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24화 (24/115)

24.

때맞춰 유현재가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내가 등교한 것을 본 유현재는 조금 놀라더니, 이내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더러워진 책상을 익숙하다는 듯 슥슥 닦아버리고 유현재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 존나 더러운데 그냥 앉네.”

“근데 잘 어울리지 않냐?”

“뭐가 쓰레긴지 모르겠네.”

딱 봐도 불량해 보이는 몇 명이 폭언을 퍼부었다. 유현재는 묵묵히 그들을 무시하며 책상 아래로 손을 넣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유현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손 넣지 마!”

유현재는 물론이고 반에 있던 아이들까지 내 큰 소리에 놀라 조용해졌다.

“책상 서랍에… 손 넣지 말라고.”

나는 아까보다 좀 데시벨을 낮추었지만 여전히 단호하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 유현재가 눈을 내리깔고 아래를 보더니, 천천히 책상 앞으로 기울여 안에 있던 물건들을 쏟아냈다. 몇 권의 교과서 사이로 부러진 커터칼 심들이 함께 떨어졌다. 여전히 괴롭히는 방법이 거기서 거기서인 꼬맹이들이었다. 뭔가를 바라고 그에게 주의를 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현재가 다치는 걸 막아냈다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찬희 진짜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쟨 또 찬희한테 빚졌네.”

아까까지만 해도 유현재에게 독을 내뱉던 녀석들이 내게 와서 천연덕스럽게 칭찬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유현재가 그저께 말했던, 집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던 말이 대충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열 번째 삶’의 유현재는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악마였다. 겉으로는 유현재를 옹호하고 동정하면서 입으로 누구보다 잔인한 가시를 만드는 최악의 방관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유현재에겐 이미 믿음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선생님 오시겠다. 자리로 가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이브 전 과거들이 모두 ‘원작’에 맞춰져 세팅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결같이 차분한 얼굴을 유지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원작이든, 바로 직전에 내가 만들어낸 삶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유찬희와 유현재는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다 끝나야 한다.

나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필기가 잔뜩 쓰인 칠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이 학교에서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나는 결국 3교시가 끝나고 반장에게 일러둔 뒤 교실 밖을 나섰다. 유현재가 슬쩍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따로 반응하진 않았다. 아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다친 다리가 유독 더 아파진다는 생각을 하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어, 찬희~”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교문 앞에는 편한 옷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한재민이 서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옆에는 학교의 경비 아저씨가 서 있어 단둘이 마주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학생, 아는 사이야?”

경비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아마 일이십 분 실랑이를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한재민의 눈치를 보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라니까 못 믿으시네, 정말.”

나는 경비 아저씨가 좀 더 단호하게, 아는 사이더라도 출입은 허용할 수 없다며 그를 내쫓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저씨는 도리어 한시름 놓은 듯 개운해진 표정으로 나와 한재민을 두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땡땡이?”

“…아파서.”

“그치. 너 분명 졸업할 때까지 학교 안 간다고 했었잖아.”

“어. 앞으로 안 가.”

“그래, 계속 다닌다고 하면 진짜 죽여 버리려고 했어.”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재민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날 죽이려는 것들이 많은데 이 나이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신기했다.

“네 나이대 애들은 학교에서 너무 실수를 많이 하거든.”

“…걔네랑 다르니까 걱정하지 마.”

“글쎄~ 여자 친구라도 생기면 또 모르지.”

한재민이 친절하게 제 차 옆 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의 말없는 강제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아직도 못 믿어?”

“원래 이 자리는 의심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

한재민이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을 벗어 앞으로 안은 뒤 의자에 편안히 앉았다. 가방은 책이 없어서 힘없이 흐늘거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여 가방 위로 얼굴을 묻었다. 파우더 룸에 놓여 있던 향수를 살짝 뿌린 탓에 코끝에선 유현재의 냄새가 계속 돌았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안정시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와, 못됐네, 찬희야.”

한재민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네 형 향수 훔쳐서 뿌린 거야?”

“…뭐?”

“진짜 개쓰레기 같은 생각인데 너무 좋네?”

한재민은 내 손에서 거칠게 가방을 뺏더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 어쭙잖게 대답했다가는 저번 같은 일을 겪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개입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인 세계의 조그마한 세부 사항들은 도저히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전생에서의 유현재 향기. 하지만 유도현과 같은 향수. 나는 불현듯 첫 번째 죽음 직전의 차수현의 대사가 떠올랐다. 형과 똑같은 향수. 나는 향수를 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뿌린 향수 냄새를 맡는 건 좋아해도, 내 몸에서 그런 냄새가 나면 너무나도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게서 향수 냄새가 난다면,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한 몸같이 지낸 유현재에게서 향이 묻어 나온 거라면. 그러니까, 유현재와 유도현이 똑같은 향수를 썼던 거라면.

“…유현재가 좋아하는 향이야.”

한재민은 진심으로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악마네, 악마.”

나는 감흥 없는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아, 한 번 더 죽으면 배우나 도전해 볼까.

“유현재는 아직도 너네 반 왕따야?”

“왜 시비지.”

“어린애들이란 참 무섭구나~ 싶어서.”

“네가 할 말인가?”

“찬희는 그 중에서 제일 무섭고.”

“헛소리할 거면 조용히 해 줄래.”

“없애고 싶은 놈이 있어요, 랬나?”

나는 티 나지 않게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걔만 없으면 인생이 좀 더 편해질 거예요, 랬지?”

한재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 나의 시니컬한 대답들이 왜인진 몰라도 그에게 적당히 신뢰를 안겨 준 듯했다.

“그런 자세 좋아해. 나는.”

“악당 같은 대사네.”

“찬희만 할까?”

“…존나 쓰레기 같네.”

나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재민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찬희는 내가 봐도 쓰레기야.”

응. 생각보다 더 쓰레기네, 유찬희라는 이 미친 새끼.

*

우리는 점심시간이 막 시작되어 북적북적한 광화문 거리 어딘가의 건물 앞에 내렸다. 어제와 같이 으슥한 곳으로 갈 것이라 짐작했는데 오히려 너무나도 반대인 장소에 온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놀라든 말든 한재민은 나를 지나쳐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떨어질세라 나 또한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로비에는 제법 그럴듯한 안내 데스크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우리가 데스크 쪽으로 가자 직원들이 익숙하게 한재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작 서른 정도 된 한재민이 이사라 불리는 걸 보니, 아마 이곳이 크러시의 본거지이자 한재민 쪽이 운영하는 회사인 모양이었다.

“세 시간 동안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마.”

유니폼만 아니었더라면 잘 교육받은 군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직원들은 일사불란했다.

“올라가자.”

나는 괜히 교복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한재민을 따라갔다. 이렇게 큰 회사 건물에 교복을 입고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사방이 투명하게 보이는 커다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수십 초, 우리는 바로 건물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비서 몇 명이 문이 열리자마자 인사를 했다. 이쪽 역시도 데스크처럼 잔뜩 각이 잡혀 있었다. 이쯤 되니 무슨 대학생처럼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온 한재민이 대단해질 지경이었다.

“저놈의 이사 이사, 할배 같아서 싫다는데도 불러대네.”

“…이사니까 이사라 부르겠지.”

“회사라는 곳을 다녀 본 적이 없는데 웃기지 않냐? 굳이 따지자면 행동 대장이지.”

“그럼 행동 대장 시켜 주세요 하든가.”

한재민이 커다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실제로 방 안쪽에 있는 책상의 이름패에는 한재민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다. 아마도 외부에 노출되는 회사의 모습과 내부에서 굴러가는 조직이 따로 노는 모양이었다.

한재민이 주머니에 있던 봉투 하나를 내게 던졌다. 손바닥만 한 흰 봉투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약봉지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나는 단번에 이 약이 유찬희의 검은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짐작하자마자 나는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진짜 믿나 보네. 주는 걸 보면.”

“어차피 가짜 찬희면 그거 먹고 개병신 돼버릴 텐데 뭐.”

“말하는 꼬라지.”

나는 순순히 납득한 후 약을 먹기 위해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지금 내게 놓인 길은 이 약을 먹는 것뿐이었다. 정수기 옆에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원목 책장이 있었다. 책장 한 칸엔 가족사진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작은 꼬마가 한재민임을 바로 눈치챘다. 어떤 걸로 눈치챘냐면, 더럽기 짝이 없는 그 눈빛 때문에. 내가 사진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봤는지 한재민이 소파에서 몸을 틀어 내게 얘기했다.

“찬희가 내 뒤통수치는 거면,”

나는 뒤돌지 않은 채 천천히 눈만 굴렸다.

“유도현 대신 우리 부모님 불러내서 찬희 지옥으로 끌고 가 버린다.”

“뭐래, 미친….”

한재민이 하하 웃었지만 썩 재밌어 보이진 않았다.

“아, 그렇게 되면 우리 부모님이 형제 둘을 죄다 죽여 버리는 거네.”

형제 둘, 나는 이것이 나와 유도현을 칭하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책장 위 멈춘 시간 안에서 웃고 있는 세 사람 중 하나 이상이 유도현을 죽인 진짜 범인이자 유현재를 시련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존재라는 거였다. 유현재의 시련. 그건 곧 내 지긋지긋한 불행의 원인과도 똑같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쏟아지는 의문의 사실들을 끼워 맞추기엔 내 정신은 이미 동강 나고 부서진 지 오래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괴팍하고 배려 없는 진실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진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겨우 대답했다.

“그래. 믿을게.”

한재민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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