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가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자 유현재는 유현재 나름대로 미칠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임종만을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처럼 아무런 의욕 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유현재는 나를 붙들고 설득을 하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일부러 화까지 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는 이 시스템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유현재와 행복해지려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은 더더욱 최악의 방향으로 갈 것 같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히든 루트> 따위의 미끼를 던져대며, 아주 잔인하게 나를 옥죄어 올 것만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유현재는 내 곁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춘 것 같긴 했지만 현실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정말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자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 서서, 조용히 수갑을 차고 있는 유현재를 발견했다.
*
나는 병원으로 먼저 실려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병원에 찾아왔지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혀를 차며 병실을 나갔고, 어머니는 울기만 했다. 유현재는 아마 이곳에 올 수 없을 거였다. 목숨을 부지하게 된 나는 더 이상 유현재의 얼굴을 보는 것 이외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현재가 이제 내 옆에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참 엿 같은 엔딩이었다. 나는 이러다 정신 병원에 처박혀 삶을 보낼 것이고, 유현재는 감옥에서 일생을 썩겠지. 나는 나의 불행뿐만 아니라 유현재의 불행까지 감당하게 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숨 막혔다.
며칠 뒤 어머니가 다시 병실을 방문했다. 나는 어머니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차수현이었다. 내가 열일곱 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일정상 타이밍이 맞긴 했다.
“수현이 형 보면 기운 좀 날까 싶어서 부탁했어.”
어머니는 참 웃기는 말을 했다. 차수현은 참 착실하게도 친절한 엄마 친구 아들 연기를 했다.
“오랜만이야, 찬희야.”
“…응.”
병원에 입원한 뒤로 처음 입을 뗀 것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했다. 수현이가 와서 찬희도 너무 좋은 모양이라고. 나나 차수현이나 속으로는 잔뜩 비웃을 말을 하며 어머니는 잠시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성인 차수현이 낯설지 않았다. 아직도 그 꿈이 생생했기 때문인지, 마치 내가 직접 그때의 차수현을 만났던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어머니가 나가자마자 차수현은 나를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 말을 건넸다.
“이렇게 다 죽어갈 줄은 몰랐는데.”
“형은 생각보다 안색이 좋네.”
차수현이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얼굴을 펴고 태도를 유지했다.
“유현재, 망했더라.”
“…….”
“좀 김새네.”
차수현은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손봐 줄 계획이었을 텐데, 알아서 자멸해 버렸으니 본인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살인만 두 번. 아주 대단한 놈이야.”
나는 그에 대해서 정정할 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차수현과 논쟁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유도현과의 관계에 대해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저 그냥 좀 꺼져 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무시하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을 해냈다.
“형.”
나는 손을 뻗어 차수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내 목 좀 졸라 봐.”
그 말을 하고 내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자, 차수현은 힘을 줘 내 손을 뿌리쳤다.
“미친 새끼 아니야?”
“나 유현재랑 사귀었어.”
차수현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도현이 형 죽인 현재랑 사귀었다고.”
“…어쩌라는 건데?”
“죽이고 싶지 않아?”
“뭐?”
차수현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나는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나 현재랑 진짜 행복했어.”
“미친놈.”
“형도 도현이 형이랑 행복했잖아.”
차수현이 그때서야 제대로 반응했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내가 뭐 하나 말해 줄까?”
내가 샐쭉 웃었다. 진짜 단단히 미친놈 같아 보였을 것이었다.
“형은 진짜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
“앞으로도 없을 걸. 난 다 알거든.”
“미친 새끼.”
차수현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목을 조르는 대신, 내 뺨을 내리쳤다. 나는 고개를 꺾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성급했나. 차수현이 병실을 빠져나가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링거를 강제로 뺀 팔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꿰맨 상처는 조금씩 찢어져 벌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을 빠져나온 뒤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다. 내 생각이 너무나도 기특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내 계획을 눈치챘는지 시스템이 아까부터 쉼 없이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조차 무시한 채, 길을 따라 내달렸다.
<‘히든 루트’ 배드 엔딩 분기점에 도달합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나는 허공에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골목을 빠져나와 4차선 도로를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차와 눈이 마주쳤다. 차와 눈이 마주쳤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아무튼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줄 그 감사한 매개체와 드디어 맞닥뜨렸다. 나는 순식간에 차에 치여 허공으로 날아갔다.
*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돌아온 것이었다. 익숙한 이 느낌을 잊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내 몸은 여전히 열일곱 살이며, 다리를 다쳐 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곧 다가올 상황을 복기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곧 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바로 보였다.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아버지는 내게, 이전의 삶과 똑같은 것을 기계처럼 물어보았다. 그리고 유현재가 막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잠깐이지만 다시 유현재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아직 불행하지 않은 그 유현재가 문 뒤에 있다. 나는 이 평범한 상황이 눈물 날 정도로 좋았다. 다시 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내가 얼마나 망가지든 간에 유현재가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너무 재밌지 않아요?”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좀 놀아 줬다고 지가 나랑 동급인 줄 아는게요.”
이 말을 내뱉고 나는 정말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히든 루트는 폐기되었다. 유현재가 불행해질 일은 없었다.
“진짜 웃겨서 좀 갖고 논 거예요.”
방문 뒤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현재는 아버지가 나간 이후로도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