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한재민의 말은 그와 헤어진 후에도 머릿속 한 켠에 자리 잡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나. 그것은 결국 내가 ‘나’이기 이전의 나인 걸까. 그렇다면 한재민의 말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덜컥 겁이 나다가도 속이 차갑게 식었다. 알 리가 없었다. 알 방법도 없었고 증명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찬희야.”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현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직도 컨디션 별로야?”
“아니.”
“…….”
“라고 말하면 어차피 거짓말인 줄 알겠지.”
유현재가 작게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펼쳐져 있던 교과서를 덮었다. 이 상황에서 등교를 하고 수업을 듣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 내 자신이 우스웠지만 일상은 지속되었다. 결국 유현재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얘들아.”
고한결이 조심스레 나와 유현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로, 하지만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고한결을 쳐다보았다.
“너네 그거 들었어?”
고한결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 걸까. 고한결이 몹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우리 줄다리기 예선전. 9반이랑 한대.”
나는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유현재와 고한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9반. 체대 준비생들 모여 있잖아.”
“아.”
학교생활에 단순히 등하교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곤란한 얼굴을 하고 고한결을 쳐다보았다.
“큰일이네, 그거.”
“내 말이. 상금도 진짜 크고 이번에 이곳저곳에서 참관하러 온다고 애들 벼르고 있어. 게다가 우리 반이 다른 반 애들한테 진짜 공공의 적이란 말이야.”
“왜?”
“몰라서 물어?”
고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1급이 둘이나 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체육대회 같은 데에선 마나 못 쓰잖아.”
“못 쓰긴 하지. 그치만 일단 너희가 같은 반에 있단 것만으로도 다들 신경 쓰고 있다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체육대회 참여를 고사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과 뛰어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충 집안 사정 핑계를 대며 불참을 선언하려는데, 유현재가 내 말을 가로막고 급하게 대답했다.
“잘됐네. 찬희 운동 진짜 잘해.”
“그래?”
“응. 운동 신경 진짜 좋아. 어릴 때 축구경기 반 대표로 나가고 이랬어.”
“야, 유현…….”
“뭐 당연하긴 할 텐데 새삼스럽다. 찬희 네가 운동 잘하는 거.”
“뭐가 새삼스럽다는 건데?”
“뭔가 너는 좀 운동보단, 머리를 쓸 것 같은 느낌?”
고한결이 나에 대한 이미지를 간결하게 뱉어냈다. 확실히 나는 실습 전투나 시험에서도 큰 노력 없이 간단히 상황을 이겨내곤 하긴 했었다. 단순히 마나량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운동 신경이 좋아서라는 건 유현재의 입으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요즘은 특관반 기본 훈련 말고 운동 잘 안 해.”
“야. 기본 훈련만 해도 난 진짜 죽을 것 같더라.”
“아무튼.”
유현재가 답지 않게 고한결의 말을 끊고 급하게 말했다. 나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애써 내 시선을 무시하는 듯했다.
“나랑 찬희가 그날 진짜 열심히 할 거니까, 다들 걱정 안 했음 좋겠어.”
“와, 졸라 든든해.”
“그치, 찬희야?”
유현재가 그제야 내 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일부러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얕은 수가 보여 웃음이 났지만 나는 그냥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애초에 유현재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달리 도망칠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뭐, 체대 준비생 몇 명 정도는 그냥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반 아이들 몇 명이 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중고등학교의 체육대회는 다소 특이한 점이 많았다. 일단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힘겨루기가 주된 종목이라는 것이 첫 번째였고, 그 덕에 특별반이 아닌 일반반 아이들과 특별반이더라도 등급이 낮은 아이들의 운동 신경을 볼 수 있다는 게 두 번째였다. 랭커가 존재하는 한 마나를 쓰지 않는 무력 집단은 어느 정도 사회적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운동선수나 경찰, 군인 하위직이 그 정도였다. 그중 사회적 지위를 가장 높일 수 있는 게 운동선수였고 비랭커 중 가장 특출난 운동 신경을 가진 아이를 찾기 위해 각종 협회들이 중고등학교 체육대회에 참관했다.
나는 앞에 놓인 밧줄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했다. 진짜 마나를 조금씩 흘려 쓴다 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고, 그걸 알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경기에 임했다.
“유찬희 너 지금 마나 쓸까 고민했지.”
뒤에 서 있던 고한결이 마치 내 머릿속을 꿰고 있는 것처럼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냐.”
“척하면 척이지.”
언제부터 날 그렇게 잘 알았다고. 그 말은 삼키고 나는 천천히 심판이 시키는 대로 줄을 잡았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느니 마나는 그냥 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키가 크고 힘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나보다 앞에 서 있던 유현재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파이팅.”
거의 입모양으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만 알아듣고 작게 미소 지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힘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던 터라 어색하기까지 했다. 곳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마나량과 운용 능력으로 평가받던 이전과 다르게 순전히 몸의 체력으로만 싸우는 체육대회는 재미 면에선 그 가치를 보장했다. 아무리 랭커가 날고뛰어도 올림픽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선전이 끝나고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고한결이 등을 두드렸다.
“너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처음 보네.”
웬만하면 학교에서 숨을 몰아쉴 정도로 움직이거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보일 일이 없었다.
“되게 사람 같다.”
고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 같다는 건 무슨 뜻일까? 되물어 보려 했지만 곧 다음 팀의 경기 때문에 우리는 우르르 해산했다.
“아쉽네, 져서.”
유현재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흙먼지가 묻은 손을 털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같이 참가해 줘서 고마워.”
“뭐가 고맙냐. 어차피 해야 하는 건데.”
“그래도.”
유현재가 내 어깨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이런 평범한 거, 너랑 꼭 하고 싶었거든.”
“나랑?”
“응. 너랑.”
사람 같다. 그리고 평범한 거.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이젠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비정상적으로 변해버린 나의 일상에 더 이상 정상적인 것이 정상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갑작스레 유현재가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뭐야, 갑자기.”
“마치고 떡볶이라도 먹으러 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좋아했잖아.”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는데. 나는 차마 그 대답을 하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의 어깨에 가둬진 채 걷고 있던 내가 갑작스레 발걸음을 뚝 멈췄다.
“내가 떡볶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
유현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 모르잖아.”
“왜 몰라, 당연히…….”
유현재가 거기까지 말하고 자기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착각한 건가? 다른 애들이랑 헷갈렸나 봐.”
유현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전의 삶처럼 유현재의 기억이 조각조각 파편처럼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추궁하거나 몰아붙일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유현재는 그때와 다르게 자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보다도 나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은,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더라도 결국 내 운명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란 확신에 있었다. 오히려 기억이 돌아온다면, 지금보다 더 괴로워하는 유현재를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얌전히 그의 어깨 아래에서 발을 옮겼다.
“아무튼 그래서, 갈 거지?”
“…알겠어.”
우리는 평범하게 어깨동무를 한 친구처럼 교실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제야 이 장면이 다른 아이들과 섞여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찬희야. 우리 다녔던 중학교 앞에 있던 거기. 거기가 진짜 맛있었는데. 기억나? 이것도 나만 착각으로 기억하는 거 아니지? 따위의 말을 하며 걷는 교실 뒤 정원은 굉장히 고요했고 아름다웠다. 나는 유현재가 감싸 주는 아늑한 품 안에 그대로 잠들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