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23화 (23/115)

23.

한재민은 여전히 웃기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려운 와중에 나는 한재민 또한 역시 이 소설의 악역답게, 유찬희만큼이나 더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 세계는 빌어먹을 원작에 너무나도 충실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겼지?”

“…기억을 드문드문 잃어버렸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흔해빠진 변명이었다. 한재민과 중년 남자 또한 그렇게 느끼는 듯했다. 한재민이 조롱하듯 물었다.

“아, 혹시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나? 아니면 가난한 여자애랑 사랑에라도 빠졌어?”

“장난치는 거 아닌데.”

“그렇다기엔 너무 전형적인 드라마 같잖아, 네 말.”

한재민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발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목구멍이 짓눌리며 숨통이 조여왔다. 나는 컥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나는 다급하게 원작의 내용을 되짚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구난방으로 퍼진 머릿속의 줄거리들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도현….”

나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일단 유도현의 이름이 나오자, 한재민의 힘이 조금 풀렸다.

“소환하기로 했잖아.”

한재민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집요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런 한재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나한테 그 책 준 거고.”

“…어떻게 아는 거지, 네가?”

“내가 유찬희니까.”

“그건 또 어떻게 믿고?”

“내가 죽으면… 너희 조직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을 텐데.”

한재민이 하, 하고 작은 실소를 터트리더니 이내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몸에 올라와 있던 발이 어느샌가 다시 물러났다. 나는 구둣발에 쓸려 상처가 난 목을 만지며 숨을 헐떡였다. 한재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아직 낫지 않은 다리에 통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았지만, 언제 또 기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멀쩡한 척해야 했다.

“싸가지 없고 똘망똘망한 걸 보면 찬희가 맞긴 한데. 그쵸 삼촌.”

아마 저 중년 남자와 한재민은 삼촌 조카처럼 가까운 사이이거나, 실제 혈육인 것 같았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한재민의 삼촌은커녕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었다. 나는 대충 눈치로 그가 한재민의 가까운 수족이라 판단했다. 삼촌이라 불린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여전히 나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일단 오늘은 보내지.”

‘삼촌’의 말에 한재민이 살짝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오로지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냥은 못 보내고.”

한재민의 말에 다시 발걸음이 멈췄다.

“걔보고 데리러 오라 하는 건 어때?”

나는 단번에 ‘걔’가 누굴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한재민은 나를 지나치고 뚜벅뚜벅 문 쪽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섰다. 그리고 턱으로 내 재킷 주머니 쪽을 가리켰다.

“핸드폰.”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 앱에 들어가니, 무미건조한 이름 세 글자로 유현재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래도 번호는 저장해놓는 사이였나 보네.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질질 끌며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길 최대한 미뤘다.

“전화 안 해?”

유현재를 부르라는 한재민의 지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유현재는 한재민의 존재를 유찬희가 죽으면서 알게 된다. 복수를 다짐하는 것도 유찬희의 뒤에 한재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인 데다, 그 전까지 유현재는 무능력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애초에 누구에게도 큰 관심도 받지 못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것들이 갑자기 바뀌어 버린 것처럼 유현재와 한재민의 관계 또한 변화가 생긴 걸까? 그렇지만 유찬희와도 모종의 이유로 사이가 뒤틀린 유현재가 한재민과 별다른 관계를 형성할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나는 결국 전화를 걸지 못한 채 한재민을 향해 시간 끌기용 질문을 했다.

“걔 불러서 뭐 하게.”

“아무것도 안 할 건데? 그냥 너 데리러 오라고. 혼자 밤길에 집 가긴 무섭잖아.”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한재민은 여전히 핸드폰을 든 내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한재민의 눈빛과, 어젯밤 유현재의 그 싸늘한 얼굴을 번갈아 가며 비교했다. 더 아픈 건 무엇일까.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물리적인 폭력과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정신 나갈 만큼 괴로운 상황. 정답은 쉬웠다. 나는 핸드폰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그 작은 기계가 방 구석으로 미끄러지듯 멀어졌다.

“안 불러.”

“그래?”

“어.”

나는 도리어 배 째라는 식으로 한재민과 당당하게 눈을 마주쳤다. 한재민은 일부러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그럼 나는 어떻게 찬희를 믿어야 하지?”

“…걜 부른다고 뭐가 달라져?”

“으음.”

“걘 나 무지하게 싫어해서 어차피 불러도 안 올걸.”

스스로 내뱉고도 비수가 되는 말이었다. 나는 울컥한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표정을 유지했다. 당장이라도 한재민이 내게 공격을 한들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길어지는 침묵에 긴장하며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때였다. 방 한구석에 있던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깨진 액정 너머로 정확하게 <아버지> 라는 글씨가 보였다. 나는 한재민과 중년 남자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핸드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수현이 형이랑 잠깐 만나고 있어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빨리 들어와라, 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고 한재민을 쳐다보니 어느새 그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진짜 같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연한 척 대답했다.

“진짜니까.”

한재민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나 안 들어가면 아버지가 너네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재민이 헝클어진 머리 아래로 눈을 빛내며 나를 재수 없게 쳐다보았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정말 인상 하난 끝내주게 더러웠다.

“사람 열받게 하는 건 정말 타고났네.”

한재민도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짜증 난다는 듯이 말하던 그가 결국 천천히 몸을 비켜 주었다.

“삼촌, 얘 좀 데려다줘.”

남자가 말없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차키를 들고 걸어왔다. 나는 드디어 방문을 열고 사무실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타고서야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저희 집 아시죠?”

“…….”

“저 다치고 아버지가 좀 많이 걱정하셔서. 빨리 가 주세요.”

아, 유찬희. 성격 더러운 연기 참 잘한다. 아니면 원래 이랬던 걸 수도 있지만.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얼굴을 비추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안전한 상황이었음에도 아까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유현재는 나를 경계하고, 나는 이미 한재민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거기엔 차수현이 일조하고 있다.

자꾸만 한 가지 결론으로 향하는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우울해지는 기분에 나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리자, 찬희야.”

어차피 무슨 상황이든 주어진 대로 적응이나 하며 사는 게 내 주제와 맞았다. 나는 샤워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에 있던 욕실 문을 열었다. 문득 욕실과 문 사이에 있던 작은 파우더 룸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났다. 상쾌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마치 그 사람 같아서 너무나도 좋았던 향. 너무나도 자상하고 그리운 그 향기를 맡으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곧장 1층으로 내려가 부모님께 오늘부터 다시 등교하겠노라 선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반대하진 않았지만 조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거의 처음인지라 나는 꽤 위화감을 느꼈다. 이전 같았더라면 그냥 따로 기사를 불러 등굣길 운전을 시켰을 텐데, 아버지는 직접 자신이 운전을 해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말투라든가 행동은 거의 그대로였지만 묘하게 가까워진 아버지에게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학교에 간 것은 유현재 때문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막연히 예상했던 대로 누가 봐도 왕따의 것임이 분명한 유현재의 책상이었다. 한쪽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밝게 인사했다. 나는 그 풋내가 가시지 않은 천진난만함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찬희야!”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이 세 명을 알고 있었다. 바로 직전의 삶에서도 앞장서서 유현재를 괴롭히던 그 무리였으니까.

“다리 괜찮아?”

“윤재가 그러는데 계단에서 굴렀다며.”

아. 계단에서 구른 설정이구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의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학교의 설정은 전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듯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생각하며 나는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오는 세 명에게 무심하게 물었다.

“…유현재는?”

“아, 걔.”

수정이 유현재의 자리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요즘 수업 시작 전에 들어오던데.”

“운동 같은 거 하는지 땀도 겁나 나 있고.”

“우리한테 대들려고 힘 키우는 거 아냐?”

“그래 봤자 무능력잔데, 뭐.”

운동을 하고 힘을 키우고 있다는 것. 그 말에서 나는 유현재가 이미 체술을 익히고 있음을 눈치챘다. 엊그제 예상했던 대로 역시 유현재는 지난 삶과 분명히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던 그 결론이 자꾸만 맞아 떨어지자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이 상황을 직면하고 인정해야 한단 걸 알고 있었다.

유현재, 차수현, 한재민.

그들은 지금 너무나도 완벽하게 원작을 구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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