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22화 (22/115)

22.

나는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온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유현재가 나를 싫어한다.

주술이 맞지 않는 비문처럼, 이 말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불행이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꾸만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 불행에 한없이 짓이겨졌다. 유현재가 나를 싫어한다는, 숨조차 쉴 수 없는 거대한 불행.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눈물이 흘렀다. 평소의 조용한 눈물과는 달리 서럽게 끅끅거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지만 방에선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내 유현재에게 기대를 거는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울 힘도 없어 문에 등을 기대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답이 있다 치더라도 내게 희망조차 없는 가혹한 현실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재밌냐?”

나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너무나도 많이 운 탓에 목소리가 낮게 잠겨버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시스템은 여전히 조용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예상대로 아무 대답이 없자, 나는 결국 킁,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삼켰다.

어차피 알고 있었다. 바로 전 삶에서, 사차선 도로로 뛰어든 순간부터 내겐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을. 예정된 불행은 지속될 것이었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던 패시브 정도가 없어진 것뿐이었다. 패시브가 없어도 유저는 게임을 지속해야만 한다. 그건 모든 게임의 룰이었다.

*

나는 외투를 챙겨 입고 조용히 집 밖을 나섰다.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방 속엔 급작스럽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한 총 한 자루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유찬희의 방에 있는 총에는 탄환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마 마나를 주입해 쏴야 하는, 전문 헌터용 총일 터였다. 지금의 유찬희는 총을 사용하는 방법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챙긴 건 오로지 시간 벌기 위해서였다.

차수현이 보내 준 주소는 도심에서 제법 먼 어느 외곽 지역이었다. 택시 기사는 새벽씩이나 되어 수상쩍은 장소로 향하는 나를 계속해서 의심했다.

“학생, 도대체 여긴 왜 가는 거야? 여기 내가 알기로는 그냥 사무실 몇 개뿐인데.”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충 상황을 무마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가 택시 기사에게 먹혀들었던 건지 내부는 금세 조용해졌다. 차는 십여 분을 달리더니, 정말 편의점 하나 없는 황량한 도로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나는 요금을 결제한 후 차에서 내렸다. 누군가 나를 마중 나와 줄 줄 알았지만 인기척 하나 없었다. 과연 근방에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위는 고요했다. 나는 천천히 건물 몇 채가 서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도 어플의 아이콘이 점점 도착 지점에 가까워졌다.

정확한 장소에 가까워졌을 때쯤 검은 자동차 몇 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곳이 내 목적지이며, 지금의 난해한 상황을 타개해 줄 장소라는 걸 눈치챘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자동차 근처에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는 작은 사무실이 보였다. 죽은 것만 같은 주변의 폐건물과는 사뭇 다른 전경이었다. 나는 천천히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늦지 않게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로운 발걸음이었다.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본 것은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등산 브랜드 티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친다면 절대 기억하지 못할 흔한 인상이었다. 남자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뭘 그렇게 어색한 표정이야.”

“네?”

“얼른 들어와. 춥다.”

남자는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나는 총이 든 가방을 꽉 쥔 채, 한 발 한 발 바닥을 누르듯이 안쪽으로 걸어갔다.

텅 비어 있다 못해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내부는, 아주 오래 전 누군가가 쓰고 버린 듯한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사무실이라 짐작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내가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걸까. 차수현은 무슨 목적으로 나를 소개해 준 걸까. 나는 여전히 주춤거리며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컨테이너 바닥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음산한 느낌을 더했다. 나와 남자는 사무실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문 앞에 섰다.

“다리는 괜찮고?”

문을 열기 전에 남자가 내게 제법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는 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애들은 금방 금방 다친다니까.”

제법 푸근한 말을 내뱉으며 남자가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자마자 진한 향냄새가 코끝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따라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바깥의 본 사무실과 달리 먼지 하나 없이 몹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리가 짧은 고급 테이블과 양쪽에 놓인 3인용 가죽 소파, 간단한 옷걸이까지. 학생인 내가 봐도 조그만 회사의 임원급이 지낼 법한 장소라는 게 느껴졌다. 조금 이질적인 게 있다면 보통 책상이 놓여 있을 안쪽과 이쪽 사이에 검은 커튼이 쳐져 있었단 정도였다.

“다리도 아플 텐데 일단 앉아 있어.”

남자가 두 손으로 나를 밀어 소파에 앉혔다. 나는 팡 소리를 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곧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나는 티 나지 않게 눈썹에 힘을 주었다. 부른다니. 날 부른 사람이 이 남자가 아니라는 건가? 나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침을 삼켰다. 도망칠까? 하지만 이곳은 택시조차 없는 외딴 곳이었다. 괜히 도망쳤다가 추후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수현이가 장소 가르쳐 준 거냐?”

“…네.”

나는 최대한 짤막하게 대답했다. 친근하게 질문했던 남자가 내 대답을 듣고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나는 순간 내 대답이 잘못되었나 망설였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표정을 풀고 다시 말을 걸어왔다.

“오는데 힘들었지?”

“……아뇨.”

“택시?”

“네.”

나는 아까 남자의 표정을 캐치한 이후 최대한 단답형으로 말하며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커튼이 천천히 열렸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대충 차려입은 듯 옷을 입었음에도 한 번에 눈에 띄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남자는 조금 작은 동공과 눈 밑의 다크서클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찬희 왔네?”

남자가 느긋하게 웃으며 하품을 했다. 나는 적당히 눈치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다쳤다더니, 그런데도 득달같이 달려왔네.”

“거의 다 나았는데….”

“하여간, 수현이나 너나 진짜 독종이야.”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와 갑작스럽게 내 눈꺼풀을 잡고 뒤집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네.”

의사처럼 내 얼굴 곳곳을 만지작거리며 안색을 살피던 남자가, 곧 팔을 내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각오는 똑바로 돼 있겠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쉽사리 그렇노라 답할 수 없었다.

“…알면서 왜 물어보세요.”

남자는 수 초간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킥킥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였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 반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쳤다.

“성질 더럽긴.”

남자는 다행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웃어넘겼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가 내 손을 잡고 커튼 뒤로 걸어갔다.

“재민아.”

뒤에 있던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재민? 분명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나는 속으로 빠르게 과거를 되짚기 시작했다. 재민이라 불린 그 젊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중년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아마 수신호나, 혹은 눈짓으로 대화하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젊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은 아주 피곤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나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구더라. 기억날 듯 말 듯 한 그 이름에 나는 혀끝마저 쓰린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내 손을 잡고 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대로 손목을 꺾더니 나를 쓰러트렸다. 몸이 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남자의 구둣발에 가슴을 짓눌린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굴까?”

남자는 이제 웃지 않았다. 대신 발끝에 힘을 주며 내 숨통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다리를 잡고 몸에서 떼어 내려 노력했으나, 남자는 생긴 것보다 악력이 어마어마했다.

“찬희가 아닌데.”

“…무슨….”

“우리 찬희는 너무 건방져서 절대 존댓말을 안 쓰거든요, 학생.”

남자의 말이 가슴에서 목 쪽으로 올라왔다. 목 한가운데를 그대로 짓밟힌 내가 컥컥거리며 겨우 숨을 내뱉었다. 고통 끝에서야 나는 재민이란 이름의 남자를 기억할 수 있었다.

한재민.

이 나라를 뒤엎고자 하는 반정부 길드의 수장.

그리고 유현재에게 처참히 죽어버리는 악역.

나는 이미 그와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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