집 들어갈 거야?”

나는 입고 있던 재킷과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엄마가 보면 기절할 법한 양의 피이긴 했다. 유현재 또한 내 피로 인해 옷이 많이 더러워진 상태였다.

“괜히 오해받고 뒷조사당하면 곤란하니까 선심 써 주는 거야. 내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한재민의 집은 우리 집만큼이나 넓었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새삼 그의 거처를 보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작중에서도 한재민이 자신의 집을 가르쳐 주던가? 뭐, 초반에 죽는 조연의 사정 따위 길게 서술할 바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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