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49화 (49/115)

49.

“찬희가 지어 줬다고?”

고한결이 놀란 얼굴을 하자 유현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현재라는 이름으로 지은 거야?”

유현재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유 같은 걸 기억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지은 게 아니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유현재가 내 심정을 대변하듯 대신 대답을 했다.

“그땐 어렸어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지었을까 싶긴 해.”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가 하는 말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다섯 살 유찬희가 뭘 알고 그렇게 대단한 이름을 지었을까 싶긴 했으니까.

*

고한결은 생각보다도 오지랖이 넓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타입이었다. 나와 유현재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닌 반 애들에 대한 소식들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관심도 가지 않는 반 녀석들의 정보를 듣고 있다가, 나는 무의식중에 고한결을 바라보며 툭 말을 던졌다.

“너 진짜 성격 좋구나.”

“나?”

고한결이 갑작스런 칭찬에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엄청난 칭찬도 아니었는데 반응 자체가 투명한 타입인 듯했다. 나는 괜스레 시비를 걸듯 말을 이어 갔다.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될 텐데 왜 나랑 놀아?”

고한결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냥 처음부터 네가 맘에 들었으니까.”

단도직입적인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조금이라도 애매한 대답을 하면 물고 넘어지려고 했는데, 뭐라 할 수조차 없는 방어였다. 고한결이 앞에 놓인 식은 치킨 조각을 포크로 쿡쿡 찌르며 계속해서 말을 했다.

“입학식 날 처음 봤는데 나랑 잘 맞을 것 같았어.”

“그걸 얼굴만 보고 아냐?”

“사람이 직감이란 게 있잖아.”

허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한결은 그게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같이 웃기 시작했다. 이건 한재민의 끄나풀이라 해도, 아니라고 해도 기가 찬 놈이다.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유현재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 슬쩍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음식만 깨작이고 있었다.

“직감으로 좋은 사람이라 판단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유현재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내가 누구를 쳐다봐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고한결에게 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반응은 유현재 쪽이 조금 더 격한 느낌이었다.

“직감만큼 정확한 게 어딨다고 그래.”

고한결이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유현재를 향해 동의를 구했다.

“그치, 현재야.”

유현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나는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유현재의 목소리를 눈치챘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슬쩍 유현재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흐렸다. 본의 아니게 뭔가 잘못된 말을 한 기분이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더 높였다. 유현재는 대화 내내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유현재가 뭐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다운됐는지 알 수가 없어 더 답답했다. 유현재가 시무룩해하고, 내가 눈치를 보는 상황이 이어지니 고한결도 분위기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현재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그러게.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그 말을 하는 유현재는 마치 귀가 축 늘어진 대형견 같았다. 그러니까, 뭔가 화가 나거나 심각한 일로 문제가 생겼다기보단… 그러니까, 한마디로 삐진 느낌.

*

고한결과 헤어져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유현재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붙일지 계속 고민했다. 너 무슨 일 있어? 그렇다기엔 그 짧은 새에 뭔 일이 생겼을 리는 당연히 없고. 너 화났어? 딱 봐도 화난 건 아니다. 아니면 아픈 데 있어? 아까 물어봤었던 질문이다. 결국 물어볼 건 딱 하나.

“너 삐졌어?”

내 직설적인 물음에 유현재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흠칫한 듯한 모양새였다. 키는 훌쩍 커서 시야 정면엔 겨우 목덜미만 보이는데도 붉어진 게 느껴졌다. 유현재는 민망한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아냐, 그런 거.”

“그냥 물어볼 때 대답하지 그래?”

“아니라니까.”

“거짓말 치지 마.”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봐왔는데. 까지 말하려다가 생략했다. 어쨌든 ‘오래’라는 건 나밖에 느낄 수 없는 시간들이니까. 유현재는 머뭇거리다가 이런 말을 하기조차 민망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연거푸 해댔다.

“그냥… 나만 기억하는 것 같아서.”

“어?”

유현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름 지어 준 의미도 그렇고.”

“아.”

역시 따로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곤란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유현재라는 이름의 의미? 도저히 짐작가지 않았다. 원작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부분인지라 당연하게도 큰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상황이 많이 이상해지는 걸까? 유현재가 혹시 다른 오해나 의심을 하진 않을까?

“직감.”

유현재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직감만으로 너랑 함께하잖아, 내가.”

“아.”

“지금 이렇게 너랑 함께 걷는 것도… 정말 내 감정만으로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아마도 몇 년간 유찬희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자라왔을 유현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로 내게 마음을 열어 준 것도 결국엔 유현재 스스로의 직감과 감정 때문이었다. 나는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 의심하고 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을 테니까.

“그….”

나는 말꼬리를 죽 잡아 늘렸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최대한 진심을 담아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

유현재가 나를 쳐다보았다. 사과를 했음에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득, 내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오랜만인지를 실감했다.

“이름을 지어 준 건 솔직히 잊어버렸어.”

“그런 것… 같았어.”

“근데 하나만 알아주라.”

“…….”

“나도 기억해.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유현재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다 눈을 깜빡였다. 깜빡거리던 눈이 곧 보기 좋게 접히면서 둥글게 휘었다. 유현재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비록 이렇게 마주 보며 웃는 것이 아주 찰나일지라도, 여태껏 견뎌왔던 수많은 과거보다도 앞 페이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기억 못하더라도, 더 많은 걸 기억하고 있다고만 생각해 줘.”

“어떤 거?”

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비밀인데.”

“비밀?”

“비밀인데, 한 가지 말해 줄 건.”

나는 여전히 유현재의 눈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마주하고 있는 유현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지점이 서로 다르더라도, 나는 결국 나라는 거야.”

내가 진짜 유찬희든, 혹은 인생 몇 회차의 유찬희든. 이 모든 걸 겪어오고도 네 앞에 서 있길 선택한 나는 결국 나라는 것을 유현재가 알아주길 바랐다.

*

“이름 말인데.”

나는 계속해서 내가 지어 줬다던 유현재의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이름을 지어 준 주체인 내가 계속해서 모르는 것도 찝찝했고, 또 유현재가 그 이름의 뜻을 나름대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알고 싶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지어 줬어?”

유현재가 아, 하며 살짝 입을 벌리곤 작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다섯 살 때잖아. 뭐 그렇게 거창하진 않았는데.”

“거창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삐졌다고?”

“안 삐졌어….”

유현재가 작은 목소리로 반항했다. 나는 입고 있는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유현재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그래. 안 삐진 걸로 해 줄게.

“그래서 그 거창한 이유가 뭔데?”

“우리 부모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다 지어 줬어.”

생각보다 평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읜 유현재의 입장에선 상당히 의미 있는 작명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때 이름을 지어 준 유찬희도 다섯 살치곤 제법 똑똑하단 생각을 했다.

“그땐 원래 이름을 왜 쓰지 말아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거든.”

“왜 쓰지 말아야 했는데?”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냥 도현이 형이….”

유도현의 이름이 나오자 유현재가 한 템포 숨을 내쉬었다.

“도현이 형이, 꼭 예전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누가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만 기억나.”

“그랬다고? 왜지?”

“모르겠어. 그래서 부모님 이름을 딴 지금 이름이 더 의미 있는 걸 수도 있고.”

나는 조금 의아해진 마음으로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도현이 유현재에게 예전 이름을 숨기라고 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굳이 유씨 성을 주면서 새로운 이름을 짓는 자체도 이상하긴 했다. 처음 빙의해서 소설을 복기할 땐 단순히 이름이 없는 아이를 주워 와서, 라고 생각했는데 유도현의 행적을 보니 그건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지 이름에 현이 들어간 거야?”

나는 애써 생각을 떨쳐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지 성함이 현민이셨거든.”

앞으로 가던 걸음이 뚝 멈췄다. 목 안쪽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내가 천천히 되물었다.

“성함이 현민이셨어?”

“응. 김현민. 어머니는 이희재.”

순간 단 한 문장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아, 왜 항상 이런 상황만이 내게 닥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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