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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 사용 설명서-21화 (21/115)

21.

항상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유찬희의 방은 혼자 쓰기엔 너무 넓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침대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면 더더욱 집의 크기란 덧없음을 실감했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시스템을 불렀다.

“히든 루트 없어졌어?”

시스템은 대답이 없었다. 보고 싶지 않을 땐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더니, 정작 찾으니까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스템을 불러댔다. 처음엔 속으로 얘기하던 것이 점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대답해. 야. 나오라고.”

목소리가 커지자 시스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띠링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유현재’ 히든 루트 엔딩 수집을 실패하셨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하겠냐….”

나는 진심으로 되물었다. 시스템은 잠시 대답이 없더니 아까부터 계속 듣고 싶었던 그 말을 허공에 띄워 주었다.

<‘유현재’ 히든 루트가 폐기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문장들이 쏟아지듯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유현재’와의 관계 맺기에 실패했습니다!>

<실패에 대한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당신에 대한 ‘유현재’의 호감도가 떨어집니다.>

<당신에 대한 ‘유현재’의 호감도가 떨어집니다.>

<당신에 대한 ‘유현재’의 호감도가 떨어집니다.>

마지막 말이 반복되는 건, 호감도가 그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말인가. 나는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허공을 쳐다보다가 결국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모순된 기쁜 마음 뒤에 몰려오는 것은 아주 어두운 공허함이었다. 다시 유현재와 척을 지고, 그를 무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아팠다. 한번 머리가 아프단 생각이 드니 계속해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약을 찾기 위해 방을 나섰다. 보통 약들은 유현재의 방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친 다리를 이끌고 1층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지금 이 상태로 그를 맞닥뜨리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굳이 자신이 내 편이 아니란 걸 말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계단에서 유현재와 정통으로 마주친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유현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야 조금 마음을 연 상대가 뒤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으니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받아내는 눈빛은 유현재가 자주 드러내던 슬픔, 외로움,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유현재는 나를 명백히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유현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그렇게 보냐고 뻔뻔하게 시비를 걸 자신도 없었다.

“…먼저 지나가.”

유현재가 곧 차갑게 나를 지나쳤다. 나는 머리가 더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길지 않은 계단이었음에도 내겐 천 리 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나는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거실 뒤로 몸을 숨겼다. 예상한 것이었는데도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나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장이라도 유현재의 팔을 붙들고 그건 무슨 표정이냐고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빠져 있는 불구덩이로 또다시 유현재를 끌어들이면 안 됐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힘을 줘 하얗게 질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때쯤엔 나도 이 지긋지긋한 눈물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

나는 쓰라린 눈가를 어루만지며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2층 거실에 도착한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4인용이었던 거실의 소파가 1인용짜리 하나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한번 인식하니 다른 것들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깐 미처 보지 못했던 소품들 또한 모두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이 공간에서 바뀐 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 사람 분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다리 통증 따위는 무시하고 방으로 뛰어갔다. 방은 거의 비슷했지만 한쪽 면이 커다란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벽지와 같은 색이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한쪽 벽엔 난생처음 보는 총기들이 한가득 걸려 있었다. 외국 고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총들을 보며 나는 멍해졌다. 도대체 이게 뭘까. 나는 단 한 번도 총에 관심을 갖거나 수집한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아주 어렴풋이, 한동안 머릿속 한구석에 봉해 두었던 구절 하나가 생각났다.

「유찬희의 방에는 일곱 살 때부터 모아온 각종 총기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힌트를 찾기 위해 책상 쪽으로 달려가 서랍을 마구잡이로 열기 시작했다. 필기노트 몇 권, 의미 없는 메모가 적힌 쪽지 몇 장, 자질구레한 필기구까지. 나는 미친 듯이 서랍을 뒤지다 말고 책상 뒤 좁은 공간에 살짝 삐져나온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책을 꺼냈다. 금박 처리까지 된 묵직한 양장본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음에도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탄 듯 낡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책의 제목을 읽었다. 낯선 외국어 원서였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처음 봤던 그때처럼.

“이게 왜 내 방에….”

나는 불현듯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이 상황 속에서의 나는 무엇인지 헷갈려왔다. 이곳은 내가 만들어온 바로 이전의 삶이 아니다. 즉, 내가 세이브했던 그 지점이 아닌 것이다. 나는 시스템을 불렀다. 당연하다는 듯 시스템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진동했다. 나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수현이 형.

친근하게 저장된 그 이름을 보자 더더욱 받고 싶지 않아졌지만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슬라이드 했다.

-유찬희.

차수현이 내게 제법 평범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이전의 그 비아냥거리는 톤과는 확실히 다른 목소리였다.

-메신저 안 보냐?

“자고… 있었어.”

나는 억지로 대답을 짜냈다. 사고 회로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약을 꺼내 급하게 물 없이 삼켰다. 금방 괜찮아지지 않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초조하게 두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여전히 차수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단 보내놨어. 네가 부탁한 거.

“부탁한 거?”

-내숭 떠냐? 안 어울리니까 그만하고.

“…….”

-난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뭘.”

-걔가 아무리 싫어도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단 게 너무 웃겨서.

차수현이 진절머리를 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드폰 귀에서 떼고, 천천히 메신저 앱을 클릭했다. 최신 연락 목록엔 모두 모르는 이름, 혹은 알고 있지만 희미하게 기억에만 남아 있는 인물들로 가득했다. 그중 나는 차수현의 이름을 눌러 대화 내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차수현: 너 진짜 개 독하다]

[형보단 나음 난 사람 하나 족치겠다고 유학은 안감]

[차수현: 십새끼 나도 약은 안하거든]

[ㅗㅗ]

[차수현: (파일)]

차수현이 보낸 파일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화는 끊겨 있었다. 나는 이 찝찝한 기록을 파헤치는 건 미뤄두고 파일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파일 안에는 어딘가의 주소가 적힌 문서만 있었다. 지도 어플로 주소가 어디인지 찾아봤지만 나오는 것은 어느 산업체의 건물뿐이었다.

타이밍 좋게 차수현의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차수현: 2시까지 가면 됨]

[차수현: 네가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 건데]

[차수현: 새벽 2시임]

나는 망설이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 한 줄만 보내고 핸드폰을 침대로 던져버렸다. 만든 적도 없는 인간관계, 쓴 적도 없는 메신저 텍스트, 모은 적도 없는 총. 도대체 이 상황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진짜 더럽게 괴롭히네.”

괴롭힐 거면 왜 괴롭히는지라도 알려 주든가. 하지만 이 개 같은 시스템이 그렇게 친절할 리 없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차수현이 보내 준 그 장소로 가는 것.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었다. 모든 것이 미묘하게 틀어진 이 상황에서도 단 한 가지만은 알고 싶었다. 유현재가 정말 나를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과거를 기억해내던 그때의 유현재는 아닌 건지,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믿음을 주던 그 유현재가 진짜 아닌지, 사실 아주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유현재와 이전의 삶처럼 또다시 함께 있고 싶단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려고 다시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알아도, 사실 바뀌는 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유현재라면 고작 호감도 몇 개 떨어진 것 가지곤 나를 떠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그러면 일이 곤란해지니까 그것만 확인만 하려고 하는 거였다.

“비웃지 마.”

괜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으름장을 놨다. 사실은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입 맞춰 주던 그 유현재까진 아니더라도, 막연히 날 좋아했던 감정이 기억난다는 그 유현재만은 남아 있길 바랐다. 시스템이 본다면 비웃을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까의 일로 시비라도 걸어 대화해 볼 생각으로 과감하게 유현재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괜스레 심장이 떨려왔다. 매 생애마다 유현재는 나를 잊어도,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아까의 그 눈빛은 거짓말일 것이다. 유현재가 나를 싫어할 리가 없다. 유현재는 상심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해도 절대 유찬희를 미워하는 감정 따위 단 한 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유현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바로 내가 말하려던 걸 내뱉으려다 문득, 유현재의 방 내부를 보게 되었다.

유현재의 방에는 멀쩡한 물건이 없었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부서지고 찢어진 채 존재했다. 유찬희의 방에 있던 커다란 침대와 대조되는 초라한 이불, 책상조차 없어 바닥에 책을 쌓아놓은 모습, 멋대로 찢어지고 긁힌 벽지. 한 켠에 겨우 걸려 있는 교복은 그마저도 말라붙은 피와 흙으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유현재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었다. 유현재는 매우 지쳐 있었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유현재의 팔뚝엔 맞았다고 밖엔 볼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 나는 도리어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유현재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도대체 이 뒤틀린 세계가 너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현재는 딱히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팔을 가볍게 뿌리친 유현재가 내게 감정 없이 말했다.

“집에선 그렇게 안 대해 줘도 돼.”

“뭐…?”

“아무도 안 보잖아.”

유현재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지겨운 삶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늘어난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유현재는 나를 싫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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