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누구나에게 시간은 평등히 주어지지만, 시간이 가는 속도는 사람마다 모두 달랐다. 신기한 일이었다. 1분이 누군가에게는 영겁과 같은 시간이 되기도, 1초보다 짧은 순간이 되기도 했다.
“찬희야.”
눈 하나 깜빡하지 못한 채 굳은 나를 유현재가 조심스레 불렀다. 고작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목 뒤와 등에서 끊임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나는 겨우 눈을 감았다. 시린 눈 사이로 눈물방울이 맺혔다.
“미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닌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라고밖엔 대답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내겐 무엇보다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았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유현재가 천천히 내 옆에 와 발걸음을 맞췄다. 나는 그 당연하다는 듯한 배려에서 또다시 죄악감을 느꼈다.
“어디 아파? 두통?”
“아냐, 진짜.”
나는 내 어깨를 감싸오는 유현재의 손을 뿌리치고 조금씩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유도현은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이름을 숨기라 한 걸 보면 유도현은 세상에 진실을 숨기려 했고, 아버지 또한 유현재가 김현민의 자식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17년간 유지되어 온 이 끔찍한 비밀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부모를 죽인 살인자가 주는 밥을 먹고, 주는 옷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게 과연 정상적일까?
“집에 가자.”
최대한 태연하게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유현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얄팍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진실이었다. 유현재와 나를 잇는, 나아가 유현재를 이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불행의 시작.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과연 내가 이 위치, 이 상황, 이 설정에서 뭘 해야만 가장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정답이 아니라, 죄인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
“하.”
나는 소리 내어 조소했다. 죄인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무언가 살며시 내 어깨에 닿았다. 유현재의 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현재를 올려다보았다.
“또 숨기지.”
“……숨기는 거 없어.”
“또 없다고 거짓말하잖아.”
“…….”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싫다고 말했잖아.”
“그거랑은 달라.”
“뭐가 달라? 찬희야. 나는 매일 네 표정을 보면서 생각해. 오늘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그 감정을 내게 전달해 주기는 할까.”
유현재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길게 빠진 눈꼬리 끝이 살짝 축축해졌다.
“네가 내게 말하는 건 항상 껍데기뿐인 것 같아.”
껍데기. 나는 소리 내지 않고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껍데기뿐인 유찬희. 정체성이 없는 나. 아무것도, 그 무엇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 충분히 껍데기 같다면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그럼 나는 그것만 보고 계속해서 생각하는 거야. 저 껍데기 안에 있는 진짜 찬희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 말을 하고 싶긴 한 걸까?”
“유현재.”
“그것조차 내 직감으로.”
“…….”
“모든 게 감이야. 그저 내 감정이고, 불확실한 판단이야. 그렇게 항상 네 뒷모습을 봤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
“진짜 네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나는.”
유현재가 말을 끝마치면서 내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느리게 떼어냈다.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내가 유현재에게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마지노선은 어디일까. 하지만 유현재는 그 마지노선 없이 모든 나의 감정을 알고 싶어 했다. 그건 곧, 그러니까. 왜냐하면.
“나 좋아해?”
나는 열 번의 삶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유현재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움직였다.
“왜 그런 말을 해?”
유현재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억울해 보이기도 했고, 황당해 보이기도 했으며 조금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왜 그런, 당연한 말을…….”
그야, 우리는 셀 수도 없는 시간을 건너고 건너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하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았으니까. 처음엔 당연했기 때문에 물을 생각이 없었고, 나중엔 감히 나를 좋아하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묻지 못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은데?”
나는 모호한 질문을 던졌다. 유현재가 내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사람 하나쯤은 빠져도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깊어?”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굳어 있던 입꼬리를 올려 작게 미소 지었다.
“너는… 아니야?”
나는 유현재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를 올곧게 쳐다보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사이가 바뀔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단순히 관념적인 게 아니라, 정말로.”
목소리가 조금씩 격해졌다. 나는 애써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사이, 사귀는 사이 그런 게 아니라.”
“…….”
“모든 걸 용서해 주고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냐는 거야, 내가 너한테.”
유현재가 나를 깊게 바라보았다. 나는 결국 그 눈빛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모든 걸 용서해 주고 받아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말하고도 이기적인 표현이었다. 그런 관계가 있을 리 없었다. 있더라도, 그게 나와 유현재가 될 순 없었다.
“…있어.”
유현재가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도 애써 동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는 거 아냐.”
“누가 봐도 쉬워 보이잖…….”
“유찬희.”
유현재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잔뜩 떨리는 눈으로 애써 감정을 짓누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유현재가 보였다.
“쉽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근데 왜 항상 내 감정을 네가 단정 짓는 거야?”
깜빡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이었다. 붉어진 눈가로 나를 노려보던 유현재가 다시 눈에 힘을 풀고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보았다.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서였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내 감정을 네가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냐.”
“…….”
“자기 전에 항상 고민해. 어떻게 하면 네가 나를 알 수 있을지. 내가 너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유현재는 목소리를 추스르고 다시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나는 무언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기묘한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비단 유현재가 나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소설 속 사람, 만들어진 사람이 아닌.
진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더 이 현실이 무서워져서.
“미안해.”
그래서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현재가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
미묘하게 어색한 사이가 되고서 나와 유현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다음 날이 바로 주말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부른 식사 자리에 초청되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1급 축하드립니다, 찬희 군.”
딱 봐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비싼 한정식 집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김구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전부 부장님 덕분이죠.”
“아뇨. 1급은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될 수도 있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요.”
나는 심기가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역겨웠다. 내 옆, 그리고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결론적으로 유현재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라는 걸 생각하면 토기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뭐, 가능하게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고 봐야겠죠. 대리 시험이라도 보지 않는 이상.”
김구현이 적당히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살인자가 밥을 먹는다. 살인자가 국을 한 술 뜨고 입에 넣는다. 살인자가 음식의 맛을 칭찬하고 재료에 대해 의미 없는 이야기를 지껄인다. 살인자가 살인자를 바라본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살인자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척한다. 살인자들의 시선이 곧 한곳에 모인다. 한순간 시선을 받고서, 나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미닫이문을 열고 신발을 대충 꿰어 신은 채 나는 화장실로 내달렸다. 종업원이 놀라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화장실 문을 닫고 변기 뚜껑을 열어 얼굴을 박았다. 먹은 것들이 그대로 역류해 변기에 쏟아졌다. 종내엔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개운하지 않았다.
아직도 뱉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내 몸 안에 돌고 있는 살인자의 피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