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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 사용 설명서-65화 (65/115)

65.

밥을 먹는 내내 엄마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부지런히 생선 가시를 발라 나와 유현재의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약간은 떨떠름한 얼굴로 우리는 저녁 식사를 끝마쳤다.

“엄마도 얼른 드세요.”

“아, 그래. 올라가서 씻어. 현재도.”

“네, 아줌마.”

나와 유현재는 계단을 올라가며 입모양으로 대화했다.

“엄마 좀 이상하지?”

“평소랑 조금 다르신 것 같긴 해.”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2층으로 올라와 우리 두 사람을 불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거실에 모인 우리 세 사람 사이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찬희야.”

엄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읽으려 애썼다. 저게 뭘까. 불안? 초조? 걱정? 혹은 화남?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묻자 엄마가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 혹시 사귀니?”

엄마의 돌발적인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엄마는 더더욱 확신을 굳히는 듯했다. 유현재가 먼저 대답을 가로챘다.

“무슨 소리세요, 아줌마. 갑자기.”

“찬희야 워낙 곱게 컸다 보니, 아직 철이 덜 들었을 수도 있어.”

“무슨 소리에요, 엄마.”

“그치만 현재야,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너를 십 년 넘게 먹여 키우고 살게 해 줬는데.”

나는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엄마의 말에 묻어나는 그 시혜적인 마음가짐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이렇게 뒤통수 칠 거니?”

“저기, 아줌마…….”

“네가 정신 차리고 찬희 좀 제대로 어떻게 해 봐.”

“저기, 엄마.”

내가 또렷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찬희 너도 정신 차리고, 응?”

“엄마.”

“엄마 소원이야, 응?”

“엄마.”

나는 엄마의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려는 말을 끊어냈다.

“갑자기 뭐 때문에 이런 말 하시는 거예요.”

“들었어.”

“들었다구요?”

엄마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너희 반 학생이 알려 주더구나.”

“네? 누구요?”

“그건 엄마도 몰라.”

“모르는 게 말이 돼요? 엄마 혹시 아빠가 시켜서 저희 반에 누구 심어놨어요?”

“아냐, 네 아버지가 그럴 분은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하시는 말씀이 전부 이상하다고요.”

“찬희야, 진정해.”

유현재가 내 팔목을 잡았다. 엄마가 빠르게 내게 닿은 유현재의 손을 쳐냈다.

“어딜 만져!”

엄마가 날카로운 눈으로 유현재를 노려보았다.

“엄마!”

나는 엄마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뭔 소리를 들으신지 몰라도 전혀 아니에요.”

내 말을 듣고서야 엄마는 정신이 돌아온 건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이니?”

“네. 아니에요.”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부러 유현재 쪽을 쳐다보지 않고 나는 다시 강조했다.

“우리 반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걱정하는 일 없을 거니까 그만하세요.”

“믿어도 되는 거 맞지?”

“엄마.”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드려 놓을게요.”

유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저는 엄마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에요.”

“찬희야, 너 어떻게…….”

“제가 누구를 만나든 알아서 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로 큰소리 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현재랑은 아니라는 거지?”

“엄마는 그게 중요한 거죠?”

“…….”

“내가 남자를 만나든, 여자를 만나든, 하다못해 몬스터라도 만나든.”

“…….”

“그냥 유현재만 아니면 된다는 거잖아요.”

내가 한 말은 그대로 다시 내게로 돌아와 화살로 꽂혔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정도의 아픔은 이제 고통 축에도 끼워놓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전 이미 말할 만큼 말했으니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찬희야.”

“네.”

“엄만……. 아직도 꿈에 네 형이 나온다.”

“…….”

“네 형이 나와서, 울어.”

“…….”

“엄마, 저 살고 싶었어요. 엄마. 저 좀 구해 주세요. 다 큰 애가,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애가 꿈에선 그래.”

“엄마.”

“그러니까 정말 안 돼.”

당사자를 앞에 놓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한 말이었다. 심지어, 사실도 아닌 일로 누명을 쓰고 있는 거라면 더더욱.

“엄마가 이렇게 빌게. 알겠지?”

“가세요. 그만.”

나는 엄마가 1층으로 내려가고, 발소리마저 사라질 때까지 차마 유현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유현재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혹은 얼마나그 마음이 찢겼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유현재에게서 조용히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찬희야.”

나는 죄책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유현재는…….

“수고했어.”

눈이 절로 커졌다. 유현재가 천천히 다가와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고생했어. 정말.”

가장 행복한 마지막 날에도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감추며 위로하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가만히 유현재의 포옹을 받으며 한동안 계속 앉아 있었다. 착잡한 마음은 곧 현실이 되어 어디선가 새는 물처럼 찰랑거렸다. 내 몸은 점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

유현재의 방은 내 방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별다른 게 없었는데, 아니 오히려 내 방보다 더 심플했는데도 그랬다. 나는 오랜만에 들어온 유현재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을 건넸다.

“너 진짜 방 깨끗하게 쓰네.”

유현재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쑥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언제 네가 불쑥 올지 모르니까.”

황당하네……. 내가 무슨 청소당번도 아니고. 하지만 유현재 말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었던지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네 침대에 누워도 되지?”

“어?”

“야. 왜 빨개지냐? 그냥 눕는다고.”

“어, 응, 나 안 빨개졌는데.”

“장난 안치고 옆에 있는 책 색깔만큼 빨개졌어.”

“그래?”

유현재가 머쓱한 표정으로 제 볼을 슥 문질렀다.

“내가 네 침대에 눕는다니까 좀 그래?”

“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하니.”

“너만 할까.”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아무렴 너보다 직설적이려고. 사실 이렇게 말한 건 갑작스러운 유현재의 직설 어택에 계속해서 당해왔던 걸 갚아 주기 위한 마음도 있었다.

“안 올 거야?”

내가 묻자 유현재가 군말 없이 쪼르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유현재의 볼을 꼬집었다.

“찬희야, 나 애 아닌데.”

“아니 귀엽잖아.”

“그런 말은 예고를 하고 해 주면 안 될까.”

“너나 예고해. 맨날 그런 말 하면서.”

“내가 언제?”

유현재는 진심으로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그런 대사들을 죄다 자각 없이 내뱉었다는 게 더 신기하네. 나는 뒷말을 꾹 삼키고 유현재의 볼을 꼬집던 손을 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조용해. 일일이 말하기 싫으니까.”

나는 유현재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을 뗀 유현재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침대에서 뽀뽀하니까 더 이상하지 않아?”

“어떤 게?”

“그냥 모든 느낌이.”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계속 담아두기 위해 말없이 수 초를 쳐다보았다.

“그럼 오늘 뽀뽀 실컷 하자.”

“오늘 하고 내일 해도 되잖아.”

“아니, 오늘 다 할 거야.”

“왜애.”

유현재가 말꼬리를 늘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일도 모레도 해 줘야지.”

“네가 원하면.”

“내가 원하면?”

“응. 네가 원하면 난 무조건 해.”

유현재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도 네가 원하면 무조건 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현재가 조금 더 꽉 나를 안았다.

“진짠데.”

“알아.”

“아는데 왜 답이 없어.”

“그냥 미안해서.”

유현재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말에 담긴 뜻이 뭔지 유추해 보는 거겠지. 나는 유현재가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그냥 여태껏 내가 미안한 짓을 많이 했잖아.”

“찬희야.”

“으응.”

“애초에 너랑 이런 사이가 된 것 자체가 네 모든 걸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모든 걸? 정말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나는 유현재의 말에 잠시 말도 안 되는 행복 회로를 돌렸다.

“안 믿지, 너.”

“믿어.”

믿는데, 그런데 내가 그게 안 돼서 그래. 나는 아무 말 없이 유현재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우리는 한동안 계속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길고 긴 터널의 입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햇빛을 쬐는 기분이었다.

*

오랜만에 찾아간 빌딩 앞이었다. 안내데스크로 걸어가니,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나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의 뒤를 쫓아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나는 두 가지 마음이 계속해서 시끄럽게 외쳐대는 걸 참아내야 했다. 그만둬. 도망쳐. 아니, 알아야 돼. 그래야 해결될 거야. 피한다고 모든 게 바뀌진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한재민이, 친히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왔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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