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39화 (39/115)

39.

나는 대답 대신 유현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현재가 내 손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다소 뻔뻔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일으켜 줘.”

손을 재차 흔들자 유현재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 손에 무게를 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현재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녀석을 올려다본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가자.”

“지금?”

“치킨 먹고 싶어.”

나는 침대 옆에 있던 조그만 장롱을 열어 겉옷을 꺼냈다. 겉옷 아래에는 내가 입고 왔던 교복이 가지런하게 개켜져 있었다. 나는 상의는 내버려 두고 바지만 꺼낸 후 유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갈아입을 건데 계속 볼 거야?”

“아, 아니.”

유현재의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큭큭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나가도 돼.”

옷을 갈아입고 나서 우리는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당직을 서는 간호사들과 잠들지 못한 환자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와 유현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병원 밖 풍경이 눈앞에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묘한 해방감이 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유현재도 별반 다르진 않았던 건지 온통 까만 사방을 보면서도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열일곱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비로소 열일곱 애들 같다고. 나는 유현재를 뒤로하고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찢어졌던 배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뛰지 마. 찬희야, 너 다쳤잖아.”

“하나도 안 아픈데?”

가로등이 켜진 거리는 우리를 제외하곤 사람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뛰던 나는 불이 켜진 작은 치킨집을 발견했다. 브랜드도 없는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이었다. 금방 내 뒤를 따라온 유현재가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최대한 앳된 티를 숨기려고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흘끗 우리를 쳐다보곤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나는 신난 얼굴로 메뉴판을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신중하게 주문을 마치자 유현재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냅킨과 포크를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유현재를 마주 보았다.

“너 내가 다른 사람이 몸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잖아.”

“응.”

“진짜면 어떡할래?”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어봤으므로 유현재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유현재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어봐야지.”

“뭘 물어봐.”

“왜 들어갔냐고.”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거 아닌데요.”

“그래요?”

유현재가 경계 없이 푸스스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바로 직전 죽기 전 삶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나는 괜스레 민망해져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물어볼 거.”

“뭔데?”

“새로운 찬희는 왜 유현재한테 잘해 주는 건데요?”

“잘해 준 적 없는데요.”

“왜 매일 유현재만 보면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봤던 거예요?”

“…….”

“이렇게 물어볼 것 같아.”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와중에, 타이밍 좋게 치킨이 나왔다. 기름 냄새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크를 들었다.

“왜 예전에도 이런 걸 했던 것 같지.”

질문이 아니었지만, 유현재의 중얼거림은 마치 내게 던지는 물음 같았다. 나는 치킨을 한 조각 찍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실제로 했으니까.

우리는 매일 이런 사소한 일탈을 하고, 서로의 취향에 맞춰 음식을 사 먹곤 했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치킨을 먹으며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했나 보지, 뭐.”

*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유현재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입구에 도달했을 때쯤, 나는 몸을 홱 돌려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냅다 내가 하고 싶은 말부터 내뱉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뜬금없는 내 말에 유현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 게 맞아.”

“아.”

“그러니까 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돼.”

나는 내가 한 마디를 하면 유현재가 열 마디의 이해를 해 주길 바랐다. 이기적인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말하는 것 중 절반이 거짓말이더라도, 그중 진실을 알아보고 날 진심으로 대해 주길 바랐다. 어떤 생애의 유현재는 그렇게 해 주었고 어떤 생애의 유현재는 그렇게 해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열 번째 생애까지 이렇게 유현재를 향해 웃어 보일 수밖에 없는 건, 역시 감정이라는 간사하지만 깊은 단어로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감정. 어쩌면 내가 아홉 번이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감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근데 찬희야.”

유현재가 짧고 깊은 정적을 깨고 내게 대답했다. 지금 맞이하고 있는 밤처럼 부드럽고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감정의 이유를 찾을 거야.”

그런 말을 하는 유현재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낯이었다. 나는 뭐라 대답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말을 꺼내게 된다면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내 생각에 모든 감정엔 이유가 있는 것 같거든.”

울컥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입술을 짓씹느라 입 주변이 모두 새하얘졌다.

“…그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긴 내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

매 생애마다 포기하지 않아 줘서.

*

그날 밤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쩐지 미묘하게 낯설었다. 지금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긴 나는 입고 있는 재킷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집 또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나는 천천히 방을 돌아보았다. 옷장이 있고 그 옆엔 내가 보고 있는 거울이 있으며, 두꺼운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나는 이 방의 주인이 두 명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더블 사이즈의 큰 침대는 아직 정리를 하지 않아 이불이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였다. 내가 침대로 천천히 걸어가자,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누군가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찬희야.

잔뜩 졸린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유현재였다. 유현재 또한 나처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그 얼굴은 웃기게도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투정을 부렸다.

-조금만 더 자자.

-안 돼.

나는 단호하게 유현재의 팔을 밀어냈다. 유현재가 살짝 삐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유현재의 몸은 열일곱 살 때와는 다르게 제법 건장하고 덩치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유현재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고 어르듯 말했다.

-지금 안 일어나면 늦는단 말이야.

-알겠어.

아마 우리는 어딘가에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유현재가 침대에서 내려와 똑바로 서자 순식간에 내가 올려다보는 꼴이 됐다. 도대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얼마나 더 큰 거야. 원래도 큰 키였는데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유현재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그대로 내 어깨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목덜미에 미지근한 숨이 닿았다 흩어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나 딱 세 시간 잤어.

-구 팀장님 진짜 너무하네. 신입을 이렇게 굴리고.

-그니까. 찬희 네가 좀 혼내 주라.

나는 피식 웃었다. 유현재도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아는지 여전히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뭔가를 우물거렸다. 유현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간 동안 나는 침대를 정리했다.

-내가 할게!

유현재가 칫솔을 입에 문 채 뛰쳐나와 말했다.

-빨리 준비나 끝내.

고개를 끄덕인 유현재가 다시 욕실로 걸어갔다. 나는 이불을 정리하다 말고 배어나오는 따뜻한 향에 코를 묻었다.

빠르게 준비를 끝낸 후 집을 나섰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금의 내가 전혀 본 기억이 없는 고급 빌라였다. 여기서 제법 오래 산 건지 나와 유현재는 익숙하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우리가 탈 차를 찾아냈다.

-오랜만에 집 가는 거 같은데.

-그러게. 뭐라도 사 가야 하는 거 아냐?

-뭘 사. 집에 부족한 게 없는데.

-아버님 좋아하시는 술이라도 사 갈까?

유현재가 핸들을 돌려 지하 주차장 입구로 차를 천천히 몰며 물었다.

-안 돼. 아버지 인간적으로 술을 너무 많이 드셔.

-그런가? 그건 네가 그냥 술 상대를 너무 많이 해드려서 아니야?

-그러는 너도 장난 아니잖아.

우리는 가볍게 티격태격대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날씨는 나무랄 것 없이 맑고 화창했다. 나는 자동차의 창문을 반쯤 내리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긋하게 맞았다. 따뜻한 봄 냄새가 났다. 유현재 또한 나를 따라 차창을 내렸다. 나는 뒤늦게 누군가에게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형이네.

-벌써 도착하셨나 보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형? 형이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꿈을 꾸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유찬희에게 살아 있는 형이란 게 존재할 리 없는데.

차는 곧 터널로 진입했다. 입구에서 보는 것보다 터널의 내부는 상당히 길고 어두웠다. 주위에 차는 아무것도 없었고 어쩐지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유현재는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이상할 정도로 긴 터널을 끝없이 달리던 와중에, 시선의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유현재에게 얼른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지의 누군가는 이쪽을 등진 채 터널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체격과 외형을 봤을 때 그는 남자였다. 차 소리를 들은 건지 남자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남자의 이목구비가 모두 날아갔음에도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직감할 수 있었다.

유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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