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66화 (66/115)

66.

“안 올 줄 알았나 보네.”

“지금의 찬희라면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잡생각이었네.”

“아니지. 넌 올라오면서도 계속 고민했을걸? 여기서 그만둘까? 도망칠까? 아빠한테 말해서 숨겨 달라고 할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로 부정하기에는 맞는 부분도 있는 소리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안 왔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네가 더 잘 알잖아.”

한재민이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었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임에도 어쩐지 징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너네 집 불 지르려 했지.”

“지랄.”

“어라. 안 믿네.”

“네가 무슨 수로 우리 집에 불을 질러.”

솔직히 근거 있는 대꾸였다. 아무리 한재민이 대기업을 등에 업은 반정부군의 수장이라 해도, 아버지의 집은 쉽게 방화 대상이 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가? 뭐, 해보면 알겠지.”

“뭐?”

“물론 네가 왔으니 일단 스킵이지만.”

일단, 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하지 않고자 한재민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한재민이 걸어가는 내 어깨를 잡았다.

“들어갈 필요 없어.”

“뭔 소리야.”

“우린 다시 내려갈 거야.”

“뭐?”

“설마 뭐, 저기에 게이트를 생성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맞는 말이었다. 한성 그룹 꼭대기 층에 게이트가 감지된다면 아마 전투부는 물론이고 국가 단위로 비상이 걸릴 것이었다.

“그럼 왜 여기까지 올라오라고 한 건데, 밑에서 기다렸음 됐잖아.”

“그냥. 찬희 똥개 훈련 시키려고.”

“개새끼.”

나는 욕을 읊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한재민이 눈짓하자 비서가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내려가는 내내 엘리베이터 내부는 정적만 맴돌았다. 지하 주차장 가장 아래에 도착하자 지하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코에 흘러들어왔다. 넓은 지하 주차장엔 오로지 차 한 대만 세워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차 쪽으로 걸어가 뒷자리에 올라탔다.

“차 좋지? 저번에 태워 준 것보다. 새로 뽑았어.”

“안 물어봤는데.”

“그냥 들어.”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나는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며 애써 한재민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아, 맞아. 스파이 말인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스파이 얘기가 지금 나올 줄은 몰랐기에 얼굴이 절로 한재민 쪽으로 돌아갔다.

“너 진짜 스파이 심었구나. 그치?”

“그럼 내가 거짓말한 거겠니.”

“누구냐고, 그게.”

“제시해 봐.”

“뭐?”

“네가 먼저 말해 봐. 그럼 내가 ‘예, 아니오’로 대답해 줄게.”

“장난칠 기분이냐, 너는?”

“아까부터 계속 그런 기분이었는데, 나는?”

나는 내 입으로 직접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한재민에게 털어 놓기가 꺼림칙했다. 괜히 연루될 수도 있고, 한재민은 충분히 그 녀석들의 뒤를 밟을 수도 있는 놈이라서.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한재민이 능글맞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왜? 말하기 싫어?”

알면서도 묻는 거였다. 나는 윗입술을 깨물다 천천히 입을 뗐다.

“고…… 한결이야?”

한재민이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 더 징그러운 미소였다.

“어?”

일부러 말을 끌고 있는 한재민을 참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참을성 있게 뒷말을 기다렸다.

“그게 누구지?”

“뭐?”

“걔가 누구냐고.”

“고한결 아니야?”

“한결이가 누구길래~ 찬희가 이렇게 의심을 했을까?”

걸렸다. 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주변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한재민이 계속해서 고한결의 이름을 입 속에 굴렸다.

“한결이~”

“아니면 됐어. 그만해.”

“한결이가 누굴까?”

“그만하라고.”

“설마 찬희가 현재 이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관심 없어, 걔한테.”

“거짓말하지 마, 찬희야. 너 생각보다 얼굴에 마음이 다 티가 나.”

“조용하라고 했다.”

“죄다 티가 나서 진짜 오히려 내가 가끔 미안할 정도라니까.”

웃기는 소리였다. 미안? 미안함이라는 것이 한재민과 동의어가 될 수 있던가.

“진짜 쪼만한 어린애 너무 갖고 노는 것 같아서 미안해 죽겠어, 아주.”

한재민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있는 힘껏 한재민의 손을 뿌리쳤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비서의 어깨가 움찔했다. 한재민이 웃으며 얻어맞은 손을 쳐다보았다.

“진짜 애기야, 우리 찬희.”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조용히 가자.”

“뭐, 오늘 이후로 갖고 노는 것도 다시 결정해 봐야겠지만.”

“…….”

“찬희야, 넌 모르겠지만.”

한재민이 갑자기 속삭이듯 말을 낮췄다.

“사실은 너 전에 한 50명 정도 있었어. 아닌가? 60명 정돈가?”

“……뭐?”

“근데 이제 없잖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다 죽어서. 펑 터져서 죽더라. 너무 징그러웠어. 처리하기도 어려웠고. 그냥 픽 쓰러져 죽으면 어디 덧나나.”

나는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한재민을 쳐다보았다. 한재민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나타났다.

“안 무서워하네. 네가 그렇게 될 수 있단 얘기야.”

“난 안 그래.”

“꽤나 장담하네.”

“죽어도 상관없고.”

어차피 다시 게임 리셋되듯 그때로 돌아갈 뿐이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삶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데에 오히려 더 놀랐다. 그 정도로 익숙해졌구나 싶어서.

“찬희야, 너 혹시 목숨이 여러 개야?”

“개소리하지 마.”

한재민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한재민은 더 이상 말을 걸진 않았다. 차는 10여 분 정도를 달려 어느 한적한 공터에 도착했다. 딱 봐도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않은 버려진 부지였다. 나는 차 문을 열고 천천히 내렸다. 마른 풀이 밟히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곳에 인공 게이트가 형성된다. 나는 그 게이트를 통해 유도현이란 존재를 불러낸다. 아마 그에게 잡혀 끌려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원작 소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단 이 곳은 도심이 아니었고, 유현재가 없었다.

“받아.”

한재민이 내 손에 구슬 같은 것을 쥐여 주었다. 나는 이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고급 기술 ‘강령술의 응용’ 진행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해당 스킬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실패 확률: 0.01%>

0.01퍼센트로 내가 죽는다면 그건 정말 그럴 운명이었던 거겠지. 나는 구슬을 받아 입 안에 넣었다.

“깨물어도 된대. 녹는 재질이라.”

나는 그냥 구슬을 삼켰다. 책에 쓰인 대로 크게 어떤 맛이 느껴진다거나 감촉이 이상한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복잡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그 희귀한 구슬은 게이트와 자석 같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서로의 힘에 영향을 받고 또 함께하려고 애씁니다. 구슬이 몸 안에서 완전히 녹을 때까지 당신은 게이트의 영역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무리하여 게이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간, 아마 죽음보다 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다만, 게이트의 범위에 있는 한 게이트는 당신의 말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 구슬은 게이트가 만들어낸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그리고 당신은 지금 구슬 그 자체이므로.’

책에 적혀 있던 내용을 상기하며 나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구슬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한재민이 어떤 나쁜 경로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만들어낸 결과물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애써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12시 땡 하면 생겨날 거야.”

저어어기 저쪽쯤? 한재민이 손가락으로 우리가 서 있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핸드폰을 켜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9분. 뭔가를 준비하기엔 늦은 시간이다. 때맞춰 타이밍 좋게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유현재: 찬희야]

[유현재: 어디야?]

나는 미리보기로 뜨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할까 잠깐 고민했다.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유현재의 손을 잡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의 결과가 무엇인지 직접 체험해 보기까지 했으면서도, 멍청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상단 바에 뜬 숫자가 12:00으로 바뀌는 순간 조그만 바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이 소리. 그 때 인공 게이트에서 났던 소리와 똑같은 소리다.

“와, 찬희야.”

한재민이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불렀다.

“게이트 모양 좋네. 너랑 상성이 잘 맞나 본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점점 커지는 까만 블랙홀 같은 구멍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이제, 세계의 이치를 깨고, 자연의 순리를 깨고, 오래전 이 세상에서 사라진 망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거센 바람에 맞서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시공간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유도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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