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현재.”
“현재?”
“응, 현재로 해.”
콕 누르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어린아이의 까만 눈이 반짝였다. 도현은 곧게 펴져 있던 무릎을 굽히고 제 어린 동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현재인데?”
“얘가 엄마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엄마, 아빠 얘기가 나오자 도현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작은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야! 울지 말라니까!”
찬희가 호통을 치듯 어린아이에게 손가락질했다. 찬희의 기세에 아이가 잔뜩 몸을 웅크렸다. 지겨워 죽겠다는 듯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쉰 찬희는 말 그대로 애어른 같아 보였다. 도현이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말했다.
“앞으로 너는 현재야.”
“…….”
“유현재. 알겠지?”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도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현은 어린아이의 눈이란 어떤 감정도 푹 잠기게 만들 정도로 깊고 투명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는 경우가 더 괴로울 때가 있었다. 도현은 결국 먼저 현재에게서 눈을 떼고 찬희를 향해 신신당부했다.
“괴롭히지 말고 친하게 지내.”
“형은 내가 무슨 괴물인 줄 알아?”
“형도 듣는 거 많아. 너 유치원에서 맨날 싸우고 다닌다며.”
“그건 걔네가 멍청해서라니까!”
“멍청?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찬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오리주둥이처럼 길게 내밀었다. 도현이 현재의 손을 잡고 찬희에게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잔뜩 입이 나온 와중에도 찬희는 현재의 손을 확 낚아채 달려 나갔다.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어두운 집 안 복도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부모를 만날 시간이었다.
*
“일단 여기 이 구역은 넘어오면 안 돼.”
찬희가 플라스틱 울타리로 만들어 둔 구역 안쪽에 쏙 들어가며 말했다. 현재가 아직은 낯을 가리는 듯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타리 안쪽을 제외하게 된다면, 사실 방에서 움직일 곳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찬희는 장난감들을 모두 울타리 안에 집어넣고 플라스틱 문을 닫았다.
“만지면 어떻게 되는데?”
현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찬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야무지게 대답했다.
“대가를 치러야지.”
“대가? 대가가 뭐야?”
“돈 같은 거야.”
“돈?”
“과자 사면 돈 내야 하잖아. 그런 거라구.”
현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찬희는 혼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놀이가 재밌을 리 없었다. 십여 분 정도 인형을 가지고 놀던 찬희가 흘끔거리며 현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찬희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놀이를 지속했다. 현재는 방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그런 찬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너도 하고 싶지?”
결국 찬희가 제 성미에 못 이겨 현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가만히 질문을 듣던 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 진짜 안 하고 싶어?”
“돈이 없으니까.”
“그럼 내가 돈 안 받을 테니까 이리 와서 얘 역할 좀 해 줘.”
선심을 쓰는 척 호의적인 말을 했음에도 현재의 표정은 여전히 굳건했다.
“아니. 괜찮아.”
저택에서 나름대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찬희는, 누군가의 연달은 거절이 익숙지 않았다. 눈썹을 한데 모은 찬희가 소리를 질렀다.
“왜 싫은데?”
“싫은 게 아니라 안 하고 싶은 거야.”
“그니까 왜 안 하고 싶냐구.”
또박또박 이유를 요구하는 찬희의 태도에 현재가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처럼 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슬프니까.”
의외의 대답에 찬희의 고개가 기울었다.
“왜 슬픈데?”
“엄마랑 아빠를 이제 볼 수 없으니까.”
“…돌아가셔서?”
“응. 그리고 도현이 형이 앞으로 엄마 아빠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고 했어.”
“왜?”
“나를 위해서래.”
“널 위해서?”
“응. 그러니까 꼭 지켜야 해.”
찬희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영원의 헤어짐을 알기엔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찬희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를 바라보았다.
“나도 앞으로 너희 엄마 아빠 얘기 안 할게.”
“……응.”
“그러니까 이리 와서 얘 역할 좀 해 줘.”
찬희가 들고 있던 인형을 흔들었다. 누가 봐도 악당처럼 보이는, 검은 망토를 입은 까만 곰 인형이었다. 현재가 쭈뼛거리며 일어서 찬희에게로 다가갔다. 울타리 바깥으로 손을 뻗어 찬희가 건네준 인형을 빤히 내려다보던 현재가 물었다.
“얜 무슨 역할인데?”
“걘 너야.”
“나라구?”
“응. 그냥 너야. 우린 싸우면 돼. 네가 울타리 밖에서 우리 성에 쳐들어온 이야기야.”
“그럼 내가 악당이야?”
“악당?”
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재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악당은 없어.”
“…….”
“그냥 싸우는 거야.”
“그렇구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문간이 가득 찰 정도로 큰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유찬희.”
“왜.”
“현재 괴롭힌 거 아니지?”
“안 괴롭혔어, 놀고 있었어.”
“진짜?”
도현이 확인을 구하려는 듯 현재를 바라보았다. 현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잘 지내. 같이 살 거니까.”
“같이 산다고?”
“왜, 싫어?”
찬희의 눈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커졌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다섯 살 꼬마아이의 모습이라 도현이 작게 웃었다. 현재가 가만히 앉아 눈을 깜빡이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현재 방 생길 때까지 둘이 같이 지내.”
“그럼 이제 나랑 얘랑 형제야?”
“뭐라고?”
“나랑 형이랑 같이 사는데 형제라고 하잖아. 얘도 같이 살면 형제야?”
엉뚱한 질문에 도현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형제는 아니지만 가족이라고 생각하자.”
“그게 뭐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돼.”
찬희가 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놓고 무언가 열심히 생각하더니, 현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다행이다.”
“뭐가?”
“다시 가족이 생겼잖아.”
찬희가 말갛게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심술을 부리던 아이는 어디 갔냐는 듯 해맑은 웃음이었다. 현재가 찬희를 따라 작게 웃었다. 여전히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해진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넓은 저택 안에 현재의 자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층의 빈방이 그럴듯한 아이 방으로 꾸며지고, 동화책이며 색연필, 크레파스 같은 것이 소품처럼 놓였다.
“내 방보다 깨끗하네.”
현재의 방 안에 책꽂이며 침대, 서랍장 같은 큼직큼직한 것들이 들어설 동안 집 주인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모든 일은 도현이 짬을 내어 진행했다. 찬희는 간혹 서재에서 들리는 고성을 빼놓지 않고 엿들었다. 내용은 대개 비슷했지만 분노의 강도는 더더욱 높아졌다. 방을 나오면 도현은 눈에 띄게 차분한 얼굴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무리 어린 찬희더라도 쉽사리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도현은 찬희의 얼굴을 볼 때마다 ‘현재와 잘 지내라’는 말만 반복했다. 찬희는 제 옆에 앉아 있는 조그만 아이를 바라보았다. 키도, 덩치도 비슷했지만 현재는 언제나 왜소한 느낌이 있었다. 왜일까. 찬희는 꾸준히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면 나쁜 거잖아.”
갑작스러운 찬희의 말에 현재가 들고 있던 블록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엔 울타리 모형이 있었다. 찬희는 현재가 쌓아놓은 블록에 자기가 들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럼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하는 것도 나쁜 걸까?”
현재가 생각에 잠겼다. 쉽사리 갈피가 잡히지 않는 듯했다.
“우린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나쁜 짓이라는 말에 현재가 동요했다. 찬희는 그런 현재를 바라보았다.
“형이랑 아빠가 방에서 막 싸우는데 나는 모른 척만 해.”
“…….”
“우리 가족이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른 척해야 해.”
“…미안해.”
“너도 안 행복해?”
현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았다. 찬희가 현재의 대답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응.”
“그럼 우리 가족은 전부 행복하지 않네.”
현재가 눈을 깜빡이자, 커다란 눈물방울이 바닥을 향해 툭 떨어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현재의 울음이 터졌다. 찬희가 놀라 소매로 현재의 눈을 벅벅 닦았다.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아냐.”
찬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쁜 사람은 없어.”
“…….”
“싸우는 사람만 있는 거야.”
그건 그 무렵 도현이 매일 입에 달고 살던 말이기도 했다. 찬희는 도현의 데칼코마니 같았다. 얼굴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지만 어쩐지 행동 면에선 제 형을 쏙 빼닮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두 사람이 친형제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끔 찬희는 기이할 정도로 도현의 거푸집 같은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자주 읊는 것도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알 수 없는 그 어른 같은 말로 찬희에게 종종 위로를 받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