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40화 (40/115)

40.

다음 날,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엄마를 맞이했다. 다행히 엄마는 지난밤의 일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배가 찢어진 것 빼곤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퇴원 수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병원을 빠져나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없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내게 연신 말을 걸었다.

“아, 맞아. 찬희야. 수현이가 한성 길드에 입단한다는 구나.”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큰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낯선 거리의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문득 어제 있었던 일과 이후에 꾼 꿈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엄마.”

“응, 왜?”

“현재 집에 있어요?”

“별일이네. 찬희 네가 그런 걸 물어보고. 아마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핸드폰을 켰다. 지난밤에 꾼 꿈이 나쁜 내용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해지는 기분이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메신저를 켜니, 아니나 다를까 한재민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한재민: 우리 찬희]

[한재민: 퇴원 했어?]

[우리 얘기 할 거 있지 않아?]

[한재민: ㅋㅋ 무섭게 왜 그래]

[잔말 말고]

[지금 바로 만나]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스러운 말투를 쓰는 한재민에게 짜증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려 차창을 내렸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흩어졌다.

*

“찬희 왔네?”

한재민은 테이블에 발을 올린 채, 일회용 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비서의 안내를 받고 방으로 들어선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커피가 입에 들어가냐?”

“못 마실 건 뭐래.”

“길게 얘기하기 싫으니까 빨리 말해.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까먹었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쟤는.

“아직도 의심 중인 건가?”

“찬희가 착각하는 게 있네.”

한재민이 빨대로 마지막 남은 커피를 쪽 빨아들인 후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컵을 던져 버렸다. 채 녹지 않은 얼음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원래 난 사람을 못 믿어.”

“네가 인간 불신인 게 내 알 바는 아닌데, 이런 건은 적어도 나한텐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묻는 거야.”

“결론적으로 괜찮았잖아?”

“괜찮았다고?”

“어차피 게이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건 당연했고.”

“…….”

“유현재가 능력 각성한 것도 확인했고. 완전 일석이존데.”

어느새 유현재의 각성까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역시, 헌터들 중에 한재민이 부리는 사람이 있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마나가 없을 때도 어마무시했던 놈이 마나까지 각성했는데.”

“…….”

“어때? 소감은?”

“그딴 걸 왜 묻는 거야. 좋겠어?”

한재민이 호탕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애치곤 게이트 밖에서 조우할 때 제법 애틋하던데. 둘이.”

“멋대로 넘겨짚지 마.”

나는 일단 경계했다. 한재민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어디까지 관찰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유현재와 다시 가까워졌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유도현을 만나 보아야 했다. 알 수 없는 이 세계로의 빙의와 수많은 죽음의 진실을 죽은 그는 분명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아직까지 내겐 한재민이 필요했다.

“찬희야, 너 혹시 유현재 좋아해?”

자기가 생각하고도 웃긴지 한재민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제어하기도 전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나는 대답했다.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아, 미안. 내가 사춘기 졸업한 지 꽤 돼서 그런가. 도저히 이팔청춘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돼서.”

“내가 묻는 것에만 대답해.”

“대답해 줬잖아? 난 원래 아무도 안 믿어.”

“그럼 앞으로 나랑은 일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 돼. 찬희는 아직 너무 어리다니까.”

한재민이 테이블에 올렸던 발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여유로우면서도 한껏 짜증이 묻어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거래란 건 원래 서로를 믿고 하는 게 아니야.”

한재민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로 무게를 실은 것도 아닌데 금방이라도 땅에 꺼질 것 같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거래로 인해 나올 결과만을 믿고 가는 거지.”

내 귀에 속삭이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느낌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할 수만 있다면 몸을 털어내고 싶었다. 나는 겨우 참고 대답을 뱉어냈다.

“이해했어.”

“역시. 어린애들 중에선 제일 똑똑해.”

커피 마실래? 한재민의 권유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한재민은 거래에 대한 지론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 이면에 분명히 다른 의도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따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퇴원하고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어딜 돌아다닌 거냐.”

“잠깐 친구 만나고 왔어요.”

아버지는 읽고 있던 신문을 접고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김 부장과 훈련은 계속할 수 있고?”

“네. 문제없어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졸업까지 했으니 입학과 동시에 치러지는 선별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선택한 길이야.”

“네.”

“포지션을 바꿨다고 등급이 떨어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럴 일 없어요.”

나는 계속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꼬박꼬박 해 주었다. 아버지는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안경을 쓰고 신문을 들었다. 잔소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빠르게 다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버지는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천천히 하고 싶은 질문을 꺼냈다.

“김 부장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가까워지시게 된 거에요?”

아버지는 신문을 바라보며 수 초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 조바심이 나려던 찰나, 굳게 다물려 있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왜 궁금한 거냐?”

“그냥 계속 생각했던 거예요. 제 개인 과외를 해 줄 정도로 아버지와 가까우신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아버지는 다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신문의 페이지가 천천히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혹시… 김 부장님은 원래 뭐 하시던 분이었어요?”

“모른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한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혹시 회사에 김 팀장이란 사람도 있었어요?”

아버지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반응을 하나하나 모두 확인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너는 내가 전투부에 얼마나 오랜 기간을 있었는지 알면서도 그런 걸 묻는 거냐?”

“물론 많겠죠. 제가 여쭤 보는 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 그럼….”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김구현이 죽인 김 팀장이란 사람이 궁금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용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스템이 보여준 그 기억이 온전한 사실인지조차 아직까지는 확신이 들지 됐으니까.

“너도 인터넷에 떠도는 이상한 루머 같은 것들을 믿고 싶은 거냐?”

아버지는 더 이상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더는 뭔가를 알아내지 못하고 거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김구현이 누군가를 죽였고, 그것이 아버지의 지시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나는 뭘 할 수 있을지 사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살인을 한 직후의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게이트에서 봤던 김구현은 일말의 가책도 없어 보였다. 헌터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유현재 또한 살인을 한 직후 미쳐가던 그때와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지는 때가 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방에서 나오는 유현재와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나를 보고 유현재가 작게 웃었다.

“퇴원 축하해.”

“고작 하룬데 축하는 무슨.”

유현재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금박이 덧입혀진 푸른색의 졸업장이었다. 나는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졸업장을 받아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고마워.”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너 각성한 거.”

“응.”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왜?”

나는 가장 쉬운 변명을 끌어와 유현재의 앞에 늘어놓았다.

“아버지가… 알면 조금 귀찮아질지도 몰라.”

유현재가 가만히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안. 괜히 이런 말 해서.”

“아냐.”

유현재가 어른스러운 미소를 내비쳤다. 순간적으로 어젯밤 꿈에 나왔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은 그때보다 조금 더 작고, 마르고, 숫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멀지 않은 미래에는 꼭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런 꿈을 꿨다는 자체가 조금 민망해졌다.

“너 아직도 키 크고 있어?”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유현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

나는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물어봤어.”

“그냥?”

“어. 그냥.”

유현재가 눈꼬리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좋네. 그냥이라는 말.”

“뭐가 좋냐.”

“계속 그냥 얘기했으면 좋겠어.”

그 언젠가의 우리처럼. 나는 뒷말을 멋대로 생각한 뒤 마주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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