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찬희 너 설마…….”
아버지는 이제야 확신을 한 듯 손을 떨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대체, 대체…….”
“제가 한재민에게서 이 정보를 얻었든, 길을 걷다가 들었든 간에 아버지는 제게 결국 똑같은 인간이니까요.”
“말해! 누가 전달한 거냐?”
아버지의 눈에 핏줄이 섰다. 완벽히 두 사람의 비밀로만 남을 줄 알았던 사실이 타인에게, 그것도 자신의 자식에게 발각된 것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버지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도 더 크게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씁쓸히 웃었다.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건.”
“중요한 일이다. 찬희야,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화제를 김구현에게로 넘겼다. 김구현은 여전히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김구현은 언성을 높이는 대신 최대한 차분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찬희 군의 말마따나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죠.”
“않을 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말이 통하시네요.”
김구현이 빙그레 웃었다.
“찬희 군.”
어쩐지 싸늘한 듯한 그 표정에서, 나는 바로 김구현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물을 쏟은 건 상관없습니다.”
“무슨 소리…….”
“쏟은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니까요.”
나는 멍하게 김구현을 쳐다보았다. 김구현의 눈빛에선 어떤 맹목적인 믿음까지도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맹목이 아버지를 향한 충성이라면 대체 그는 아버지에게 어떤 대가를 받은 것일까.
“어리다는 건 그런 거죠. 쏟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
“아직 어립니다. 찬희 군은.”
“어리면요? 그래서요?”
“어른의 결정에 따르세요.”
“제가 여덟 살짜리 애로 보이세요?”
“제가 말하는 어리다는 것이 순전히 나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건.”
“…….”
“똑똑한 찬희 군이라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옷장 문을 열고 마구잡이로 짐을 싸고 있으니, 뒤따라온 나를 엄마가 뜯어 말렸다. 나는 말리는 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캐리어에 옷들을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야, 찬희야. 일단 설명부터 해. 얘기부터 하자. 응?”
“집 나갈 거예요.”
“집 나가면 어디로 갈 건데. 찬희야, 진정부터 하자.”
“여기보단 나을 거예요.”
“아버지랑 싸웠니? 그런 거야?”
“싸웠냐고요?”
나는 무작정 옷을 구겨 캐리어에 쑤셔 넣던 손을 멈추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아뇨. 싸운 게 아니라 저는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용서?”
“아버지께 여쭤 보세요.”
“찬희야.”
“하긴, 엄마도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겠네요.”
나는 캐리어의 지퍼를 잠그고 손잡이를 눌러 잡아 올렸다. 엄마가 내 팔을 붙잡고 급하게 따라 나왔다. 그 모습이 절박해 보여, 나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엄마를 마주 보았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집도, 입고 있는 옷, 방 안에 하나하나 놓여 있는 물건까지 다 끔찍해요.”
“찬희야, 제발…….”
“그냥 제가 끔찍해요.”
“…….”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엄마가 다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캐리어를 끌고 막 2층 거실로 나오자마자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유현재를 마주했다. 유현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찬희야.”
나는 도무지 유현재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니, 쳐다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현재가 내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을게.”
“…….”
“그러니까, 딱 10분만 있어 줘.”
유현재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에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목에 잡힌 내 손을 빼내고 발걸음을 멈췄다. 유현재의 눈을 다소 가라앉아 있었지만 차분했다. 잔뜩 동요하고 있는 내 심정과는 상반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더욱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할까.”
“…뭐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호한 내 말에도 유현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처럼 있으면 돼.”
“그건 안 돼.”
“왜?”
“…큰 잘못을 했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고 싶을 만큼 큰 잘못.”
유현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내뱉고 있는 말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격양된 감정의 부산물인지 파악하려는 듯했다.
“내가 결정해 준다면 따라 줄 수는 있는 거야?”
나는 순간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무엇이 맞는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 죄는 너무나도 무거웠고, 아니라고 하기엔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
“그럼 어느 정도 고려는 해 줄 수 있단 거네.”
유현재가 나를 천천히 안아 왔다. 뒤에 서 있던 엄마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렸지만 결국 내뱉지 않았다. 나는 그 품 안에 안겨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다시 모든 걸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끔찍하던 회귀조차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절실하게 느껴졌다.
“가지 마.”
“…….”
“나한테서, 떠나가지 마.”
유현재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수없이 생각했을 그 말을, 아무것도 모르던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때.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
“부른 적이 없는데, 널.”
한재민이 소파에 늘어져 앉아 나를 맞이했다. 어차피 회사의 꼭대기 층까지 오려면 주인의 확인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본인이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면서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면 끝나.”
한재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의외의 소식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너 생각보다도 더 똑똑하구나?”
“장난칠 기분 아냐.”
“누가 장난이래? 난 네가 진짜 머리에 물만 찬 헛똑똑인 줄 알았는데.”
평소라면 오기에 차서 반발했겠지만 그럴 힘은 없었다. 며칠간 거의 잠도 자지 않고 혹독한 마나 운용을 지속한 탓이었다.
“근데 몸이 버텨내겠어?”
한재민이 하얗게 바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걱정이라고는 단 1%도 섞여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네가 내 몸을 걱정했다고.”
“항상 걱정했지. 소중한 숙주인데.”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실소라 해도 아주 미미한 정도라 한재민에겐 보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가방에 넣어 뒀던 책 두 권을 꺼내 한재민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툭 던졌다.
“괜히 내가 가지고 있다가 꼬리 잡히기 싫으니까 돌려주는 거야.”
“오, 마스터했다, 이건가?”
“실패할 가능성도 있어. 애초에 100%라는 게 없으니까.”
“자기 죽음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치곤 제법 객관적인 어투네.”
한재민은 책을 집어 들어 촤르륵 펼쳐보았다.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책의 상태에 한재민이 흥미로운 얼굴로 다시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진짜 끝낸 거 맞아?”
“어차피 너도 내가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할 거라면 접근조차 안 했을 거잖아?”
“그치.”
한재민이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명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네 타고난 능력과 아빠가 아니었으면.”
“…….”
“너 같은 고딩을 내가 왜 상대해 주겠니. 그치.”
오늘 집 가서 아버지한테 꼭 감사하다고 하기다, 알겠지? 어린애 달래는 듯 놀리는 말투가 얕은 수준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분이 차올랐다. 나는 애써 화를 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너도 읽어 봤으니 알겠지만 일단 준비할 게 많아.”
자신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자 한재민이 팍 김이 식은 듯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내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알고 있지. 걱정 말고 너는 네 능력 개발에나 신경 써.”
“…진짜 게이트 생성 위치를 먼저 알 수 있다고?”
“왜, 못 믿겠어?”
“전투부에서도 기밀로 두고 있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말했지, 찬희야.”
한재민이 웃으면서, 하지만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이나 걸친 애들은 알 필요 없다고.”
“소름 끼쳐.”
“소름 끼쳐? 다행이네. 우스워 보이는 것보단 낫지. 난 네 그 건방진 태도 때문에 혹시 우리를 단순히 우스운 호구 새끼로 보고 있나 걱정했다니까.”
“아무렴, 주변에 스파이까지 깔아놓은 너를 우습게 생각하겠니, 내가.”
“좋은 경각심이야.”
한재민이 박수를 짝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마.”
“발만 걸친 놈한테 해 주는 예우치곤 너무 깍듯하네.”
“내가 모른 척하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을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대답 없이 한재민을 노려보았다. 한재민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웃어 보이며 약을 올렸다.
“난 아마 너보다 너에 대해 잘 알 거야.”
“뭐?”
“네가 모르는 너를, 난 알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