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구현. 나이는 마흔여섯. 소속은 전투부. A급 헌터 출신으로 10여 년 전 보안국장의 비서로 시작해 현재 보안국 총책임 부장 자리를 맡고 있음.
나는 김구현을 찍은 사진 몇 장과, 그의 가정사에 대한 쓸모없는 정보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한재민에게 물었다.
“아버지랑 일한 지 10년 정도 된 건가?”
“서류상으론.”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버지와 김구현이 함께 대외 활동을 하며 찍힌 기사 사진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인상 좋은 아저씨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 모습이 꺼림칙했다. 두 번. 두 번이다. 총 열 번의 삶 중 두 번을 그와 마주쳤고, 그 손에 죽었다. 나이로만 따지자면 그 일 또한 정확히 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번 삶의 여덟 살을 직접 겪어 보지 못했기에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삶이 예측할 수 있는 소설 속 내용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 이면의 것이 전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세이브 이전의 삶은 내 것이 아닌 ‘진짜’ 유찬희의 삶으로 진행되었다. 진짜 유찬희는 그때처럼 김구현과 만난 적이 있을까? 만났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밥 다 식겠다.”
한재민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서류를 보는 데만 신경을 쏟는 나에게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아는데도 참 징그러울 정도로 그런 척을 잘했다.
“찬희 생각해서 나만 아는 비밀 가게에 데리고 온 건데.”
“이런 국밥집이 뭔 비밀 가게야.”
“여기만큼 대단한 곳이 없는데.”
한재민이 낡은 가게 내부를 훑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본인의 위치에 맞지 않는 헝클어진 머리, 캐주얼한 옷차림이 얼핏 보면 평범한 대학생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가게를 살피던 한재민이 팔을 뒤로 뻗어 몸을 기울인 자세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정보는?”
“…그냥.”
“원하는 대답은 얻었어?”
“…….”
“내 말은.”
“…….”
“그런 걸 계속 가져다주면 우리가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겠냐는 말이야.”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지만 속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참 웃기게도 나는 내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는 확신 하나로 한재민이 원하는 답변을 해 줄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 한 무리의 중년 남성들이 가게로 들이닥쳤다. 막 등산을 마친 건지 은은한 땀 냄새를 풍기며 그들은 메고 있던 짐들을 가게 한구석에 쌓아 두었다. 나는 한재민이 주었던 서류를 가방 안에 집어넣고 수저를 들었다. 식어버린 국물은, 식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끔찍하게 맛이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재민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맛있냐?”
“그러엄.”
나는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한재민 앞에 놓인 그릇을 살펴보았다.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넌 어디 하나 정상인 데가 없구나.”
“찬희한테 들으니까 색다르네.”
나는 이번에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반찬을 조금 집었다. 조심스럽게 입에 넣자마자, 염전에 입을 담근 듯 짠맛이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다.
“너 그러면 섭섭해한다.”
우웩, 하고 물을 마시는 나를 보고 한재민이 일부러 섭섭한 시늉을 했다.
“맛없는 걸 어떡하라고.”
“삼촌이 정성스럽게 아침부터 끓인 건데.”
삼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홱 고개를 들어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주방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웃긴 몰골을 하고,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폐건물에서 한재민과 같이 있었던 그 남자였다.
“개그해?”
“아니.”
“아니면 여기….”
“눈치 빠르네.”
한재민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우리 회사 자금 조달하잖아. 여기 국밥 팔아서.”
한재민이 쿡쿡 웃으며 숟가락으로 그릇을 쳤다. 이거 오백 그릇 팔아서 회사 차렸잖아. 나는 그 장난질에 결국 참지 못하고 한재민에게 숟가락을 던졌다.
“성질머리 봐.”
“집에 갈래.”
“다 안 먹으면 삼촌이 안 보내 줄걸.”
한재민의 말을 무시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 찰나, 옆 테이블의 남자 한 명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아마 그 등산 무리의 회장인 모양이었다.
“자, 일단 여러분, 더 좋은 곳에 모셔야 할 분들을 여기 앉아 있게 해서 죄송하지만, 일단 할 말은 해야겠지요.”
한재민은 어느새 식탁 위로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은 한 해는 많이 바쁠 겁니다.”
한재민이 손을 뻗어 내 팔을 툭툭 쳤다. 내가 슬쩍 돌아보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살짝씩 남자들을 가리키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들 말이야.”
뭔가 비밀스러운 말이라도 하려는 듯 한재민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누구일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너 뉴스 안 봐?”
나는 한재민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위해 그의 표정을 계속해서 살폈다.
“뭐, 다 우리 회장님이 데리고 온 인간들이지만.”
회장이라 하면 크러시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한성 길드의 후원 재단인 한성 그룹의 회장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얼마 전 한재민을 따라 갔던 곳 또한 한성의 가장 큰 계열사 중 하나인 회사였다. 한재민이 웃으며 다시 턱을 괴었다. 나는 그제야 앉아 있던 남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지만, 분명 기사에서 몇 번 본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단순히 ‘정부개혁군’이라는 범주에 한재민과 그 주변인만을 집어넣었던 나는 그제야 조금 이 현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유현재와의 관계 속에 갇혀 괴로워했던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시스템이 운영하는 이 거짓말 같은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넓어졌다.
만약 이곳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가려 한다면.
한재민이 몸을 일으켜 남자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원래부터 한재민이 있던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 주었다. 나는 술을 받아 마시던 한재민과 눈을 마주쳤다. 한재민은 단순히 내게 그들을 소개해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용해 하여금 나를 압박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얄팍한 술수로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찾아보려 했던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았다.
*
아버지는 주문 제작한 고급 가죽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깔린 러그와 실내용 슬리퍼가 마찰하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적막을 채워 주었다. 아버지는 신문 한 면을 다 읽은 후에야 끼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벗고 나를 쳐다보았다.
“전투국 견학이 제법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모양이더구나.”
“네.”
“그래. 김 부장한테 배우는 건 나쁘지 않지.”
“들으셨나 봐요.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있나. 네가 정하는 거지.”
나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김 부장님께 직접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 전에.”
아버지는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주 짧은 행위였는데도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걸어놓은 듯 느릿했다. 신문 위로 안경까지 내려 두고서야 아버지는 다시 입을 뗐다.
“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하다.”
“……생각.”
나는 그에 대답하려 목에 힘을 주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배경이 익숙한 단색으로 뒤덮이더니, 지직거리는 효과와 함께 글자가 뜨기 시작했다.
[유찬희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유규환은 순간 하나 남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보았다. 유찬희는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했다.
“반드시 1위 랭커가 될 겁니다.”
유규환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이 말은 이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아들이 언젠가 자신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단단하게 내뱉었던 말이었다.
“가능할 것 같으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네.”
유찬희의 시선이 중심에서 점점 벗어나, 목표를 알 수 없는 허공을 향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지?”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물음에 유찬희는 다시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없애면 됩니다.”
“……”
“장애물을.”
“…….”
“제가 직접.”]
나는 그 발췌된 문단들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대답이 늦어지면 무언가가 잘못될 거란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한 박자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언제 막히기라도 했냐는 듯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드시 1위 랭커가 될 겁니다.”
“가능할 것 같으냐?”
나는 여전히 잿빛에 가까운 배경을 바라보며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지?”
나는 잿빛의 세상 속에서, 역시나 잿빛인 아버지를, 아니 아버지의 역할을 맡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며 응답했다.
“없애면 됩니다.”
그는 눈썹 한쪽을 위로 올리며 다음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응해 주었다.
“장애물을, 제가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