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48화 (48/115)

48.

차수현이 티 나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화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웃었다. 나를 이용해서 목표를 성취하려 했으니, 내가 없다면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맞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민한 기류를 눈치채고, 한재민이 차수현을 돌아보았다. 차수현은 뭐라 쏘아붙일 듯 입술을 움직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재밌네, 너.”

한재민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저 말이 진짜로 재밌단 뜻은 아닐 것이다.

“네 말대로 사춘기라 그런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스럽게 그 말을 받아쳤다.

“두 번 겪으면 죽겠네, 아주.”

“괜찮아. 나도 이제 철들어 가는 중이니까.”

기가 찬다는 듯한 헛웃음이 들려왔다.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내가 크러시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한재민이 내게서 얻고자 하는 것과 같았다. 그 목표를 확실하게 말해 줬으니, 한재민은 나를 못 미더워하긴 해도 계속해서 지켜보기는 할 것이었다.

“그래서 대체 날 어떻게 감시한 건데?”

나는 며칠간 계속해서 추측만 해왔던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재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그야 사람 시켰지.”

“그게 누군데.”

“꼭 알려 줘야 해?”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을 반정부 단체 스파이로 의심하고 싶지 않아서, 라고.”

“신경 쓰지 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니까.”

“말 안 해 주는 게 더 의심스러워.”

별 표정 없이 대답을 지속하던 한재민이 순간 재밌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가르쳐 주기 싫어졌어.”

“뭐?”

“괘씸죄라고 해 둘까.”

나는 조금 더 물고 늘어질까 하다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길게 언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됐어. 어차피 짐작 가는 사람도 있고.”

“짐작 가는 사람? 누구?”

“가르쳐 주기 싫은데.”

“멀쩡한 학생을 반정부 단체 스파이로 의심하는 짓은 삼가야지, 찬희야.”

“미친놈 아닌가.”

한재민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굳이 여기에서 고한결의 이름을 꺼내서 이득이 될 것이 있는지를 고민해 보았다. 고한결이 한재민의 스파이라 해도 문제였고, 아니더라도 공연히 내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튼 그 친구 너무 괴롭히진 말고.”

“그럼 스파이 짓을 그만두게 하던가.”

“글쎄. 네가 애꿎은 의심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스레 의미심장한 말을 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속임수에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헛소리할 거면 난 간다.”

“할 말은 끝내고 가야지.”

한재민이 나지막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뒤돌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다음 달.”

여태껏 아무런 미동도 없던 차수현이 처음으로 눈썹을 움직였다. 나는 그런 차수현의 변화를 보고 한재민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다음 달까지면 충분하지?”

“뭐라도 정해진 게 있는 거야?”

“위쪽의 복잡한 사정이니까 말하기엔 곤란하지. 특히 너같이 발만 걸친 애들은.”

“진짜 지랄 맞은 의심병이네.”

“네가 원하는 대로 목적만 공유하는 심플한 사이, 좋잖아?”

맞는 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크러시가 유현재에게서 관심을 끄고 나아가 내 신상까지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유도현을 불러내 명목상의 도움만 준 후 발을 뺄 수도 있었다. 물론 소설대로 유도현을 부른 후 내가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했지만.

“마음대로 해.”

다음 달이면, 그래. 나쁘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얻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나쁘지 않은 기간이었다.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체육관에는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뻣뻣한 표정을 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서서 아직 비어 있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내 근처에는 유현재와 이주현, 고한결도 함께 서 있었다. 곧 두꺼운 노트 같은 것을 옆구리에 낀 선생님 한 명이 천천히 단상으로 올라왔다. 고지식한 눈빛이 안경 너머로 노트의 내용을 훑었다.

“다들 눈치챘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번 2차 선별전 때 1, 2급을 받은 학생들이다.”

모두들 예상했던 터라 큰 동요는 없었다. 나는 슬쩍 눈이 마주친 이주현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앞으로 너희는 특수 관리반에 소속되어 별도의 훈련을 받게 된다.”

몇 명의 학생은 흥분한 얼굴이었다. 특수 관리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주로 마나 운용에 대한 실전을 연습하며 정기적으로 훈련도 간다고 했다. 굳이 따져 보자면 조금 귀찮은 제도였다. 높은 급수의 랭커를 배출할수록 명성을 높일 수 있는 학교의 입장에선 꽤나 절박한 투자였겠지만 말이다.

“졸업 직후 치르는 3차 선별전에서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고강도의 훈련을 지속해야 돼.”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 관리반, 줄여서 특관반을 맡게 된 선생님은 50대 정도 된 전투반 훈련 담임이었다. 전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몸매와 얼굴의 담임이 귀찮아 죽겠다는 듯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은 바로 체육관으로 등교한다. 알겠나?”

넵. 연습한 것도 아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현재는 조금 긴장된, 하지만 상기된 얼굴로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이러한 정식 훈련을 받는 게 처음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거겠지.

첫 특관반 수업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이 났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유현재에게 다가갔다.

“어때?”

유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웃었다. 그 나이 대 소년 같은 맑은 웃음이었다.

“좋아. 기대돼.”

“그럴 줄 알았어.”

바로 앞에서 고한결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 먼저 고한결의 이름을 불렀다. 고한결이 뒤돌아 우리를 바라보았다.

“난 좀 걱정돼.”

“뭐가.”

“나 솔직히 뽀록으로 2급 받은 거라… 훈련하다 보면 백퍼 뒤쳐질 거 같은데.”

나는 그런 고한결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도와줄게.”

고한결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정말? 묻는 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가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와, 찬희 넌 진짜 인성부터 된 애다.”

“그 정돈 아니고.”

“사실 마나 정리 자체가 안 돼. 완전 답 없지.”

“아냐. 10대엔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어. 마나 운용이 불안정해서.”

“그래? 수업 때 그랬었나?”

“나 예전에 과외 받을 때.”

아하. 고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적극적인 내 호의에 살짝 놀란 듯한 모습이었지만, 싫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웃으며 고한결의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재능 있을걸.”

“감동이다. 진짜.”

“앞으로 훈련 열심히 하자.”

솔직히 말하면 유찬희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긍정적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보려 한 기억이 손에 꼽았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자연스러운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또한 긍정적인 인간관계 구축이라기보단, 조금 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만.

*

특관반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이것저것 선생님이 시키던 걸 하다 보니 그새 하교 시간이 되었다. 막 가방을 챙겨 나가려 하는데 유현재가 교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석양이 창문을 넘어 발끝까지 물들였다.

“찬희야.”

“응?”

유현재가 망설이다 내 이름을 불렀다.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가고 싶은 곳?”

“응.”

유현재가 작게 웃으며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뗐다.

“찬희야! 현재야!”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고한결이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고한결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하려다 만 유현재가 신경 쓰였지만, 이내 고한결이 하는 말에 집중했다.

“우리 밥 먹고 갈래?”

“밥?”

“응. 특관반 됐잖아. 도와주기로 한 것도 고마워서.”

“아.”

유현재가 무어라 대답하려 했다. 나는 그 말을 끊고 먼저 대답을 가로챘다.

“그래.”

유현재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유현재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한결과의 연결 고리를 최대한 유지해 놔야만 한재민 쪽 사람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한결이 신난다는 듯 앞장서 걸으며 조잘거렸다. 나는 대충 맞장구쳐 주며 두 사람과 함께 학교 본관을 빠져나갔다.

“근데 너희 혹시 형제야?”

고한결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형제?”

“성이 똑같아서. 계속 궁금했거든. 무례했다면 미안해.”

“그건 아닌데….”

유현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처음 유현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여덟 살짜리 꼬마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던 모습. 비록 ‘나’와 유현재의 첫 만남은 그때였지만, 유현재는 훨씬 전부터 유찬희라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겠지.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내가 아닌 또 다른 유찬희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유현재가 대신 입을 뗐다.

“찬희가 지어 줬어. 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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