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53화 (53/115)

53.

남은 일정은 묘한 어색함이 흐르는 채로 진행되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찬희는 제 옆에 앉아 얌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를 흘끗 훑었다. 현재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찬희가 입 안 가득 바람을 집어넣었다가 푸, 하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형은 비행기 타고 같이 안 가요?”

“형은 팀원들이랑 따로 비행기 타고 올 거야.”

“우리랑 안 가구?”

“이따가 집에서 만날 거잖아. 괜찮아.”

이상한 남자와 마주친 이후로 찬희와 현재 주변엔 더 많은 경호가 붙었다.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에 관광청 측에서도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이었다. 다행히 경호가 붙은 이후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도현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찬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현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도착해 집으로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함께 경험한 첫 해외여행에 대한 소감조차 나누지 못했다. 찬희도 찬희였지만, 현재 쪽에서도 아무런 대화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유현재.”

찬희가 일부러 틱틱대는 말투로 현재를 불렀다. 현재가 의자에 앉아 있다 말고 천천히 찬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행 재미없었어?”

현재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아니.”

“근데 왜 표정이 그래?”

“표정은 너도 안 좋은데…….”

“나는 납치당할 뻔했잖아!”

현재가 살짝 겁먹은 듯한 얼굴로 찬희를 쳐다보았다. 이제야 좀 유현재 같은 표정이었다.

“나 때문이래…….”

“뭐가?”

“너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게 나 때문이래….”

“누가 그래?”

“형이.”

“형? 도현이 형 말이야?”

“으응….”

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현이 현재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분명 어디서 알고 왔는지 갑자기 사찰에 나타나 미친 듯이 현재를 찾아댄 모습이 선명한데, 그러고서 그런 말을 했다고? 현재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내밀고 앉아 찬희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 멀뚱히 서 있는 도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는 듯한 자세였으나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그들을 맞이했다. 찬희는 아까 전까지 도현이 보던 허공을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빨리 도착했구나.”

“네.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에요.”

엄마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가정부가 두 사람의 가방을 들고 함께 2층으로 따라 올라왔다. 짐을 정리하고 씻는 동안 찬희는 도현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형.”

소파에 앉아 있던 도현이 조금 지친 얼굴로 찬희를 쳐다보았다.

“나 봤어.”

도현의 눈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상한 파란색 창.”

“뭐?”

“형이 그걸 보고 있었잖아.”

도현이 소파에서 내려와 찬희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 터라 조그만 어깨에 통증이 일었다. 찬희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아파, 형.”

“뭘 봤다고?”

“파란색 창…….”

“읽었어?”

“아직 한글을 몰라서 못 읽었어…….”

도현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찌푸려진 미간 사이로 체감하기조차 어려운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언제 봤는데?”

“형한테 펜 갖다 줄 때…….”

도현이 잠깐 그때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뭘?”

“네가 그걸 봤다는 거. 보인다는 거.”

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찬희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찬희의 작은 몸에 도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형.”

찬희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더니, 다시 도현에게 말을 붙였다.

“그거 나쁜 거야?”

도현이 찬희를 내려다보았다. 180이 넘는 성인 남자는 아직 어린 찬희의 눈에 위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무섭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찬희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현재가 그랬어…….”

“뭐라고 했는데.”

“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자기 때문이라고.”

도현이 찬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찬희는 마음이 급해져 잔뜩 새는 발음을 겨우 유지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가 보면 안 되는 걸 봐서 그래?”

도현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은 화를 누르는 듯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도 해 보였다. 긴 침묵 끝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상관 없어.”

“…정말?”

“나쁜 거 아냐.”

“정말로 아냐?”

도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찬희가 결국 울먹이며 도현의 다리에 매달려 눈물을 흘렸다. 나쁜 게 아니라 다행이야. 나쁜 게 아니라서. 세상엔 나쁜 게 없어서…….

*

잠옷을 입은 찬희가 조심스레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자신의 방과 다르게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이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문을 반 이상 여니, 침대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현재!”

현재가 토끼눈을 뜨고 찬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안 잤어?”

“너랑 잘려고.”

찬희가 베개를 들고 현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침대에 팡, 하고 누웠다. 현재가 익숙한 듯 옆자리를 내주었다. 엎드린 채 얼굴을 침대에 박고 있던 찬희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너 안 나빠.”

현재가 책에서 눈을 뗐다. 어차피 찬희가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것이었다.

“형이 그랬어. 나쁜 건 없다고.”

“그치만…….”

“그러니까 넌 안 나빠.”

아랫입술을 내밀고 있던 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희가 몸을 굴려 현재의 위로 엎어졌다. 꺄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두 사람이 밝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삼십 분가량을 놀다 지쳐, 현재와 찬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나란히 잠들었다.

*

방 내부는 서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제목만 봐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고서부터, 최근에 나온 마나 운용 응용 법칙 같은 기본적인 책들이 가득했다. 도현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빈 책상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방 안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정적을 깬 건 시끄러운 진동 소리였다.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가 연이어 와서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도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

[귀국했다며?]

[내일 만나면 안 돼?]

[학교 앞에서]

[나 야자 째고 갈게]

도현의 눈빛이 금세 착잡해졌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현이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답장을 하지 않자 조바심이 났는지, 상대가 전화를 걸어왔다. 도현은 무시하려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형, 또 내 연락 안 받으려고 했지.

“…왜 전화했어?”

-내일 만나.

“내일 바쁠 것 같은데.”

-나 밥 사 주기로 했잖아.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나 곧 중간고사 기간이라 어렵단 말이야.

도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곤란하다는 듯, 혹은 난처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최대한 쥐어짜내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수현아.”

-아, 그런 톤으로 부르지 말라고오.

“늦었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하자.”

-내일 진짜 연락 받아 줄 거야?

도현이 한참을 망설이다 응, 하고 대답했다. 아마도 유도현은, 내일 내내 핸드폰을 꺼둘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목소리에 찜찜함이 가시지 않은 채 수현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또 침묵이 찾아왔다. 도현이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정적을 깨며 말을 내뱉었다.

“진행율 보여줘.”

도현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허공에 푸른 창 여러 개가 연속적으로 뜨기 시작했다. 창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어두운 방 안이 금세 밝아졌다. 도현은 가장 가운데에 있는 창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에 표정은 평소와 같이 유지한 채였다.

-오늘의 진행율: 33%

나쁘지 않은 속도입니다! 이대로라면 미션 성공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오늘의 운세는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치지 말 것’입니다.

-다음 미션 단계로의 진행을 위한 퀘스트는 총 3개 남았습니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 내용이 바뀌더니 새로운 글씨가 허공에 떠올랐다.

-호시탐탐 목숨이 노려지는 대상물! 언제 어디서 숨통이 끊어질지 몰라요. 적으로부터 대상물을 지키고 당신의 명성을 유지하세요! 오늘은 대상물에게 외출을 권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대상물: 유찬희

당신의 명성 지수: 98%

*명성 지수는 하락할수록 전체 스탯을 낮춥니다. 당신의 명성은 40퍼센트의 능력과 5퍼센트의 행운, 그리고 55퍼센트의 ‘비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명성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밀’의 보안 유지를 게을리하지 마세요. ‘비밀’은 언제든 자신을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밀’을 최대한 완벽하게 유지하세요. 행운을 빕니다! 마스터.

화면이 꺼졌다. 도현은 집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마스터 같은 소리 하네.”

그냥 개 같은 시스템 주제에. 도현이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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