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순식간에 모든 배경이 원 상태로 돌아왔다.
“김 부장에겐 가까운 시일 내로 훈련 날짜 잡으라고 말해 놓으마.”
“…감사합니다.”
나는 뒤돌아 거실을 빠져나갔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빗어 정리한 머리와, 머리칼 아래로 빛나는 눈빛. 콧날. 입술과 턱.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몸. 단정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유현재는 그새 정말 남인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기다렸어.”
유현재가 말했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물었다.
“왜?”
바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으나 유현재는 살짝 머뭇거렸다.
“…못 끝낸 이야기가 있으니까.”
“응.”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기묘한 대치였다. 전투부 견학 이후로 미묘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유현재가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어디… 다녀왔어?”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질문이 이거였다. 나는 한재민을 만나고 온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아는 사람.”
“아.”
“…왜?”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어.”
“별일이네. 네가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고.”
차근차근 대답하던 유현재의 얼굴이 더 혼란스러워 보여 나는 더 질문하기를 그만뒀다. 나는 이 현상을 알고 있다. 음악실 앞에서 유현재가 나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던, 바다를 걸으면서 잊지 않기 위해 다짐했던 나날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유현재가 이 혼란을 딛고 기억을 꺼내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우리의 끝이 어떻게 될지 또한 잘 알고 있다.
때때로 뻔한 결말은 우리에게 포기가 아닌 오기를 가져다준다. 모든 경우의 수에서 ‘행복’이란 값은 찾을 수 없었다는 걸 아홉 번의 삶을 통해 깨달았음에도 나는 항상 포기보다는 뭔가를 얻기 위해 노력했었다. 지금의 유현재는 그런 상태인 걸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의 내게선 찾을 수 없는 용기다.
“너도 잘 모르겠단 거 알아.”
“…….”
“나도 내가 뭔지 모르겠거든.”
“…….”
“그리고 우린 그런 걸 일일이 알 필요가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유현재는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집요하고 조금 감정적인 눈빛이었다.
“너 뭔가 알고 있지.”
“아니.”
“진짜야?”
“어.”
이번엔 내가 자신 없는 대답을 하고 유현재의 눈을 피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유현재를 지나쳤다. 막 2층 거실에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단단한 손길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거짓말이지.”
“아냐.”
“알고 있어.”
“아니야.”
“뭔가가 있어. 분명히.”
유현재는 확신에 찬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유현재가 어떤 것을 기억했기에, 혹은 어떤 것을 알아냈기에 이렇게 말하는지 몰랐다.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무모하게 던지는 건지도 몰랐다.
“없어.”
그래서 두려웠다. 고작 소설 속 인물이라 생각하기에 유현재는 늘 변수를 만들었다. 모든 게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매번 실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유현재가 유일하게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아직.”
유현재는 내 어깨를 더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아직은… 기다려. 조금만 더.”
유현재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까의 확신은 어디로 갔냐는 듯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치 스스로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어떤 생각이나 자아를 누르는 사람처럼 몹시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지 마.”
나는 유현재의 손을 잡았다. 잔뜩 힘을 줬던 것에 비해 손은 의외로 쉽게 내 몸에서 떨어졌다.
“괴롭게 만들지 마.”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
“그냥 원래 해 오던 대로 하면 돼.”
나는 결국 유현재를 두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직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현재와 눈이 마주쳤다.
*
김구현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본인의 밑에서 훈련을 하겠다고 한 게 자의인지도 궁금한 눈치였다.
“사실 아버지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긴 하겠지만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버지처럼 헌터에서 실더로 전업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뭐, 그렇죠.”
“반대긴 해도 저도 그런 상태고.”
“찬희 군은 계속 실더 과정을 밟았다고 했는데,”
어지간히 궁금한 눈치였지만 나는 그걸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것 자체를 삼갔다. 김구현은 아버지의 측근이니까. 나는 그에게서 전투 기술을 배우며 조금씩 뒤를 캐 볼 계획이었다. 한재민에게 말한 것은 ‘아버지의 수족을 자르기 위해서’이고, 사실은 그가 왜 나를 죽였는지 알아보려고.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투부 지하엔 랭커들이 훈련할 수 있는 훈련장이 있었다. 주로 국가 공인인 해담 길드원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제1 훈련장의 컨셉은 ‘도심’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가짜인 게 티가 날 정도로 소품 구성이 잘 되어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커다란 신호등 몸체를 만지작거리며 대충 소품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김구현이 가지고 있던 케이스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전혀 날이 서 있지 않은 칼입니다.”
김구현은 직접 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실제로 장검은 전혀 날이 있지 않은 쇳덩어리에 가까웠다.
“검기를 불어넣어야만 제 기능을 하는 거죠.”
“검기라는 건 결국 마나의 실체화고요.”
내 정석적인 대답에 김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몇 시간의 연습 끝에 대충 검기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검기를 불어넣는 것 자체는 마나가 있는 사람인 이상 어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몇 시간 만에 해낼 수 있단 건 분명 큰 재능이었다.
“역시 재능이 뛰어나시네요.”
“검이잖아요.”
검기는 헌터의 필수 능력 중에서도 가장 저난이도에 속했다. 물론 이 검기의 강도를 조절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헌터 자신의 자질에 달렸다. 유도현은 A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도 한 번에 죽일 수 있었으니 가히 천재라 할 만했다.
“일단 연습용 몬스터를 내보내겠습니다.”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많은 생애를 살았지만 헌터 훈련을 제대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삶은 실더로 살았고 어떤 경우엔 아예 능력을 사용하길 피한 적도 있었다. 손에 살짝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가오는 가짜 몬스터에 집중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나는 검기를 넣은 검을 바닥에 세게 내리찍은 후 그 반동으로 넓게 점프했다. 연습용 몬스터는 느렸지만 확실히 목표를 인지했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몬스터의 외양은 언젠가의 꿈에서 본 A급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징그러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몬스터의 후면으로 뛰어가 칼을 박아 넣었다. 칼은 절반 정도 몸체에 들어가다 멈추었다.
김구현이 몬스터의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치고는 정말 잘하셨습니다. 운동 신경이 좋으시네요.”
“하지만 실전에선….”
“죽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구현은 칼에 벌어진 몬스터의 살갗을 살펴보았다.
“검기의 조절도 부족했지만 아직 실더의 습관이 남아 계셔서 그렇습니다.”
“실더의 습관이란 게 뭐죠?”
“보호가 공격보다 먼저인 것.”
김구현은 내가 꽂은 칼을 뽑아낸 후, 나에게 조금 더 멀리 떨어지라 지시했다. 몬스터가 다시 움직였다. 김구현은 정면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를 피하지 않고, 바로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장내에 커다란 알림음 소리가 나며 몬스터가 쓰러졌다.
“정면을 두려워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쓰러진 몬스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을 두려워하지 말 것. 의외로 김구현에게서 배울 것이 많았다. 나는 몇 시간 동안 헌터로서 몸에 익혀야 할 것을 직접 교육받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2차 선별을 치르기 전에 헌터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기에 일정이 빠듯했다. 유현재는 이미 체술은 물론이고 스스로 어느 정도의 능력 또한 인지했을 터였다.
*
훈련장을 나오니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나는 김구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미 대기하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찬희 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김구현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찬희 군은 분명 재능이 있으니 힘내십시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그 가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다시 차로 향했다.
“씨발….”
구역질 나는 가증스러운 새끼. 나는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