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는 신경질적으로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잡았다. 엄청난 무게였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사위와 사막 같은 황량한 장소,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 있는 공간의 모양까지. 여기는 게이트 안이었다. 겁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게이트 안에 들어온 나는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발소리조차 죽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잔뜩 화가 난 듯 온몸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분노를 몸으로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기분을 가라앉혀 보려 하기도 전에 멀리서 커다란 몬스터 떼들이 달려왔다. 보라색 피부에 진득한 점액들이 들러붙은 그 몰골은 생각보다도 더 무지막지했다. 나는 능숙하게 검을 고쳐 잡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분명 저 정도 되는 몬스터 떼라면 A급 이상의 헌터들이 한 팀으로 가야만 처치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아는 듯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온몸 가득 내려앉은 이인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검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아주 섬세하면서도 강력한 컨트롤이었다. 단전에서 감돌고 있는 응축된 힘이 검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 번에 몬스터 여러 마리가 나동그라졌다.
한 박자 쉴 틈도 없이 사이드에서 들어오는 둔한 공격을 가볍게 피한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조금 더 광범위한 공격이었다. 아주 손쉽진 않아도 물 흐르듯 순조롭게 몬스터들은 죽어갔다. 마지막 공격은 검을 쓰지 않고 직접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머리가 한 번에 터졌다.
몇 번이고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인 양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 혼란스러운 피바다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가 전멸한 몬스터 무리들의 머리를 우지끈 떼어내고, 그들의 심장에서 붉게 빛나는 원석 같은 것을 맨손으로 꺼냈다. 필요한 것들만 모아 캐리어에 담은 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게이트 출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주변은 온통 인공적인 느낌뿐인 검은 하늘이었는데도 나는 무슨 은하수가 보이는 시골 어느 마당에 온 것처럼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 냄새만 났지만, 그렇지만 이젠 이 잔인한 냄새가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차라리 이것만 맡으며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그만 점이 나타나더니 허공에서 회오리치며 커지기 시작했다. 바깥의 풍경이 블러를 먹인 것처럼 흐리게 보였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그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게이트 밖에는 이미 기자들이며 리포터,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포진해 있었다. 분명 게이트는 랜덤하게 생성되는 터라 일반적인 방법으론 알 수도 없을 텐데. 참 신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 사이를 걸어갔다. 응대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한산한 곳으로 가 전투국이 보내 주는 차를 기다릴 참이었다.
-A급 게이트를 혼자 클리어하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국내 최초이신데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나는 귀찮다는 듯 살짝 손을 저었다. 익숙한 반응이었는지 기자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슷한 질문을 던져댔다.
-2위인 차혜련 헌터와 차이가 더 벌어졌는데 혹시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지금 전투국에서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께도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대응하던 내가 처음으로 싸늘하게 시선을 던졌다. 기자들은 그 시선에 흥분한 것 같았다.
-팬들에게도 한마디!
-이번 포상금도 기부하실….
나는 대꾸할 가치도 없어져 더욱더 빠르게 그들을 밀치고 나아갔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러왔다.
도현 씨! 여기 한 번만요! 도현 씨….
*
나는 눈을 떴다. 다행히 이번에는 식은땀을 흘리거나, 숨을 몰아쉬고 있진 않았다. 이런 꿈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나는 방금 꾼 꿈을 조금 더 ‘허구의 상상’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랬어도 유도현에 이입되는 꿈은 끝이 좋지 않거나 찝찝했다. 나는 익숙한 무늬의 이불을 보고 내 방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리고 훅 끼쳐오는 낯설지 않은 향기.
“일어났네.”
유현재가 침대 옆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체온계와 땀을 닦아 준 마른 수건. 아마 유현재는 내 간병을 한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뛰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무감한 그 얼굴을 보고 유현재가 누군가의 뜻으로 여기에 억지로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고마워.”
유현재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툭 질문했다.
“왜 이러는 거야.”
“뭐가.”
“무슨 생각으로….”
“……”
“잘해 주는 거야, 아니면 잘해 주는 척하는 거야?”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건조해진 두 눈엔 눈물 한 방울조차 고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뭐?”
나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내 마음이야.”
내 마음.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닌 와중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컨트롤할 수 있는 내 마음. 어차피 짜여진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저 그 안에서 존재의 의의조차 사치인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조금이라도 온전히 내 것일 수 있는 마음.
“이것도 안 돼?”
그것까지 하지 말라 하면 잔인하잖아.
“…모르겠어, 아직.”
“몰라도 돼.”
“너 혹시 다른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해도 돼.”
“왜 나 전투국 가는 거 반대 안 했어?”
이 질문에는 멈칫했다. 의도가 무엇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네가 전투국에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아니면 내가 반대하지 않은 그 자체가 이상했던 건가. 하지만 유현재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최대한 눈감아 주고, 그러다 가끔 이렇게 우울해질 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뀌지 않을 정도로만 마음을 꺼내 살펴보고. 그러다가 그냥 짜여진 대로 얘 손에 죽으면 됐다. 그게 이상적인 플롯이었다.
유현재가 나가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최근 대화에 뜨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름 석 자를 누른 뒤, 간단하게 내 할 말만 전달했다.
[사람 좀 조사해줘.]
[한재민: 찬희 또 갑질 지랄병 시작이네]
이름은 김구현. 전투부 보안국 부장이야.
*
오픈카는 춥다. 차수현 옆자리 이후로 이렇게 불편한 조수석은 처음이었다. 어쨌건 서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난 건데 한재민은 자동차 윗대가리를 몽땅 열어놓고 태연하게 드라이브나 해댔다. 정부 체제를 다 뒤엎어버리고 지들 걸로 만들려는 반정부 단체 대장치고는 제법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어디 가.”
“뭐~라~고~?”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한재민이 내 쪽으로 귀를 들이밀었다. 나는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아 그냥 침묵했다. 한재민은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우곤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맛있는 거 사 주러 가지.”
이거 봐. 이미 들었다니까.
“너랑 뭐 먹겠다고 한 적 없는데.”
“우웅, 뭐라고, 찬희야?”
온 힘을 다해 한 대 치고 싶은 걸 참았다. 나는 결국 그냥 한재민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어느 산 초입부 외진 곳에 위치한 국밥집이었다.
“여기 국밥에 소주 한 잔 때리고 등산하면 얼마나 좋게요. 찬희 먹어 봤어?”
“너 잡혀가 볼래?”
“아, 맞다. 찬희 학생이었지.”
너무 갑질하길래 난 형인 줄 알았네. 한재민은 정말 계획해놓은 것처럼 연신 내 신경을 거슬렀다.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유현재한테 목이나 따이고 대번 서열 정리 되는 주제에. 좀 유치한 생각을 하니 우습게도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물어봤던 거나 대답해.”
“그 전에.”
한재민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질문했다.
“정보 수집의 목적을 말씀해 주셔야죠.”
“아버지 측근인 게 마음에 안 들어.”
한재민의 한쪽 눈썹이 산을 만들며 올라갔다.
“찬희는 참 웃기단 말이야.”
“뭐가.”
“그렇게 사랑받고 자랐으면서 왜 아버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현재는 사랑 받고 싶어도 못 받는데 말이야.”
“너한테만 이득이면 된 거 아니야?”
“뭐, 결론적으로는.”
나는 아까부터 한재민이 들고 있던 얇은 서류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것도 꼴에 정보라고, 데이터로 받는 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천천히 내용물을 꺼내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