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누군가 준비한 선물처럼 유현재의 얼굴이 보였다.
-찬희야.
유현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너무나도 다정한 그 목소리에 차마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유현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점 내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눈 아래서부터 울컥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내 서로의 손끝이 가볍게 맞닿았다. 나는 온몸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그에게 왜 이제야 다정해진 거냐고 원망의 말을 쏟아낼 준비를 했다. 유현재가 먼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미안해.
-…….
-미안해, 찬희야.
진심 어린 사과의 말에 나는 차올랐던 눈물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의 덤덤한 목소리로 자연스레 대답이 나왔다.
-나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잠에서 깼다.
*
몇 번의 생애 중 가장 곤욕스러운 식사 자리였다. 나는 밥을 깨작거리며 입맛이 없음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네 명이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내 불편함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없이 계속 식사를 이어 나갔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유현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사가 끝나 갈 때쯤 아버지는 본론을 꺼냈다. 장황했지만 결국 2차 선별전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유현재가 체술을 마스터했단 걸 이미 알고 있는 내가 슬쩍 눈치를 보며 먼저 대답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크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난 네가 재능만 믿고 설치는 한심한 부류가 아니길 바란다.”
내가 작게 조소했다.
“재능 없으면 시작조차 못하는 게 이 바닥인데요.”
어머니가 슬쩍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아마 내가 유현재를 노리고 비꼰다고 생각한 듯했다. 오히려 반대였지만 나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시험 전에 센터에 한번 오거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활발히 활동 중인 직업 랭커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옆에서 유현재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식탁 분위기가 대번에 미묘해졌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숟가락질을 했다.
“괜찮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유현재가 나를 쳐다보았다.
“혼자 가긴 좀 부담스러울 것 같거든요.”
“뭐가 부담스럽니, 아버지 직장인데.”
“특혜니 뭐니 그런 말 듣기 거북하잖아요.”
“…….”
“너도 괜찮지? 서로 쌤쌤이잖아.”
유현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을 암묵적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유현재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유현재에게 가장 큰 삶의 목적은 다른 것보다도 절대적인 힘이며, 그것을 위해선 자존심 같은 것은 모두 굽힐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란 걸 알았다.
목적이 뚜렷했던 식사를 마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을 폈다. 책의 내용은 뻔했다. 강령술의 기원과 네크로맨서의 본질, 언데드의 치명적인 약점. 책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강령술은 금지되어야 할 주술이며 언제나 주의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마 그런 목적으로 처음부터 쓰인 책이었겠지만 글쓴이에게 민망할 정도로 내 목표는 명확했다.
풀이할 수 없는 의문점들이 계속해서 쌓여 가는 와중에,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유도현밖엔 없었다. 그때였다.
<중급 기술 ‘강령술의 기초’를 시작하였습니다. 최초의 소환까지 약 10%>
나는 그 무미건조한 글자들을 표정 없이 쳐다보았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이 기술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이 시스템이 원하는 어떠한 결말의 핵심적인 사건일 것이니까.
<세이브 하실 수 있습니다. 세이브 하시겠습니까? (2/3)>
“안 해.”
<세이브를 주기적으로 하여 데이터를 안전하게 지켜 주세요!>
“지랄.”
세이브를 해도 마음대로 조작해 놓으면서 데이터는 무슨 데이터. 나는 제멋대로 구는 시스템에 더 이상 감정을 실어 대응해 주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과의 소통을 단절하려던 와중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어차피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했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는… 소설 속이야?”
<알 수 없는 질문입니다.>
“네가 여기로 날 데리고 온 거잖아.”
<가능하지 않은 기능입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뭐, 순순히 본인의 정체를 밝혀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도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이곳이 소설 속이고 여기 있는 존재들이 정말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거라면 도대체 이 세밀하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어떤 언어를 써야만 표현이 되는 걸까.
*
전투국은 도심의 외곽에 존재했다. 언제든 테러를 받을 수 있는 장소였기에 시민들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했다. 딱히 특이할 것 없이 평범하게 지어진 건물엔 정부 기관마다 흔히 있는 커다란 로고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역시나 보안 때문이었다. 유현재와 나는 아버지가 집까지 보내 준 차에서 내린 뒤, 말없이 입구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직장에 가족을 들이지 않았기에 나는 전투국 건물 자체도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와 유현재 사이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나와 함께 있다는 자체가 힘들 녀석에게, 내 존재감을 드러내는 짓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전투국 정문에서 가볍게 달려왔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누가 봐도 점잖은 인상의 고위직 직원이었다.
“보안 국장님 부탁 받고 왔습니다. 유찬희 군 맞으시죠?”
“아, 네.”
“따라오시죠.”
남자는 입구로 향하는 동안 우리에게 한 장씩 명함을 나누어 주었다. 보안국 총책임 부장 김구현. 나는 어쩐지 익숙한 그 얼굴과 조금 특이한 이름을 되뇌며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전투부는 크게 전투국과 보안국으로 나뉩니다.”
김구현이 1층 로비에 있는 커다란 층별 안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투국은 차혜련 국장님이 맡고 계시고요.”
“네.”
나는 언젠가의 어린 시절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하게 웃던 여자를 기억했다.
“보안국장은 찬희 군의 아버님이 맡고 계시죠.”
김구현이 상냥한 표정으로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정부 기관답게 모든 내부 디자인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2층 휴게실, 3층 대회의실을 지나 4층부터가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었다. 보안 국장실은 가장 꼭대기 층인 10층이었다. 우리는 바로 아버지에게 가지 않고 각 층별로 상세히 안내를 받을 것이라 했다.
2층 휴게실 한쪽에는 작게 차려진 추모 공간이 있었다. 실전에 투입되는 직원들이 많은 만큼 그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라 했다. 나는 한쪽 벽면에 잔뜩 쓰인 이름들 중 어렵지 않게 유도현을 찾을 수 있었다.
“도현 씨는 다재다능한 분이셨죠.”
김구현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유도현에 대한 추억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많이 차가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형이 그런 성격이었나요?”
질문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 김구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수 초간 고민하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뭐, 유독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기도 하네요.”
김구현이 쓰게 웃었다. 나는 김구현을 보고 익숙함이 들었던 이유를 퍼뜩 깨달았다.
“혹시 뭐 동생이나… 다 큰 자식 있으세요?”
조금 무례한 질문이었다. 유현재도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김구현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동생도, 자식도 없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그 얼굴과 너무 닮았는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이 정도 나이인지라 자식이 있을 법도 하지만요.”
아. 그래, 나이.
나는 김구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주 오래 전, 여덟 살의 나에게 칼을 꽂고 웃은 그 남자가 나이 든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이 여기 있을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