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2차 선별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선별전 이전에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귀찮은 행사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졸업식엔 참가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히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교복을 꺼내 가정부 아주머니께 다림질을 부탁했다.
유현재는 오늘도 등교를 했다. 아마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연습만 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현재의 능력이 얼마나 근사한지, 소설의 내용을 아는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삶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그랬다. 한 길드를 통째로 상태 이상에 걸리게 할 정도의 능력이니 그 규모도 상당할 것이었다. 나는 우습게도 그 모습이 보고 싶었다. 검을 제 몸의 일부처럼 사용하며, 가뿐하게 상대를 베어내는 유현재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쩐지 그 상황이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찬희야.”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 건너에서 들려왔다. 엄마였다.
“들어오셔도 돼요.”
엄마가 천천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엄마의 이런 표정은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직전의 삶에서, 유현재가 사라지고 혼자 남았을 때 병실에 있던 내게 지어 준 표정과 비슷했다. 아마 말하려는 내용도 비슷할 거였다.
“수현이가 곧 귀국한다는구나.”
“아.”
“찬희는 어릴 때부터 수현이랑 친했잖니.”
“뭐….”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며? 혜련 씨한테 들었어.”
“네. 가끔이요.”
“귀국하는 날에 직접 가서 맞이해 주면 어떻겠니? 좋아할 것 같은데.”
차수현이 좋아할 것 같다고?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데요?”
“졸업식 바로 다음 날이야.”
“네. 시간 비워놓을게요.”
엄마는 할 말을 끝내고도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찬희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아직 조금씩 쓰라린 감이 있었지만, 상처는 거의 아문 상태였다.
“혹시 형 때문이니?”
“네?”
엄마의 표정은 착잡했다.
“네 형이 그렇게 되고… 아버지도 걱정이 많았어.”
“걱정이 많으셨다고요?”
“그래, 알다시피 네 아빠는,”
“헌터셨죠.”
“…….”
“전향하신 이유가 형 때문이라면.”
“…….”
“유감이에요. 저는 형 때문이 아니거든요.”
“찬희야.”
“엄마, 전 형이 아니에요.”
유도현의 동생이란 꼬리표는 정말 끈질기게도 나를 괴롭혀왔다. 내가 빙의하기 전 유찬희 또한 유도현의 흔적을 겨우 따라가는 것이 다인, 그저 그런 인간이었을까? 만약 실제 유찬희가 원했던 삶도 오로지 유도현을 똑같이 답습하며 쫓는 것뿐이었다면 이제 유찬희가 된 나 또한 순순히 그래 줘야 하는 걸까? 왜 유찬희의 모든 행동은 유도현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왜.
*
도착 예정 시간을 삼십 분이나 넘기고서야 차수현은 입국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잔뜩 뒤틀린 얼굴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다니던 그 모습이 아니라 그랬던 걸 수도 있었다. 차수현은 염색기 없는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채 핸드폰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옆에 서 있던 차혜련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이쪽을 발견한 차수현이 캐리어를 무겁게 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 조카!”
차혜련을 가볍게 안아 준 차수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이번 생에서 차수현을 실제로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어떤 스탠스로 그를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행히 타이밍을 놓친 내 밍숭맹숭한 반응은 차수현에게 그다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닌 듯 했다.
“찬희랑 수현이는 거의 십 년 만에 만나는 거던가?”
“그죠.”
“어떻게 둘이 계속 연락을 하면서 지냈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혜련의 시선을 피했다. 조카가 반정부 단체와 내통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차혜련도 이렇게 태평하게 웃을 순 없을 것이었다. 차수현은 능숙하게 화제를 넘기며 차혜련과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타기 직전, 차수현이 내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표정 풀어, 미친놈아.”
차수현은 아무렇지 않게 험한 말을 해놓고 홀랑 차에 올라타 버렸다. 나는 약간 황당하다고 생각하며 뒷자리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찬희야, 다음 달에 2차 선별전이지?”
“네.”
“수현이한테 도움받으면 되겠다.”
“네?”
“왜, 이래 봬도 수현이 펜타곤 출신이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차수현의 미국 생활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 생애를 통틀어 귀국 후 차수현, 혹은 어린 시절 차수현밖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의 차수현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말없이 내가 살고 있던 집에 찾아오곤 했었다. 채 정리하지 못한 유도현의 방에서, 차수현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다 돌아갔다. 처음 한두 번은 궁금증, 서너 번은 의심, 이후론 완벽한 확신이 섰다. 게다가 이 관계는 소설에 드러나지 않는 철저한 뒷얘기이므로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차수현 본인조차 모를 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첫 번째 삶에서야,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이 사실을 말했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와 차수현은 더 이상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무언가를 위해 협업하고 있는 사이였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조금 즉흥적인 대답을 툭 내뱉었다.
“가르쳐 주면 저야 좋죠.”
“어머.”
차혜련이 잘됐다는 듯 운전대를 탁 쳤다. 차수현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형한테 배울 점이 워낙 많기도 하고요.”
“배울 점?”
“그렇잖아. 유학에도 관심 있어, 나.”
“찬희 유학에도 관심 있었니?”
“네. 아무래도 헌터로는 늦게 시작한 거다 보니까요. 배우고 싶은 게 많아요.”
“수현아, 네가 꼭 찬희 좀 도와줘.”
차수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부모님 말을 듣는 다섯 살 꼬맹이 같았다.
“그나저나, 수현이 넌 무슨 길드 갈지는 정했고?”
“글쎄요.”
“한국에서도 그냥 해담 쪽으로 빠지지 그러니?”
해담은 전투부에서 운영하는 공식 길드였다. 말이 길드지, 여기에 몸담는 랭커들은 그냥 공무원이나 다름없었다. 입단 허들도 낮고, 안정적이라는 장점 때문에 주로 랭킹이 낮은 랭커들이 들어가 머릿수를 채워 주곤 했다. 많은 돈을 벌거나 랭커로서 명성을 얻고 싶은 이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곳이었다.
“전 딱히 권력 욕심 없어서.”
“와, 우리 조카 많이 시건방져졌네.”
해담이 상위 랭킹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전투부 특정 직급에 올라가고 싶거나, 정치에 뜻이 있는 경우 반드시 소속되어야 했으므로. 반대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뜻이 없을 시 매력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이 되었다. 실제로 해담은 항상 길드 랭킹에서 4~5위, 최악의 경우엔 10위권에 머무르곤 했다.
“하긴, 어린애들은 아무래도 해담에 들어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
“알면서 제안하셨어요?”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전투부 입사.”
모든 랭커들은 전시가 닥쳤을 때, 전투부 지휘 아래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 보호를 제1의 의무로 져야 한다. 즉, 공식 길드가 아닌 사단 길드에 속해 있더라도 랭커라는 이름을 단 이상 모두 국방의 의무가 1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해당 문구가 절대적으로 공인된 사회에서 전투부는 꼭 우수한 랭커들을 자신의 산하에 둘 필요는 없었다. 한성이 몸집을 불릴 수 있었던 이유도 해담의 이 오만한 발상 때문이었다. 한재민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가 국방을 1순위로 두진 않으니까. 그걸 이용한 거라고.
“장난이고 한성에 가려고요.”
“한성?”
차혜련이 의외라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의외에요? 국내에선 제일 큰 길드잖아요.”
“그야 넌 군인 쪽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으니까.”
“딱히 흥미 없어요.”
한성에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한재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한성 길드는 한재민의 부모님이 설립한 길드로 현재 길드장은 한재민이 맡고 있었다. 한성의 이면에 크러시가 있는 거고 크러시의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한성이 존재했다. 즉, 두 집단은 각각 양지와 음지에 있는 한재민의 수족과도 같은 단체였다.
“한성, 요즘 소문이 안 좋아.”
“네?”
“유 회장님이 후원을 끊는단 소리도 있고.”
“무슨 소리예요. 한성 자체를 한 회장 부부가 만들었던 건데.”
“지금은 결국 유 회장의 회사란 거지.”
나는 시니컬하게 미소 지었다. 그 유 회장은 제대로 된 회장 대접도 못 받는 허수아비이며 진짜 회사를 굴리고 있는 것은 모두 한재민인 걸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알아서도 안 될 것이고. 나는 유현재가 얼마나 강해지길래 전투국 국장도 모르는 이 사실을 바로 알아채고 한성을 박살 내는지가 궁금했다.
“뭐, 그게 진짠지 직접 가입해서 알아보고 올게요.”
차수현의 제법 뻔뻔한 대답에 나와 차혜련이 동시에 웃었다. 서로 뜻이 다른 웃음이었지만 나는 대충 차혜련의 의도에 내 웃음을 맞춰 주었다.
*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한성 털어 주겠다 이런 말을 지껄였다고?”
한재민이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차수현은 조금 불퉁한 얼굴로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래서 얼마나 털어 가실 건데요.”
“장난 그만 치시죠.”
차수현이 포크로 찍은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살펴보다가 이내 내가 앉아 있는 이 장소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누가 봐도 완벽한 레스토랑의 모양새였지만 내부는 지나치게 한산했다. 애초에 이런 모임을 목적으로 만든 곳이거나, 혹은 앞으로 그렇게 만들 곳이겠지.
“찬희는 다쳤다길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
“졸라 아파.”
“뭐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아주 짓이겨져서 왔네.”
“그 정돈 아니거든.”
“야, 수현아. 그거 아냐? 얘랑 유현재 둘이 전투부 지하에서 싸웠다.”
“뭐라고?”
차수현이 쨍강 소리를 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는 뭐 어쩌라고 하는 얼굴로 차수현을 마주 보았다.
“왜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거지?”
“기억을 잃어버렸대.”
“뭔 개소리야?”
“약 때문 아닌가 싶은데.”
그 말에 차수현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문자로 내게 약쟁이라 놀리던 차수현을 떠올렸다. 한재민은 아,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나이프를 들이밀었다.
“약 먹는 날!”
“칼부터 내려놓고 말해.”
“나같이 약 때 맞춰서 잘 먹여 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너희 엄마도 안 그럴 듯.”
한재민이 뒤에 서 있던 ‘삼촌’에게 턱으로 뭔가를 지시했다. 곧이어 수저 앞에 약봉지 하나가 놓였다. 나는 평범하게 약봉지를 뜯다 말고 이어지는 한재민의 말에 주춤했다.
“그래서, 약 먹고 공부는 열심히 돼가고?”
“꼰대냐, 진짜.”
“공부 안 하면 약 먹는 이유가 없지.”
“한다고.”
나는 봉지를 찢어 그대로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함께 마신 물의 뜨끈한 기운과 함께 쓴맛이 혀끝에 감돌다 사라졌다. 일전에 약을 먹었을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이걸 섭취하면 몸에서 이상 반응이 올라온다. 어지러워지는 시야에 눈을 세게 감았다 뜨니 이젠 초점도 맞지 않기 시작했다.
“제대로 공부 안 했구나?”
“…피곤해서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단 걸 잘 알 텐데.”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강령술의 기초]를 봤던 마지막을 떠올렸다. 실제로 이 세계에서 스킬을 익히기 위해서는 기초를 익히고 공부를 해야 했지만, 망할 시스템의 장점 아닌 장점이라 하면 스킬을 익히는 객관적인 수치를 숫자로 증명해 준다는 것에 있었다. 일전에 처음 책을 편 이후로 딱 한 번 더 본 적이 있으니 고작 20%. 약이 몸에 받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나는 급기야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장실.”
“토하지 마.”
내가 문 쪽으로 달려가자 서 있던 남자 몇 명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놔요.”
“30분.”
“이거 놔.”
“약물 흡수될 때까지만 참아~”
자연스럽게 풀리는 다리 때문에, 졸지에 남자들에게 기대는 꼴이 됐다. 나는 억지로 몸에 힘을 줘 의식을 붙잡았다. 한재민은 무감한 얼굴로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린 채 말했다.
“그 약 구하기도 어렵다고.”
나는 결국 구역질을 참으며 계속 식사 자리에 함께 앉아 있어야 했다. 완벽한 도구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