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알고 그렇게 말한 걸까? 아니, 너무 섣불리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한재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알고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할 만한 인간이었다. 나는 하루 내내 떠올리던 그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희야, 준비 다 됐어?”
문 밖에서 유현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겉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유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니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 기다렸어?”
“기다리긴. 가자.”
우리는 함께 2층 계단을 내려갔다. 유현재에게서 미묘한 들뜸이 느껴졌다. 나는 그 기운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너 되게 즐거워 보인다.”
“어?”
유현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민망한 듯 작게 웃었다.
“티 나?”
“어, 완전.”
“그냥 너랑 놀러 간다고 하니까 좋아서.”
나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앞서 걸어 나갔다. 1층 복도를 지나치려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안 먹고 나가니?”
“나가서 먹으려고요.”
나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적대적이라거나, 억울하다거나 화가 난다는 표정이 아닌 그저 복잡 미묘한 부모의 표정 그 자체라 나는 조금 심란해졌다.
“…일찍 들어올게요.”
풋. 옆에서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현재가 입을 가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왜 웃냐?”
“그냥.”
“그냥?”
“귀여워서.”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귀여워서’라는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걸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귀가 빨개, 찬희야.”
“시끄러.”
내가 무뚝뚝하게 대꾸하니 유현재는 더 재미있어 하는 듯했다.
“근데 왜 일주일이나 시간 비워 놓으라고 한 거야?”
유현재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쿡쿡 찔려오는 가슴 한 켠을 애써 무시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일주일 내내 너랑 놀려고.”
유현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왜?”
“왜냐니.”
나는 슬쩍 유현재의 표정을 보았다. 역시나 기쁜 감정보다는 살짝 더 두려운 얼굴에 더 가까웠다. 나는 변명하듯 둘러댔다.
“네가 그러자며. 산책 가자 해도 가고 어? 뭐 하자 하면 다 하는 그런 사이 되자며.”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그러자는 거잖아.”
“정말 그 뜻밖에 없는 거 맞지?”
유현재가 확인하듯 명확하게 물어보았다.
“그럼.”
나는 여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그렇다는 듯이. 완벽한 연기였다. 이젠 이전만큼 양심의 가책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오랫동안 부딪혔다. 엘리베이터는 이제 막 1층에 도착해 명랑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
유현재가 대답하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
우리는 여느 고등학생 커플이라면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차례대로 해나갔다. 밥을 함께 먹고, 지나가다 나온 오락실에서 스티커 사진도 찍고 그 위에 낙서도 했다. 사진 위에 이것저것 꾸미던 유현재가 내 머리 위에 뿔을 그렸다.
“야, 이건 이상하잖아.”
“왜? 찬희 너랑 진짜 잘 어울리는데.”
“와, 이렇게 날 맥이네.”
유현재가 웃으며 일부러 악마 꼬리까지 함께 그렸다. 아마 장난이 반이었겠지만 유현재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어 차마 더 이상 뭐라 하긴 어려웠다. 사진이 출력되는 동안 우리는 오락실 내에 구비된 게임들도 했다. 농구공 던지기, 퍼즐 맞추기, 오토바이 경주 같은 흔하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버벅거렸다. 유현재는 능숙하게 게임을 하며 나를 이겼다.
“너 오락실 자주 와 봤어?”
“아냐. 처음인데.”
“근데 왜 이렇게 잘해?”
“그러게. 모르겠네.”
재수 없는 말이었지만 뭐 어느 정도 주인공 버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들었다.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렇게 일주일 내내 유현재와 시간을 보낼 때만큼은 죄책감도, 어떤 두려움도 혹은 아픔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인쇄된 스티커 사진을 들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딱히 목적도 없이 길을 걸었다. 주말의 번화가는 역대급이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찬희야.”
“어?”
“사람도 너무 많은데 저기로 피신할래?”
유현재가 가리킨 곳은 타로점을 보는 카페였다. 나는 딱히 당기지 않는단 얼굴로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너 저런 거 믿어?”
“재밌을 것 같잖아.”
“진짜 돈 아까운데.”
“도련님이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한데.”
결국 유현재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커다랗게 ‘타로’라고 쓰여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가게 내부는 한산했다.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무로 된 카운터에는 머리를 쪽 지어 올린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타로 보러 왔어요?”
아주머니의 물음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남학생 둘이서 오는 건.”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 아주머니 혼자 가게 일을 모두 하는 듯했다. 각자 주문한 차를 우리는 동안 우리는 가게 내부를 구경했다. 딱 봐도 타로 카드에나 있을 법한 무늬나 그림이 벽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신기하긴 하네.”
내가 중얼거리자 유현재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사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타로를?”
“응. 그냥 궁금했어.”
“대체 뭐가 궁금한데? 학교? 미래?”
“도대체 네 생각이 뭔지.”
유현재는 여전히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찬희 생각이 뭔지 알게 해 주세요. 맨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거든.”
본인의 미래나 결정할 필요가 있는 일이 아닌 그저 타인을 위해 이런 곳에 오고 싶었다는 건, 당사자인 나로서는 다소 놀라운 발언이었다. 아니, 유현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려나.
“음료 나왔는데.”
아주머니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타로 카드를 든 아주머니가 우리를 향해 물었다.
“뭘 보고 싶어요?”
“어…….”
“미래?”
미래? 미래만큼 모호한 단어가 어디 있을까. 무려 열 번이나 미래이자 과거를 돌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고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에 수긍하고 덧붙였다.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지.”
“행복?”
“네. 그게 궁금해요.”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심연을 보려는 듯한 날카롭고도 깊은 눈이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아주머니가 카드를 펼쳐 내 앞에 늘여놓았다.
“여섯 장만 골라 봐요.”
여섯 장이나 골라야 하는 거야? 나는 조금 귀찮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제법 신중한 얼굴로 카드를 골랐다. 옆에서 유현재가 큭큭거리며 웃더니, 이내 찰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야, 찍지 마.”
“귀여워서. 나만 볼게.”
나는 귀를 붉히며 괜히 아주머니의 눈치를 봤다. 아주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뽑는 카드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카드를 모두 뽑자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자기는 왜 이렇게 행복에 집착해?”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행복에 집착한다구요?”
“응. 집착. 심지어 집착 수준이 아닌데.”
분명 한때는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행복은 절대 나 따위가 누릴 수 없단 걸 알게 된 후부터는 아예 행복에 대한 기준을 바꿔버린 지 오래였다.
“그다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자기는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남의 행복에 집착하니까.”
아주머니가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본인은 그냥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잖아.”
“네?”
“본인은 바닥에 나뒹굴어도 끝까지 누군가는 말 위에 태워놓잖아.”
나는 이 사람이 내 눈치를 보며 짜 맞추는 대답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야 갑자기 들어온 타로 카페에서 진짜 내 삶을 맞출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가요?”
나는 신기하다는 듯 카드를 쳐다보았다.
“더군다나 자기는 미래 같은 건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아.”
“…….”
“현재만 생각할 뿐이지.”
아주머니가 옆에 있는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재, 라는 말이 묘하게 유현재의 이름과 오버랩되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건, 오. 로맨틱하네.”
“뭔데요?”
“움직이게 하는 건 오로지 사랑이네.”
유현재가 큭, 하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귀가 빨개져 저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저 다른 것도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아냐. 자기의 인생은 그냥 사랑으로 움직여.”
아주머니의 단단한 목소리에 유현재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분명 놀리려는 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몇 살이야?”
“열일곱이요.”
“아니.”
아주머니가 카드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았던 그 날카로운 느낌이 그대로 내 눈을 관통하는 듯했다.
“진짜 살아온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