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고등학교의 입학식은 중학교와 비슷하게 진행됐다. 입학생들은 모두 빠짐없이 학교와 사전 면담이 이루어졌으며, 일반반과 특별 관리반 중 어디로 진학할지 정해야 했다. 마나가 남들보다 부족하거나 랭커 교육에 뜻이 없는 아이들은 모두 일반반으로 빠졌다. 특별반은 전투반과 보안반, 제조반으로 크게 나뉘었다. 고등학교 입학은 이전의 삶에서도 해봤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특별 관리반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별 관리반은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깐깐해 보이는 선생님 하나가 목청을 높여 아이들을 모았다. 아마 보안과 담당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가물가물한 그 얼굴을 괜히 열심히 떠올려 보며 이동하는 무리의 꽁무니를 따라갔다.
“안녕.”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니 웬 남자애 한 명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애는 키가 나보다 작고, 속눈썹이 길어 유순한 인상을 주는 타입이었다. 작고 무해해 보이는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오자 나는 조금 긴장이 풀렸다.
“안녕.”
“너 유찬희지?”
하지만 풀린 긴장은 쉽게 다시 조여졌다. 남자애의 명찰을 보니 ‘고한결’이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 나는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너 나 알아?”
“알지, 그럼.”
“어떻게 알아?”
“여기 있는 애들 대부분이 너 알걸.”
나는 이전의 삶에서, 반 배정을 받자마자 내 주위로 몰려들었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전투부 보안국장의 아들이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1급 랭커 꿈나무, 그리고 ‘그’ 유도현의 동생이니까. 나는 아, 하고 작게 알겠다는 듯 소리를 낸 뒤 망설임 없이 고한결을 등졌다.
“나 친구 사귈 생각 없어.”
“에이, 그래도 친해지자.”
고한결이 넉살 좋게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보아하니 하필 반도 같은 반으로 배정된 것 같았다.
“어차피 학교 다니면서 친구 한 명은 있어야 할 거 그게 나면 좀 좋아?”
나는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너인 게 왜 좋은데? 난 딱히 잘 모르겠는데.”
“너 진짜 나 몰라?”
고한결이 우뚝 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전혀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나 자체도 ‘이전’의 유찬희의 인맥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니 혹시라도 그때 연결되어 있던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한결이 진지한 표정을 스륵 풀더니 갑자기 웃으며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모르면 앞으로 알아가 주라.”
“말장난 치지 마.”
“거 장난 한번 쳤다고 되게 빡빡하게 구네.”
“나 친구 사귈 마음 없다니까.”
“그냥 그러려니 여겨.”
귀찮은 인간이 꼬였다. 원작에서도 이런 애가 있던가? 얼마 없는 소설 속 내용을 되짚어 봐도 고한결이란 인물은 없었다. 말인즉슨, 아무것도 아닌 엑스트라라는 거. 그 생각을 하니 고한결이 더할 나위 없이 귀찮아졌다. 문제는 이런 녀석이 한둘이 아니랄 것에 있었다. 소설 속 유찬희도 늘 자신의 ‘추종자’들을 등에 업고 유현재를 괴롭히곤 했었으니까.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옆에서 하루 종일 종알거리던 고한결은 선생님의 주의를 듣고서야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 못 참겠다는 듯 다시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대답했다.
“뭔데.”
“유현재 말이야.”
고한결은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이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 속삭였다.
“진짜 너희 아버지 혼외 자식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 나는 황당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한결을 쳐다보았다. 내 표정을 보고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고한결이 머쓱하게 웃었다. 무례한 질문을 한 사람치고는 굉장히 순박한 얼굴이었다.
“아닐 것 같았어.”
“고작 그딴 게 궁금해서 말 건 거야?”
“아니, 너랑 친해지려고 하는 거라니까.”
고한결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
담임은 내 기억대로 머리가 까진 대머리 아저씨였다. 간단한 조례를 끝내고 담임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중학교 때와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기 때문에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 짜증 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건 아니었다. 모여든 녀석들은 누가 봐도 내게 잘 보이기 위해 사탕 발린 말들을 내뱉어 댔다.
“찬희야, 너 전투부 부장님한테 강습 받는다며?”
“전투부도 가 봤겠네?”
“야, 당연히 가 봤겠지.”
나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웃기게도 고한결이 몸을 일으켜 떠드는 녀석들을 멀리 내쫓아 주었다. 녀석은 이미 내 옆자리를 자신의 자리인 양 차지하고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 건 그때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재민: 우리 찬희]
[한재민: 새 학교는 좋아? ㅎㅎ]
[한재민: 친구는 많이 사귀고? 우리 찬희 왕따 안당해야 할텐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속을 긁는 말이라 생각하고 답장하지 않았다. 한재민 또한 더 이상 연락은 없었다. 보통 이렇게 의미 없는 연락이 오고 나면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불안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게이트가 생길 조짐이 보이면 바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시선을 돌리다 말고 창가 구석에 앉아 있는 유현재와 눈이 마주쳤다. 책상에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현재가 싱긋 웃었다. 나는 뭐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 이쪽을 보고 난리야.
“찬희 너 유현재랑 친해?”
옆에서 스윽 얼굴을 내민 고한결이 대뜸 질문했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그러니까.”
“그야 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아니, 너랑 친구 될 생각 없다니까?”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구나.”
고한결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네가 주동해서 유현재를 괴롭힌다는 소문이 돌았었거든.”
“뭐?”
소문날 것이 없어서 남의 학교 학생들 사정까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건가. 물론 유찬희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말이다.
“너 생각보다도 더 착한 애였구나?”
“그러니까 무슨.…”
“앞으로 난 여기 계속 앉을게. 잘 부탁한다.”
고한결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괜스레 짜증이 나 맞잡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
입학식 이후에도 며칠 간 고한결의 알 수 없는 유대 표시는 계속되었다. 어찌나 친근하게 굴었던지 일방적으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고한결이 이제는 익숙할 지경이었다.
일부러 학교에선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유현재를 불러낸 것도 고한결이었다.
“너희 둘 친하다며.”
눈치 없는 대사와 함께 혼자 밥을 먹으려는 유현재를 이끌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현재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도 사실이라 더 뿌리치진 않았다.
“…학교는 어때?”
“학교?”
유현재가 난감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냥 예전이랑 똑같아.”
“그럼 또 누가 괴롭힌단 말이야?”
“어?”
“중학교 때랑 똑같다며.”
물론 중학교 때 괴롭힌 주범인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유현재가 내 말을 알아듣고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밥을 크게 한 숟갈 떠 입에 욱여넣었다.
“덕분에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데요.”
“현재 너 중학교 때 괴롭힘 당했어?”
고한결이 불쑥 튀어나와 유현재에게 질문했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 유현재가 이번엔 진짜 난감한 표정으로 고한결을 쳐다보았다.
“그런 건 아니고….”
“하긴. 찬희랑 있었으면 누가 괴롭혔겠어.”
고한결이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히 유현재는 내 옆에 있는 고한결이 크게 불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유찬희’ 때문이긴 했지만 유현재는 학창 시절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탓에 인간관계에도 몹시 서툰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설 원작에서도 첫 친구를 사귀는 데에만 책 한 권을 다 쓸 정도였으니까. 그때 사귄 친구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유현재 곁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다. 그 뒤로도 몇 명 친구를 만드는 모습이 나왔지만 아마 ‘첫 친구’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다.
“우리 학교도 1급이 딱 한 명 있어서, 엄청 인기 많았거든.”
“그래?”
“응.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서 기억해.”
고한결이 밥을 입에 넣다 말고 어, 하고 유현재 어깨 너머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쟤야.”
나는 전혀 흥미 없는 얼굴로 고한결이 가리킨 남자애를 훑어보았다. 척 봐도 체술에 적합할 것 같은 다부진 몸매를 가진 녀석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와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눈,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유현재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미남형 얼굴이라 불릴 만했다. 이쪽으로 오라며 아우성치는 친구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 녀석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격 진짜 좋아. 누구한테든 다 잘해 주고 그랬거든.”
고한결은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남자애에 대한 이야기를 읊었다. 대충 괴롭힘당하는 아이가 있으면 구해 주기도 하고, 학교 일도 열심히 나서서 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1급치곤 나와는 꽤나 다른 인간인 셈이었다. 나는 어쩐지 점점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쟤 이름이 뭐야?”
고한결이 입에 있던 밥을 꿀꺽 삼키고 물까지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천천히 대답했다.
“이주현.”
“이주현?”
“응.”
순간 이주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 식판을 쳐다보았다. 허, 하고 한숨부터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아는 이주현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소설 속 유현재의 첫 번째 친구이자 동료. 그러니까 이 소설의 또 다른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