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수업이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더 충실해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고전 문학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유현재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유찬희.”
“야. 너 부른다.”
고한결이 펜으로 내 팔뚝을 찌르며 속삭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유현재 자리에 꿀 발라놨냐.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
아이들이 키득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유현재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허공에서 나와 유현재의 시선이 부딪혔다. 순식간에 온몸이 새빨개진 나는 손까지 흔들어대며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너네들 사귄다고 교무실까지 소문 들려오더라.”
“무슨 소리예요?”
와하하. 애들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교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고한결도 함께 웃었다.
“진짜 둘이 사귀냐? 왜 나한텐 말 안 해 줘.”
고한결이 내 등을 팍팍 치며 말했다.
“아니거든.”
“아니라고 진지 빨고 말하는 게 더 수상해.”
“아니라고.”
나는 차마 강하게 부정하진 못하고 괜히 고한결을 흘겨보았다.
“그래. 좋을 때 즐겨 놔.”
고한결이 여전히 배꼽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지만 살짝 켕기는 대사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
“엉? 뭐가?”
“방금 한 말.”
내가 집요하게 캐묻자 고한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 했는데?”
“좋을 때 즐기라며.”
“엥? 그냥 말 그대론데.”
순진무구한 고한결의 표정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다시 펜을 쥐었다. 또 예민해졌다. 한재민이 심어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으려 계속해서 노력해도 자꾸만 머리 한 켠에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았다.
“야.”
“어?”
“너 이상한 애 아니지?”
내 물음에 고한결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이상해 보여?”
“아니.”
또다시 이어진 싱거운 대답에 고한결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야, 괜찮아. 난 너 이상하게 안 볼게.”
“뭔 소리냐.”
“이 형님은 마음이 넓어서 네가 여자애를 사귀든 유현재를 사귀든 괜찮단 말이야.”
“뒈진다, 진짜.”
내 대답에 고한결이 키득거리며 다시 교과서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한 말이 고한결의 진심이든,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든 나는 그 자체를 믿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행복한 날이어야 하니까.
*
“야, 5교시 쨀래?”
점심을 먹다 말고 고한결이 문득 우리에게 제안을 했다. 유현재가 살짝 난감한 듯 웃으며 거절했다.
“수업은 좀…….”
“그래. 째.”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고한결이 내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같이 손바닥을 맞부딪혀 주며 나는 유현재를 흘끗 쳐다보았다.
“너도 쨀 거지?”
내 물음에 유현재가 결국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려고 갑자기 수업을 째자는 거야.”
“내가 진짜 기막힌 데를 알아놨거든? 거기 가자.”
“뭔데. 대사 존나 수상하네.”
“이상한 데 아니야, 인마. 그냥 학교 내 비밀 공간 같은 거라고.”
“그래?”
고한결은 이미 수저를 놓고 우리가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러 국까지 야무지게 다 먹은 나는 천천히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가 보지 뭐.”
*
고한결은 1학년 건물이 있는 학교 가장 안쪽 뒤뜰을 지나 벚꽃나무가 피어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긴 아무나 다 오는 데잖아.”
“아, 기다려 봐.”
벚꽃나무 길을 끝까지 오니 학교에서 쳐놓은 울타리와 함께 산으로 막혀 있었다.
“뭐, 산이라도 타자고?”
“유찬희 너 진짜 성격 더럽게 급하네.”
마지막 나무 뒤에는 높이 자란 풀들이 덮여 있었는데, 이미 한 번 꺾인 듯 살짝 드러누워 있었다. 고한결이 그 풀을 밟고 능숙하게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와 유현재도 그 뒤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딱 대여섯 명 정도 누울 수 있을 법한 작은 공간이 나왔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잖아.”
“와, 어떻게 찾았어?”
유현재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고한결이 비밀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쪽이 바로 교무실이거든? 근데 진짜 희한하게 안 보인다?”
“교무실 가서 확인까지 끝낸 거?”
“어. 야, 완전 범죄가 왜 완전 범죈데.”
고한결이 가지고 온 담요를 둘둘 말아 베개 모양으로 만든 후 풀숲 한가운데 툭 떨어트렸다.
“나 한숨 잘 거니까 깨우지 마라.”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본 나는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끌고 고한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니들끼리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고한결이 눈을 감은 채 크게 말했다. 유현재와 내가 눈을 맞추며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나는 짐짓 짜증 났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 소리야. 잠이나 자.”
“잘 거야. 이제 진짜 말 걸지 마.”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서로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보냐.”
나는 고한결이 들리지 않게끔 작게 속삭여 말했다.
“그냥.”
실없는 대답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일부러 유현재에게 눈싸움을 걸었다.
“우리 여기 자주 오자.”
“여기?”
“응. 한결이 없을 때도.”
없을 때도,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느꼈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진 못했다. 오늘이 지나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너만 좋으면.”
“왜 나만 좋으면이야?”
“어?”
“너도 좋아야지.”
유현재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난 항상 좋을걸.”
“좋을걸은 뭐야.”
유현재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주며 말했다.
“진짜. 너만 좋으면 맨날 와.”
“약속했다.”
“응.”
유현재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입에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살짝 닿는 느낌이 들더니 바로 유현재의 얼굴이 멀어졌다.
“한결이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유현재가 씩 웃었다. 나는 방금 닿았던 윗입술을 살짝 깨물고 유현재 쪽으로 다가갔다.
“싫은데.”
유현재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다시 입술을 맞댔다. 꾹 잡고 있는 손이 저릿했다.
*
5교시만 째기로 했던 약속과 다르게 우리는 이후 수업을 모두 들어가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고한결도 고한결이었지만 나 또한 오늘만은 유현재와 조금 더 같이 붙어 있고 싶은 생각에 가만히 둔 것도 있었다. 유현재의 무릎에 누워 손장난을 치다가 뽀뽀를 하길 여러 번, 드디어 벌떡 일어난 고한결 덕분에 우리의 시간은 자연스레 끝이 났다.
“와 씨. 진짜 많이 잤네. 왜 안 깨웠어?”
“너 진짜 발로 차도 안 일어나더라. 무슨 밤이라도 샜냐?”
“맞아. 한결이 너 진짜 코까지 골면서 자더라.”
“내가 코를 골았다고? 나 코 안 고는데.”
일부러 한 거짓말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고한결이 웃겨 나와 유현재는 푸핫 소리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바로 집에 가자고 합의를 보고 우리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한창 하교 중인 학생들 무리에 섞여 우리는 자연스레 학교를 빠져나왔다. 고한결과 헤어지고 나서야 나와 유현재는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오고 나서였다.
“오늘따라 뭔가 다르다, 찬희야.”
“뭐가?”
나는 괜스레 찔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뭔가…….”
“뭔가?”
“더 귀여워.”
직설적인 말에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진짜 얘랑 계속 같이 있다가는, 내일이 되기도 전에 심장 마비로 죽어버리겠다. 그럼 다시 또 그때로 돌아가고. 또 사귀면 또 돌아가고. 진짜 그렇게 반복되는 거 아니야?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내가 유현재의 가슴을 퍽 밀었다.
“너 진짜 사람 많이 꼬셔 본 거 같은 멘트 하지 마.”
“나 한 번도 사람 안 꼬셔 봤는데.”
“알아.”
“그냥 진심으로 생각해서 말하는 거야.”
“……남주라 그런가.”
내 중얼거림에 유현재가 응? 하고 반문했다. 고개를 젓고 나는 일부러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집에 가자, 나 배고파.”
“같이 가.”
집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대신 유현재가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 정도는 친구끼리도 하지 않나?”
“그…… 렇지?”
나는 잠시 고한결과 어깨동무를 하며 걸어가는 유현재를 상상했다. 싫네. 싫긴 하네. 아무튼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딱히 유현재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함께 집까지 걸었다.
집 안에선 오랜만에 평범한 가정다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거실에 서 있던 엄마가 들어오는 우리를 반겼다. 평소보다 훨씬 살가운 얼굴이었다.
“찬희, 현재 왔구나. 얼른 손만 씻고 밥부터 먹어.”
식사 준비를 모두 마친 가정부 아주머니가 함께 우리에게 손짓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현재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유현재에게 이렇게 살갑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