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은 한없이 고요했다. 오로지 나와 유현재만이 서 있는 로비에서, 어느 곳을 둘러봐도 지켜보는 시선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유현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확인했다. 마치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내용. 누군가를 붙여두기라도 한 걸까. 기억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걸리는 사람이 있었던가? 의미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곧이어 답장이 왔다.
[한재민: 선별전 끝났나 보네.]
[무슨 개소리냐고.]
[한재민: ㅎㅎ 말 그대론데.]
[한재민: 현재랑 사이 좋아 보인다고.]
“찬희야.”
유현재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 주머니에 집어넣고 유현재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얼른 가자.”
“무슨 일 있어?”
“아냐.”
유현재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냐.”
유현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유현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한재민 쪽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
선별전이 끝난 다음 날도 어김없이 등교는 해야 했다.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거칠어진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몇 명의 아이들이 슬쩍슬쩍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의 일 때문이겠지. 나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을 베개 삼아 엎드렸다. 시끄러운 교실의 소음이 순식간에 팔 안쪽으로 가두어졌다. 물론 의심 많은 한재민의 성격상 일부러 던져 본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누군가를 시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데에 확신을 느꼈다. 만약 그렇다면 한재민이 심어 둔 사람은 누굴까.
“찬희야!”
누군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목소리였다. 몸을 일으켜 녀석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려다 말고 나도 모르게 팔을 주춤했다.
고한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불행, 시련, 악연과 필연. 이 모든 것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어찌 보면 지나치게 무해하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컨디션 안 좋아 보여.”
“그래?”
나는 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앞을 쳐다보았다.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은 좋지 않았다.
“선별전 잘했어? 뭐, 넌 잘했겠지만.”
“그냥 평소처럼 했어.”
“와. 그 말 다른 애가 했으면 진짜 재수 없었을 거 알지.”
고한결이 가방을 내려놓고 내 옆자리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나는 중간에 실수했어. 아니, 걔 생김새가 생각보다 너무 징그럽잖아. 시청각 자료로 보는 거랑 실제랑 그렇게 다를 줄 알았겠냐고.”
“아무래도 그렇지.”
복잡한 머리를 애써 잠재우며 나는 교과서를 꺼내 폈다. 조금이라도 조용한 환경이면 좋겠는데,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다소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 학년에 1급 세 명이래.”
“엥? 세 명?”
선별전의 결과는 오늘 학교 수업이 마치기 전에 통지표로 전달받을 것이었다. 급한 성격의 녀석들이 이런 식으로 유언비어가 퍼트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우리 1급 두 명밖에 없었잖아.”
“누가 등급 올린 거지.”
“와씨. 독하네.”
“어떻게 올린 거냐?”
귀가 얇은 아이들은 벌써 그 말이 기정사실이라도 된 양 수군거렸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 쳐도, 등급을 올린 1명이 누군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저 거슬리는 잡담이 사라지도록 얼른 수업이 시작되기를 바랐다.
“찬희야.”
그때 옆에서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한결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누굴까? 그 1급.”
“진짜가 맞는지도 모르는데 알아 봤자 뭐 해.”
“셋 중 하나는 너겠지?”
“그것도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알잖아.”
고한결이 속삭였다. 나는 양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몰라.”
고한결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찬희 넌데.”
*
그렇게 4교시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고한결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고한결은 몇 번 내게 말을 걸더니 결국 혼자 교실을 나섰다.
나는 아침에 고한결이 내게 했던 말이, 그로서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되뇌어야 했다. 그 이유가 편파적이든 정당하든 간에 아마 모두가 나를 1급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고한결 같은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한재민이 심어 둔 스파이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찬희야.”
이번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몇 초간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옆에는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유현재가 서 있었다.
“컨디션 안 좋아?”
“아니.”
“근데 왜 밥 안 먹어?”
“그냥. 입맛이 없어.”
나도 모르게 불퉁한 답이 나갔다. 유현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자리의 의자를 빼 천천히 앉았다.
“그래도 배고프지 않아? 너 아침도 안 먹었잖아.”
“그냥 졸려서 그래.”
나는 계속해서 유현재의 시선을 피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미묘한 방어 의식 때문이었다. 유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근원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한 거라면. 여전히 나는 유현재에게 나쁜 사람인 것이었다. 마녀가 만든 사랑의 묘약을 마신 남자가, 묘약의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지체 없이 마녀를 떠난 것처럼 나는 유현재가 언제든 다시 내게 싸늘한 눈빛을 보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어제 선별전 끝나고, 그 일 때문에 아직도 기분 안 좋은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어찌 보면 다분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물음이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가?”
“너도 내가 아버지 때문에 1급을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하냐고.”
유현재가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다 푸스스 웃었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걸린 거 맞구나?”
“대답해 봐.”
“아니.”
유현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손끝에 주고 있던 긴장을 탁 풀었다.
“넌 원래 강한 애였어.”
“아버지가 없었어도?”
“응. 없었어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유현재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냥 무조건 그럴 거란 생각이 드네.”
“…….”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 너였을 거라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도 이런 상황엔 면역이 없는 탓이었다.
“넌 진짜 그런 말을…,”
유현재의 손이 천천히 내 얼굴로 와 닿았다. 그가 천천히 내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타인의 손길이 제법 포근해서, 나는 이 간질간질한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말해 줘.”
완전히 정리된 앞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유현재가 느리게 손을 뗐다.
“매번 네 편이 되어 주고 싶으니까.”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마냥 웃으며 그러마 하고 대답할 수 없는 내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잡을 수 없는 연기 같은 말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너한테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어?”
“잘못?”
“어. 잘못이라기보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도 이렇게 내 머리를 쓸어내리며, 내 편이 되고 싶다고 말해 줄 수 있어? 나는 뒷말을 삼킨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만큼은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 없는 질문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어.”
“뭐야.”
“잘못을 했는데 용서해 달란 게 말이 안 되잖아.”
“왜 안 되는데?”
유현재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또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잘못한 걸 어떻게 용서받아.”
“용서하잖아.”
“어?”
“사람들은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잖아.”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그래. 사람은 모든 잘못을 가슴에 안고 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받기도 하고 대가를 치르며 조금씩 용서를 쌓아나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유현재에게 한 잘못은.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유찬희가 유현재에게 저지른 잘못은, 진짜로 용서될 수 있는 잘못일까? 지금이라도 유현재에게 모든 걸 털어 놓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책상 위에 핸드폰이 두어 번 진동했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한재민이나 차수현이었다면 핸드폰을 꺼 버리기라도 할 셈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알 수 없음’이라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알 수 없음: 기분 나빠.]
[알 수 없음: 언젠 죽여 버리겠다더니.]
[알 수 없음: 용서해달란 게 말이 돼?]
나는 떨리는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와 유현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교실은 지나치리 만치 고요했다. 마치 어제 한재민의 문자를 받았던 시간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현재를 마주 보았다. 유현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까.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