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8화 (18/115)

18.

도로가 끝나는 곳, 원래 지내던 곳과 제법 멀고 한적한 방에서 우리는 겨우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그곳은 한 채를 통째로 빌려도 이전 민박집의 방 한 칸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집 주인은 눈이 많이 어두운 할머니였고, 언제 마지막으로 쓴지 모를 그 방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는 제대로 짐을 풀지도 못한 채 열심히 방을 쓸고 닦았다. 언제 불을 넣어 주신 건지 방에 조금씩 더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충 청소를 끝내고 나니 시간은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깔고 옆으로 누운 채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인심 좋은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고구마며 밤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시골 할머니 댁 온 것 같다.”

“응.”

“우리 할머니 얼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유현재가 내 머리를 쓸어내리다 웃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찬희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앉아있는 유현재를 올려다보았다. 유현재가 자연스럽게 엎드린 채 위에서 입을 부딪혀 왔다. 짧은 입맞춤으로 끝날 줄 알았던 행위는 곧 짙은 뒤섞임으로 바뀌었다. 유현재가 나를 잡아먹을 듯 헤집기 시작했다. 등 뒤로 손이 들어오더니 몸이 살짝 붕 떴다.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나는 유현재의 품으로 딸려 올라가 계속해서 입맞춤을 받아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시련을 겪고 성숙해졌더라도, 고작 열일곱 살짜리들이 이런 상황에서 능숙히 상황을 다루고 서로를 배려해 줄 리 만무했다.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계속 들이닥치는 생소하고 강렬한 자극에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주 긴, 거짓말 같은 밤이 흘러갔다.

*

막연했던 감정을 정확히 확인하고 나서 유현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한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시도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해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파도를 만지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유현재는 내가 20분 거리의 슈퍼를 다녀오는 것조차 함께하려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집요한 면모가 좋았기에 나는 말없이 그의 행동에 동조해 주었다.

이 집에 온 지 딱 3일째, 우리는 슈퍼에 갔다가 남자 한 명을 마주쳤다. 그는 구매한 담배의 겉포장을 뜯다가, 들어온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아버지가 보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집을 들켜선 안 된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행히 슈퍼의 뒷문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를 피해 도망쳤다. 혹시 몰라 우리는 한참 해변가를 맴돌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유현재는 특히나 불안해했다. 물론 그걸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애써 모른 척해 주고 있었지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현재는 매일같이 밤에 잠을 자다가 악몽이라도 꾼 듯 벌떡 일어나 한참을 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나 또한 원래부터 수면의 질이 썩 좋지는 않았던 터라 불안한 마음이 심해질수록 잠들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런가, 며칠 뒤 대문 앞에 그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하고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나라에서 아버지가 찾지 못할 곳은 없었다. 나는 은연중에, 이 도피의 끝은 집으로의 복귀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여기 남의 집이에요.”

남자는 나만큼이나 나쁜 인상의 소유자였다. 보기만 해도 저 남자의 난폭함을 알 만할 정도였다. 아마 사람을 찾는 데 관련된 하청 직원들을 고용했겠지.

“그쪽이 유찬희 도련님인가?”

“도련님은 아니고, 유찬희는 맞는 거 같고.”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 뒤는 유현재겠네.”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는 유현재를 보고 나는 살짝 놀랐다. 유현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현재의 얼굴엔 냉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꼬맹이들끼리 나란히 가출한 걸로 별로 힘쓰고 싶지 않거든? 조용히 서울로 가자?”

남자는 조롱하듯 우리를 어르고 달랬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뭐.”

남자가 발로 대문을 쾅 찼다. 원체 조용한 동네였던지라, 나는 그 기분 나쁜 소음이 더더욱 불쾌했다.

“때리기라도 하려고요?”

“도련님이 얼마나 사고뭉치였으면 아버지가 반병신을 만들어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할까.”

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내 얼굴을 매만졌다.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존재감이 뚜렷한 멍들이 얼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내가 사고뭉치라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원래 아버지란 작자가 그런 인간인 건데. 유현재가 남자를 경계하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괜찮다는 듯 그 손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다시 비아냥거렸다.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소문이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될 만큼 우리의 가출이 이슈가 된 건지, 아니면 남자가 수선을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집안 도련님 둘이서 눈 맞아서 도망갔다는 거.”

“오.”

나는 정말 놀랐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버지의 멍청한 고용인들치곤 제법 그럴듯한 추리를 하셨네요.”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더 이상 인내할 생각이 없었는지, 남자는 성큼 내 쪽으로 걸어와 예고 없이 내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곧바로 유현재가 망설임 없이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순식간에 남자가 나가떨어졌다.

“건드리지 마. 미친놈아.”

“하 씨발….”

남자가 입 주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유현재를 노려보았다.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데?”

남자가 유현재 대신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가까스로 남자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발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다. 남자가 다시 나가떨어졌다. 자존심이 꽤 상한 듯 남자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씨팔, 일하러 와서 애새끼들한테 처맞고. 기분 한번 엿 같네.”

“그럼 그냥 꺼지시던가요.”

남자는 대답 대신 다시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똑같은 패턴의 공격이었기에 이번엔 조금 더 수월하게 피했다. 멍청한 새끼, 라고 생각할 때쯤 배 쪽에서 강렬한 통증과 함께 뜨끈한 피가 흘러내렸다.

“아, 씨발… 아저씨 존나 더러운 플레이 하시네….”

나는 살갗이 쇠붙이로 찢기는 이 불쾌한 기분을 알고 있었다. 다만 깊게 찔리기 전에 몸을 뺐던 터라 아주 큰 치명상까진 아니라는 게 그때와는 다른 점일까. 참 낙관적이게도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한 나와 달리 유현재는 제법 크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유현재가 가볍게 남자의 손을 차 칼을 놓치게 한 후, 명치 부근을 가격했다. 남자의 몸이 마당 끝까지 날아갔다.

“야! 적당히 해!”

유현재가 대답하지 않고 쓰러진 남자의 가슴을 한쪽 무릎으로 세게 누른 후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유현재의 악력과 잠재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가 흐르는 배를 쥐고선 그에게 달려갔다. 남자는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상태였다. 아마 갈비뼈가 부러진 듯했다.

“그만하라니까!”

내가 유현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주먹질을 멈춘 유현재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현재에게 그렇게 전해졌을 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작스레 피를 쏟은 터라 시야가 핑 돌았다. 쓰러지는 나를 유현재가 받아 듬과 동시에, 나는 기절했다.

*

눈을 떴을 땐 이미 배에 정성스레 붕대가 감아진 후였다. 나는 다시 그 지겨운 여덟 살으로 돌아갔을까 봐 심장을 졸였지만, 다행히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바닷가 특유의 짠내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단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꿰매야 할 자상이었지만 아무래도 병원에 가진 못했는지, 터진 상처에선 아직도 조금씩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붕대에 배어난 피가 이불에 묻지 않게 조심하며 나는 아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유현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걸어둔 외투를 걸친 채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정말 괴이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아까와 똑같은 차림새로 유현재가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덩그러니는 아니었다. 바로 앞에 쓰러진 남자가 있었으니까. 유현재는 계속해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내 인기척에 유현재가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 아직도 안 일어났어?”

유현재는 대답 없이 계속 나를 쳐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은 거둔 상태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얼어 죽겠는데? 일단 방으로….”

나는 유현재 곁으로 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목은 이상한 모양으로 꺾여 있었고, 피부는 푸른색으로 질려 있었다. 도저히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유현재는 방금과 달리 이번엔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찬희야….”

나도 모르게 유현재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 안 버릴 거지?”

나는 처음으로 유현재의 말에서 짙은 욕망을 읽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만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헌신하는 그 모습 또한 그 욕망의 한 면이었을 뿐이었다. 달빛을 받아 유현재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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