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옥 같은 밤이 지나갔다. 나는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오후가 되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유현재는 제발 병원에 가자고 빌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당장 저 마당에 있는 죽어 있는 시체를 조금이라도 늦게 들키기 위해선 외부와의 접촉을 무조건 피해야 했다.
열 때문에 식사를 하다가 구토를 할 지경까지 이를 때쯤 유현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살인이란 게 인간에게 얼마나 거대한 공포감을 주는지 깨달았다. 이미 여덟 번의 죽음을 겪은 적이 있는 나조차 이러한데, 유현재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나는 퀭해진 얼굴로 유현재에게 천천히 말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냐.”
유현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의 존재조차도 그에게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이불 위에 누워 최대한 현실적으로 방안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해도 결론적으로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다 행복하자고 이랬던 건데. 유현재도, 나도 그냥 단 하나, 행복하려고 이랬던 건데.
내가 계속 아프자 유현재는 자신이 자수를 해도 괜찮으니 제발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지독한 갈등에 시달렸다. 자수를 하게 되면, 유현재는 어떤 경로로든 내 곁을 떠나게 된다. 자수를 하지 않는다면, 평생 도망치거나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더 절망적인 건 어떤 방법을 택하든 유현재의 마음이 편해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내게 조금 더 이기적인 방안을 선택했다. 유현재는, 아무 말 없이 내 뜻을 따랐다.
유현재는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차마 그런 유현재에게 뭐라 말을 걸 수 없었다. 내 몸의 곪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안쪽까지 썩어 들어가기 전에 빨리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나는 자주 고열과 고통에 시달렸다. 가끔 헛것도 보았다. 대부분 죽은 남자가 나를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 유현재는 내가 그런 환각에 시달릴 때마다 내 손을 잡고 부탁했다.
“제발, 찬희야….”
“싫어.”
유현재는 내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끊임없이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어린애가 뭘 그렇게 잘못해야 했는지 몰랐기에, 오히려 유현재가 계속 찾고 있는 그 신이 원망스러웠다.
정신을 잃고 기절인지 잠인지 모를 것으로 꿈을 꿨을 때, 나는 오랜만에 꿈에서 첫 번째 삶의 차수현을 만났다. 뜬금없는 만남이었지만, 차수현은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꿈속의 나는 천천히 차수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일에 몰두해 있던 차수현은 아직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일부러 크게 인기척을 내자, 차수현은 놀란 듯이 나를 보며 이름을 불렀다.
-도현이 형!
나는 별 이질감 없이 그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게 웃어주는 차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세히 보니 차수현은 그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많이 기다렸지?
차수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책 보면서 기다리니까 금방 가던데.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나서.
-형이 워낙 대단하니까.
차수현은 티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가 매우 낯설었지만, ‘유도현’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는 평범한 데이트를 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공원을 걸었다. 차수현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도저히 그 정신 나간 차수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데이트의 마지막 즈음엔 이미 땅거미가 진 이후였다. 나는 차를 몰아 차수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인사를 나눴지만 차수현은 할 말이 있는지 말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형, 나 안 버릴 거지?
나는 말없이 차수현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수현은 다행이라는 듯 얼굴 가득 웃으며 나를 안았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차수현의 대사는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아직도 내가 소설 속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하는 차수현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상황을 마지막으로 눈을 떴다. 잠에서 깬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전히 열에 들뜬 상태였으며, 배에 난 상처의 통증이 심했다. 하지만 나는 몸이 아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꿈속의 차수현의 말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소설 속. 소설 속…….
“찬희야.”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유현재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며칠 새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천천히 입을 뗐다.
“도현이 형.”
유현재가 눈을 크게 떴다.
“형 꿈을 꿨어.”
“…….”
“이상해.”
“뭐가?”
“기분이, 그냥… 너무.”
나는 유현재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형은 어떤 사람이었어?”
“그거야, 나보다 네가….”
“말해 줘, 네가.”
유현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도현이 형은… 정말 멋있었어.”
유현재는 아주 잠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은 다 알고 있었어.”
“다 알고 있었다고?”
“그냥, 뭔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난 그게 형의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순간 온몸의 피가 바짝 말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몸을 벌벌 떨었다. 유현재가 깜짝 놀라며 내 손을 잡았다.
다 알고 있었다고?
유도현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면 왜 죽은 거지?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죽어야 했으니까.
정신이 먹에 담근 것처럼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해에 빠져 더 이상 허우적댈 힘조차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몸이 축 처졌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괴로워졌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저주스러운 결론을 내려 하는 머리를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야?
아주 타이밍 좋게도 띠링, 소리가 방 한구석에서 들려왔다.
<‘유현재’ 히든 루트 엔딩을 수집할 수 있게 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히든 루트. 나는 이제 정신을 놓고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행복해지려고 했다고? 내 주제에? 그래서 네가 행복해지려고 한 행동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야? 나는 계속 웃었다. 너무 웃은 나머지 종내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