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나는 보호용 장갑을 낀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빳빳한 재질 탓에 손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습 전투나 다름없었는데도 장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천천히 전투장 한가운데로 온 김구현이 나와 유현재를 살폈다. 유현재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진 않았다. 나는 차라리 우리가 눈을 마주쳤다면 전투에 임하는 데 조금은 더 힘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나와 유현재는 김구현의 지시에 따라 두 발자국 정도 걸어 나왔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이내 날렵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고 나는 빠르게 근처 폐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김구현에게 요구한 것은 유현재와의 모의 전투였다. 유현재와의 싸움을 직접적으로 요청한 건, 아마 대외적으로는 두 가지 의미로 보일 것이었다. 첫 번째, 유찬희는 유현재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다. 두 번째, 무능력자 유현재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존심 강한 유찬희가 평생을 무시해온 유현재를 라이벌로 삼았다는 걸로 보아 아마 보통의 힘은 아닐 테다. 김구현이 만약 이전 생처럼 유현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이 흥미로운 사실을 놓치고 싶지 않을 터였다.
물론 이유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 전투를 통해 결론적으로 총 네 사람을 속일 예정이었다. 지금 막 나와 전투를 시작한 유현재도 그중 한 명에 속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전투는 매우 진지하고 치열해야 했다.
나는 적당히 건물의 뒤에 숨어 시간을 끌다 유현재를 기습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유현재는 아직 각성하기 전이므로, 아무리 체술에 능통하더라도 나를 이기기엔 무리였다. 그런 생각으로 벽에 몸을 바짝 붙였을 때였다. 가까이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불어온 쪽에서 유현재가 빠른 속도로 기척을 드러냈다. 나는 당황하기에 앞서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건물 안쪽으로 깊이 숨었다.
유현재는 내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거침없이 급습해왔다. 체술의 장점은 현란한 몸동작으로 상대의 급소를 여러 방면에서 노릴 수 있다는 것에 있었고 유현재는 그 장점을 너무나도 잘 이용했다. 나는 들고 있는 무딘 검으로 유현재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며 폐건물 가장 안쪽, 정체 모를 서재까지 들어왔다. 조용한 방 안이 곧 살과 쇠붙이가 부딪히는 미묘한 소리로 가득 찼다.
순식간에 책이 쏟아지며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책들을 겨우 피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여기서 유현재에게 밀리면 안 됐다. 한 방을 노려야 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현재를 건물 밖으로 유인했다. 김구현의 시야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검에 일정 수준 이상의 검기를 불어넣었다. 당연히 반칙이었다. 유현재도 눈치챈 건지 살짝 놀라며 티 나게 눈을 키웠다. 검기가 가득 들어찬 검을 휘두르며, 나는 유현재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김구현을 살폈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검을 들어 유현재의 어깨 쪽으로 내리찍었다. 유현재가 유려하게 몸을 피하며 내 팔을 잡아 꺾었다. 몸이 뒤집어진 틈을 타 유현재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등을 빗나간 검은 힘없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왜 제대로 안 찔러.”
유현재가 입꼬리를 올린 채 비아냥거렸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지면에 엎어졌다. 손에서 빠져나간 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 표면을 타고 날아갔다. 세게 떨어진 터라 통증으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유현재가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탄 채 팔을 옭아맸다.
“그만해.”
내가 숨을 몰아쉬며 중단을 외치자, 유현재가 흠칫하며 내지르려던 주먹을 멈췄다. 나는 그 공백을 놓치지 않고 유현재를 도발했다.
“많이 강해졌네.”
“누구 덕분에.”
“누구 덕분일까.”
“말장난하지 마.”
“더 강해지고 싶지 않아?”
유현재가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로지 상대의 허점을 노리기 위한 의미 없는 지껄임이었다.
“한번 죽어 봐.”
“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뭐라는 거야.”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
유현재의 아귀힘이 순간 느슨해졌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발에 힘을 줘 유현재의 다리를 걷어찼다. 유현재의 힘이 풀린 틈을 타 몸을 굴린 나는 멀리 떨어져 있던 검을 빠르게 잡아챘다.
“찔려 줄래?”
유현재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프지 않게 해 줄게.”
“미쳤구나, 너.”
“어.”
“…….”
“어떻게 알았지.”
내가 소리 내어 웃자, 유현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검을 고쳐 잡고 유현재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유현재의 팔에 검을 스치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재가 신음을 삼키며 팔을 쥐고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흩어진 붉은 피를, 나는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미친놈 칼맛 보니까 어때.”
“그만해.”
“아니.”
“…….”
“그만할 수 있었으면 나도 그만했어.”
그제서야 뒤늦은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이제 그만하시죠.”
유현재가 멀리서 걸어오는 김구현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칼에 검기를 가득 불어넣은 채 유현재의 가슴을 향해 휘둘렀다. 유현재가 채 피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해온 상황이었지만 나는 내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정말 나쁜 얼굴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며 나는 유현재와 눈을 맞췄다. 칼이 막 유현재의 심장을 관통하려는 그때, 같은 극의 자석이 맞붙은 것처럼 손이 강하게 튕겨져 나갔다. 엄청난 압력이었기 때문에 저항할 틈도 없이 내 몸은 건물 벽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등에 강한 통증이 일면서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현재는 제가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마 자신에게서 이러한 힘이 나온 것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서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삼키지 못한 침과 함께 기침이 터져 나왔다. 김구현이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는 동안에도 유현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겨우 일단락되고 나서야 김구현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찬희 군은…. 도대체 왜….”
“…….”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게 다예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김구현을 노려보았다.
“그게 다냐고요.”
“……”
“제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김구현이 표정을 굳혔다. 옆에 서 있던 유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검을 내팽개치고 다시 주저앉았다.
“뭐. 됐어요. 저 봐주신 거니까.”
“따로 보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위험하셨습니다.”
“그걸 이제 와서 말씀하시는 김 부장님은 어떻고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아직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하지만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내 눈빛을 받아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내가 유현재에게 소리쳤다.
“축하해.”
“…….”
“죽지 않고 강해졌네.”
그 말을 끝내고서 나는 유현재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부디 내가 벌인 이 행동이, 시스템에겐 그저 ‘대외적인’ 행동으로만 보이길 바랐다. 이 전투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계획한 것이니까.
*
집으로 돌아온 나와 유현재는 엄마의 경악에 찬 표정을 그대로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호들갑을 떨며 내게 다가와 병원에 가야 하지 않냐며 재차 물었다. 겉보기엔 팔을 다친 유현재가 나보다 더 심각해 보였을 텐데 말이다. 아버지 또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등의 통증은 여전한 게 아마 큰 멍이 들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나는 겨우 손에 힘을 주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나야.”
-못 죽였나 보네?
한재민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역시 찬희는 아직 애송이라니까.
“너한테 들으니까 아는데도 기분 구려.”
-애송이인 거 인정하는 거야?
“인정하면?”
-철들었다고 칭찬해 주려 했지.
“철들면 좋은 거라도 있니.”
-음, 재민이의 칭찬?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뭔데.
“좀 다쳤어.”
-네가? 아니면, 유현재?
“나.”
-네가 더 다친 거야?
“어.”
-의외네.
“…그래서 선별전까지는 쉬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준비해둔 요점을 꺼냈다. 한재민에게 유현재와의 대결을 미리 통보해둔 건 그걸 핑계로 조금이라도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한재민은 웃는 낯으로 사람을 감시하고 조일 줄 아는 인간이었다. 유현재가 강해질 것을 직감적으로나마 미리 느낀 것 또한 한재민이 유일했다. 원작에서 한재민은 매일같이 유찬희를 부추겨 유현재를 견제하고 시험에 들게 했다. 나는 최소한 선별전 전까지는 그런 강압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
“못 나으면 선별전에서 힘도 못쓰고 하급이나 받을걸.”
핸드폰 너머의 한재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유현재가 그렇게 강해졌다고?
“몰랐던 거 아니잖아.”
한재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선별전까지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싱겁게 통화가 끝났다. 나는 그제야 핸드폰을 내던지고 침대에 몸을 눕힐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조용한 방 안을 두려워하게 됐다. 고요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대개 생각은 고통스러운 과거들을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는 영사기 같은 존재였으므로 끊으려 해도 마음대로 끊을 수가 없었다. 강제로 재생되는 일련의 기억은 고작 멍이 든 등보다도 훨씬 아팠기 때문에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의식의 점멸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잠이 들면 또 다른 괴로움이 수마가 되어 나를 덮쳐오곤 했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또다시 습관적으로 눈가가 시큰거려오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연 문 너머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알 수 없는 얼굴의 아버지를 마주해야 했다.
“모두 들었다.”
“김 부장님도 참 빠르시네요.”
“그깟 체술 쓰는 놈 하나 못 이기고 이렇게 다쳐서 온 거냐?”
내게 아버지는 유현재와의 전투를 감행한 마지막 이유였다. 유현재가 무의식중에 능력을 발현했다는 사실을 김구현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나는 능청스럽게 아버지의 말을 받아쳤다.
“아버지도 참 여전하시고요.”
내 단조로운 어투에 아버지가 눈썹을 찡그렸다.
“격려, 위로. 이런 건 부모의 의무 아니던가요?”
이 거대한 연극 속에서 가장 잘 짜여진 인물이 있다면 아마 이 사람이겠지. 틀이 정해져 있는 뻔한 아침드라마 같은 대사를 내뱉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헛웃음을 내뱉던 나는 등을 찌르는 통증에 강제로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싶었지만 아직 남은 대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내어 다음 말을 쥐어짰다.
“고작… 체술 쓰는 애잖아요.”
“…….”
“이번 기회로 확실히 알게 됐으니 이제 질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체술만 쓰는 유현재라면요. 마지막 대사를 삼키고서 나는 방문을 닫았다. 아마 유현재가 방 안에 있다면 이 대화는 빠짐없이 모두 들었을 것이었다. 그제야 제대로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잠들진 못했다. 악몽을 꾸면 대개 깨어 있는 것보다 더 피곤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