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때맞춰 들어온 사람이 고한결이 아니었다면. 그냥 데면데면한 같은 반 아이였다면 이렇게까지 불안이 커지진 않았을 것이었다. 고한결은 나와 유현재가 애매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뭔 일 있어? 현재 너도 밥 안 먹었어?”
“응. 어쩌다 보니….”
“니들은 배도 안 고프냐.”
고한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함께 웃어 줄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는 의심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입학식 첫날부터 갑자기 내게 다가온 것도 수상했다. 이유 없는 호의라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고한결에게 물었다.
“넌 밥 다 먹고 온 거야?”
“응.”
“누구랑?”
“너 없어서 혼자 먹었잖아. 앞으론 빼먹지 마라, 좀.”
고한결이 장난스레 내 어깨를 툭 쳤다.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기분 나빠.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따 5교시에 등급 결과 알려 준다더라.”
고한결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앉아 있는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현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가 1급을 받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을까? 만약 1급을 받는다면, 유현재는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내보일까.
고한결이 말한 대로,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담당 교사가 아닌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다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름 부르면 차례대로 종이 받아가라.”
한 명씩 일어나 자신의 등급을 확인하는 얼굴은 놀라우리 만치 제각각이었다. 나는 내 이름이 불리자마자 쏠리는 시선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변수 없이, 종이엔 1급이라는 또렷한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음 사람을 불렀다.
“유현재.”
유현재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최대한 유현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유현재의 얼굴은 진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덤덤했다.
“찬희 넌 1급이지?”
고한결이 옆자리에서 물어왔다. 나는 순순히 종이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고한결은 2급이었다. 실수한 것치곤 선방했다고 말하는 고한결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려 작게 웃어 주었다.
*
나는 고한결에 대한 내 의심이 풀릴 때까지 그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녀석과 계속해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한재민의 감시가 지속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장 유력하다고 의심하고 있는 용의자에게 내 생활을 공유한다는 건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다행인 건 집으로 돌아온 후 나의 생활은 그 누구의 감시도 없이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재민과의 약속을 위해 계속해서 강령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책에 쓰인 대로 마나를 운용하다 보면, 비정상적인 흐름으로 인해 토기가 올라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연습을 지속했다.
매일의 일과처럼 소화하는 연습을 끝내고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을 때, 조그맣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유현재였다.
“바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서 본 유현재의 귀는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눈치챘다.
“무슨 일인데?”
“어?”
“지금 막 뭘 말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아.”
유현재의 귀가 더 달아올랐다.
“티 나?”
“어. 엄청.”
유현재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워낙 커다란 탓에 유현재의 표정은 쉽게 가려졌다.
“찬희야.”
“왜.”
유현재가 말없이 내게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종이 한가운데엔 1급이라는 글자가 진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예상한,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너 천재구나?”
나는 일부러 유현재를 놀리듯 말했다. 유현재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아?”
“…응.”
“축하해.”
나는 유현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유현재가 내 팔을 붙잡더니 자기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유현재의 품에 안긴 꼴이 된 나는 그의 가슴에 파묻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지금 너무 행복해.”
내가 품에서 벗어나려 힘을 주자, 유현재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모두 다 네 덕분인 것 같아.”
왜 내 덕분이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너는 그저 이 세계의 흐름대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는 것뿐인데. 차가우리 만치 현실적인 말을 삼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고맙네.”
나는 유현재의 품에서 천천히 몸을 떨어트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온기였던 터라, 하마터면 대책도 없이 기대어 투정이라도 부릴 뻔했다. 그때였다. 유현재의 바로 뒤, 허공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회색조로 바뀐 배경에 딱딱한 글씨가 한 글자씩 뜨기 시작했다.
<분기점에 도달했습니다!>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완성된 문장은 곧 사라지고, 다시 허공에 새로운 글자가 쓰이기 시작했다.
<당신의 행동에 따라 인물 ‘유현재’의 루트가 변동합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유현재의 루트가 변동한다니? 히든 루트라도 나타난단 말인가? 애초에 히든 루트는 폐기된 지 오래였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베드엔딩이나 다름없는, 히든 루트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더 막막한 것은, 어떤 특정 대사나 행동을 내뱉었을 때 루트가 변동한다는 게 아닌 단순히 ‘내 행동에 따라’ 유현재의 루트가 변동한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의 저의를 알 수 없어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있잖아, 찬희야.”
때맞춰 유현재가 입을 뗐다. 나는 천천히 눈만 돌려 유현재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웃긴 말이긴 한데, 내가 요즘 비슷한 꿈을 계속 꾸거든.”
유현재는 계속해서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이게 혹시 뭔가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다가 겨우 입을 떼 한 마디를 던졌다.
“…무슨 꿈인데?”
“그냥 너랑 함께 있는 꿈.”
“…….”
“어떤 날은 바다도 가고, 어떤 날은 같이 떡볶이도 먹고. 그리고 어떤 날은 어두운 도로를 함께 걷기도 했어.”
글씨는 계속 허공에서 나를 놀리듯 깜빡거렸다. 뭘까. 도대체 어떤 대답을, 어떤 행동을 해야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누군가 답을 내려 줄 수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빌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온전히 내가 결정해야 한다. 죽음으로 가는 길과, 조금이라도 더 삶을 연명할 수 있는 길을.
“꿈이 아니라 진짜라면.”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완전히 정리된 대답이라기보단 감이 이끄는 대로 내뱉는 말이었다.
“만약 그 일이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면.”
“…….”
“어떨 거 같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유현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또 또렷했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나는 유현재를 마주 보았다. 대화 없는 눈맞춤은 수 분간 계속되었다. 눈을 깜빡이면 곧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때 유현재는 천천히 대답했다.
“믿어.”
“그냥 꿈인데도?”
“꿈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
“네가.”
때맞춰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랜 눈맞춤 때문에 건조해진 탓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조심성 없이 눈물을 벅벅 닦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스템 창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떠한 안내도 없이 사라진 창 때문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믿어 줘.”
“…뭘?”
“나를.”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유현재의 눈을 피했다. 더 믿어 달라는 건, 내가 지금 유현재를 믿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유현재는 그렇게 느끼는 걸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그랬던 걸까.
*
다음 날 등교하기도 전에 유현재의 1급 소식이 학교에 퍼졌다는 걸, 고한결의 메시지로 알 수 있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고한결이 유현재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떻게 마나를 뚫었어? 중학교 다닐 동안 제조만 했었다면서 언제 헌터술도 배운 거야? 찬희가 가르쳐 준 건가?”
유현재는 곤란한 듯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자리로 걸어갔다.
“그럼 1급은 찬희랑 현재, 그리고 주현이구나.”
역시, 이주현일 줄 알았다. 아닌 게 더 이상했다. 고한결은 한참 유현재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더니 수업 종이 치자 자리로 돌아왔다.
“현재는 천잰가 봐.”
“천재 맞아. 무능력에서 1급 된 것부터가 그냥 천재지 뭐.”
“진짜 부럽다.”
“너도 2급이면 나쁘지 않잖아.”
“아냐. 2급도 운이 좋았던 거지. 사실 아버지가 나한테 많이 기대하셨거든.”
“아버지?”
“응. 아버지가 헌터셔.”
나는 고한결의 말을 듣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헌터라고?”
“응. 높은 등급은 아닌데, 어쨌든 전업으로 하고 계셔.”
“전업이면, 해담?”
고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담 소속의 헌터 아버지.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