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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 사용 설명서-51화 (51/115)

51.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찬희가 창문 밖 풍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이제 막 겨울이 지났으니 완연한 봄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할 때긴 했다.

“안전벨트 맸니?”

“네에.”

찬희가 턱을 괸 채 입만 벌려 대답했다. 무심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운전기사에게 출발을 명령했다. 차가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깥의 풍경은 시도 때도 없이 휙휙 바뀌었다. 금세 질려버린 찬희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저와 똑같이 안전벨트를 맨 현재가 앞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너 외국 가 봤어?”

찬희가 묻자 현재가 고개를 저었다. 찬희는 금세 우쭐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난 가 봤는데.”

“어디?”

“러시아, 일본.”

“멀어?”

“별로 안 멀어. 그냥 비행기 타고 자다 보면 도착해.”

“비행기 안 무서웠어?”

“뭐가 무섭냐?”

앞좌석에 앉아 있던 엄마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찬희, 처음 비행기 탔을 때 울었던 거 엄마는 아직 기억나는데.”

“엄마!”

현재가 진짜냐는 얼굴로 찬희를 쳐다보았다. 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비행기에 타 본 적이 있다는 전적을 한껏 자랑하려 했던 찬희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따가 비행기 탈 때 둘 다 떠들면 안 돼.”

“…저희 조용해요.”

“진짜? 찬희 매일 현재 방에 가서 떠들고 놀잖아. 잘 시간에도.”

“어떻게 알아요?”

“엄만 다 알아.”

대박. 찬희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가 저택에 들어온 지 3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 주간을 치고받고 싸우던 아버지와 도현은 잠정적으로 휴전 선언을 한 듯했다. 사실 미친 듯이 바빴던 도현 때문에 강제로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현재가 들어온 초반에 매일 집으로 꼬박꼬박 귀가했던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처음 현재를 데면데면하게 대하던 찬희의 부모님은 점점 최소한의 것들부터 챙겨 주기 시작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데리고 온 아이였지만 찬희의 부모님, 특히 엄마는 그런 아이를 냉정하게 내칠 정도로 모진 성정은 되지 못했다. 찬희는 점점 평화를 찾아가는 집안을 보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비행기 타고 가면 형 있을 거야. 형 일 절대 방해하면 안 돼. 알겠지?”

“네에.”

“현재도 대답해야지.”

“네.”

차는 꼬박 몇 십여 분을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올라타기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길진 않았다. 현재가 조금 떨기만 하고 별다른 티를 내지 않자 찬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찬희와 현재 두 사람의 안전벨트를 모두 확인했다. 퍼스트 클래스 내부는 평화롭고 조용했다. 두 사람은 승무원이 나누어 준 초콜릿을 먹으면서 여행에 대해 얘기했다.

“도착하면 형 바로 있어요?”

“아마 늦어도 오늘 밤에는 호텔로 올 거야.”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찬희의 얼굴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형이었다. 티비만 틀면 형의 얼굴이 나왔고, 신문 속에도 꼭 형이 있었다. 그 즈음 찬희에게 도현은 영웅과도 다름없었다.

“형 보고 싶다.”

현재의 말에 찬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또한 도현이 기다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갑작스레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어른이었다. 집과 옷과 가족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형 이번에도 몬스터 다 죽이고 이겼대.”

“안 다쳤을까?”

“안 다쳐. 형은 안 다쳐. 저번엔 열 마리 상대로도 혼자 이겼다고 했어.”

“진짜?”

“응. 너 형 못 믿어?”

“아니이….”

현재가 고개를 숙였다. 찬희의 일방적인 신뢰와는 달리 현재에겐 늘 불안이 있었다. 그건 가장 가까운 이를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여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을 내며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안전벨트를 푼 두 사람이 엄마의 인솔에 따라 천천히 비행기 밖으로 나갔다. 공항 내부는 한국과 별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바깥 풍경은 묘하게 달랐다. 기분이 좋아진 찬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님이 데리러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

“엄마! 저희 놀이공원도 가요?”

“유찬희, 엄마가 저번에 뭐라고 했지? 우린 놀러온 게 주요 목적이 아니랬지?”

“앗, 네….”

“형이랑 만나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 않았어?”

“네!”

“그럼 얌전히 일단 호텔에 가자. 응?”

마침 세 사람을 픽업하러 온 듯한 차가 천천히 그들 앞에 섰다. 호텔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쿄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라고 했다. 귀빈의 가족이었으니 당연한 대접이었다.

시외 근교의 S급 게이트를 깨부수기 위해 일본 총리가 직접 도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상급 랭커들이 해외에서 활약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처럼 나라의 수장이 직접적으로 SOS를 친 것은 처음이었다. 해당 S급 게이트로 인해 일본의 랭커 스무 명이 생을 달리했으며 연관된 손해액만 억대를 넘어갔다.

제안을 받은 도현은 자주 합을 맞추는 길드원들을 꾸려 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다. 도현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기진맥진한 실더와 제조사들이 도현의 일행을 쳐다보았다. 몬스터가 역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최대한의 전력을 쏟고 있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도현은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짓 하나로 길드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은 힘을 풀고 드러누웠다. 그게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오늘 형 나오지?”

“응. 아마도.”

TV에 나오는 일본 앵커는 연신 S급 게이트와 한국에서 온 유도현의 싸움을 떠들어댔다. 게이트는 최장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그건 처음, 아주 오래 전 게이트가 ‘발현’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불문율이었다. 전방 10km 이내 어딘가에는 게이트의 출구가 반드시 열릴 것이었고, 거기에서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찬희와 현재는 바스락거리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알아들을 수 없는 뉴스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는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며 기도를 했다. 찬희는 그런 엄마를 따라 두 손을 겹쳐 모았다. 찬희가 그러자 현재도 그 행동을 따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엄마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실시간으로 붉어지던 얼굴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찬희가 놀라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엄마, 왜 울어요?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끊은 엄마가 찬희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형이 나왔대.”

“와!”

찬희가 천진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봤지? 형은 다 이긴다니까.”

현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다행이라는 얼굴로 찬희를 향해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

*

가벼운 인터뷰 일정을 소화한 도현이 호텔에 도착한 건 열 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도현은 전달받았던 호텔방 번호를 상기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몸이 무거웠지만 도현에겐 가족을 만날 의무가 있었다.

“도현아!”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가 도현에게로 달려왔다. 도현의 눈이 방 안을 훑더니 곧 한곳에 머물렀다. 찬희가 도현의 시선이 머문 곳을 바라보았다. 현재가 얌전히 앉아있는 소파 위였다.

“무사히 왔네.”

말과는 다르게 조금 착잡한 듯한 표정이었다. 찬희가 뒤늦게 도현에게 걸어가 그의 다리를 흔들었다.

“형, 몬스터 다 죽인 거야?”

“응.”

“형이 다 죽였어?”

“형이랑, 형 친구들이.”

찬희가 조잘대는 것에 가볍게 대꾸한 도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사히 온 거 봤으면 됐어요.”

“방으로 돌아가게?”

“네. 너무 피곤해서.”

찬희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형을 기다린 것치고는 너무 짧은 만남이었다. 현재 또한 아쉽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도현이 지친 얼굴로 문 밖을 나섰다.

“형이 너무 피곤한가 보다.”

“그러게.”

“내일은 같이 놀아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정말요?”

“그러려면 일찍 자야 돼.”

엄마의 당부에 찬희와 현재가 침대로 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찬희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펜이 한 자루 보였다. 평범한 펜이었지만 찬희는 금세 그것이 도현의 것임을 알아챘다.

내일 갖다 주라며 만류하는 엄마를 조르고 졸라 펜을 쥐고 바로 옆방에 직접 전달해 주러 간 찬희는 복도 끝에 있는 검은 실루엣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꼭 도현과 같은 뒷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했잖아.”

찬희가 조심스럽게 도현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유도현으로 추정되는, 아니 유도현이 맞는 그 남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무언가를 읽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리고 왔잖아.”

찬희가 막 도현의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 찬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시스템 창. 가끔 컴퓨터 게임을 할 때마다 보이곤 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 시스템 창 위에는 아직 배운 적 없는 글자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찬희는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인기척을 눈치챈 도현이 기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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