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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 사용 설명서-17화 (17/115)

17.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다 큰 남자애들 둘이 그러고 있다는 게 조금 민망하면서도 나는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이 분위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로 인해 끊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와 유현재가 함께 외박을 했다는 사실이 상당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차가운 눈으로 유현재를 쳐다보던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방에 들어가라 이른 후 내게는 바로 따라오라 명령했다.

유현재의 불안한 눈빛이 내 얼굴에 닿았다. 아버지는 제법 수직적이며 거친 편이었고, 나는 바로 일전에도 주제넘게 대든 적이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유현재를 걱정시키긴 싫었기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그를 등지고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방은 여전히 숨 막히게 깔끔했다. 아버지는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의자에 앉은 채 한숨을 쉬었다.

“이유가 뭐냐?”

“네?”

“요즘 이러는 이유 말이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따위 정신 나간 말이 진짜 이유라고?”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몸을 웅크렸다. 몇 번째 생에서든 아버지가 이런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올 땐 항상 폭력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손을 올리더니 내 뺨을 둔탁하게 내리쳤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통증에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였다.

“목적이 뭔지 말해.”

“없어요, 그딴 거.”

다시 한번 손이 날아왔다. 나는 결국 손의 힘에 무게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입 안이 찢어져 순식간에 혀 전체에서 쇠맛이 났다. 집 안 바닥에 뱉을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피를 삼켰다. 불쾌한 기분이 목구멍 안쪽으로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때리셔도 원하시는 말은 안 나온다니까요.”

아버지는 괘씸해 죽겠다는 듯 쓰러져 있는 나를 세게 발로 찼다. 정말 세상엔 쓰레기 같은 부모가 많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식을 쓰러트리고 발로 차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이, 역시나 자식 때문에 유현재를 그렇게 평생토록 증오한단 게 너무나도 우스웠다.

나는 아버지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 준 후에야 방을 나올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멍하게 서 있는 유현재가 보였다. 유현재는 잔뜩 달아오른 눈가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태연한 척하는 것도 웃길 것 같아, 나는 말없이 소파에 털썩 눕듯이 앉았다.

유현재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어떤 감정의 형태인지 알고 있었다. 무력함.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 그건 내가 숨 쉬듯 가지고 있는, 나의 근간을 이루는 감정이었다.

*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유현재를 방으로 보내고 혼자 이러고 있는 게 벌써 두 시간째였다. 뺨의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고, 통증의 여파로 목과 어깨까지 시큰거렸다.

원작에서도 죄책감 때문에 우리 가족은 차마 건들지 못했던 유현재였다. 결코 아버지에게 대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곧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도 연결될 거였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앞으로 더욱더 심하게 우리를 괴롭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현재의 파묻혀 있던 재능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가 각성을 거듭할수록 아버지는 유현재의 존재 자체를 더더욱 미워할 것이었다. 그의 존재가 빛이 나든, 재가 되든 아버지는 유현재를 오로지 단 한 가지의 목적으로만 보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원작의 유찬희가 아닌, 전혀 다른 유찬희인 나는? 이 상황을 그저 바라보면서 방관해야 하는 걸까? 아버지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유현재가 자신의 정신을 학대하면 학대하는 대로 그대로 둬야만 하는 건가? 그게 내가 원하는 히든 루트의 방향이자 행복해지는 방법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내 몸은 자동으로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목의 통증이 더더욱 심해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문밖으로 뛰어나가 금세 유현재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유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놀란 듯이 나를 보았다.

“도망칠래?”

내가 물었다. 아주, 매우 지극히 충동적인 권유였다.

그냥 무조건적인 내 행복 하나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말.

하지만 유현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이기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조해 줄 수 있는 사람. 내 행복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도망쳐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유현재의 그 막연한 감정을 믿었다.

*

가진 돈도, 대책도 없는 청소년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졌다 쳐도 미성년자 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성인 또한 평상시엔 능력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는 사회에서 미성년자의 범법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뭘로 먹고 살아야 할까? 나는 바닷가에 우리의 집을 짓고 평온하게 살고 싶다는 참 철없고 천진한 상상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불과 어제 갔던 그 바다로 다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모래사장임을 알면서도.

민박집 사장님은 다시 찾아온 우리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쩍은 듯 미묘한 얼굴을 했다. 카드를 쓰면 어디에 있는지 바로 들킬게 뻔했기에 집 근처에서 현금을 뽑아올 수 있는 만큼 뽑아 왔는데, 그게 사장님의 찝찝함을 더 가중시킨 듯했다.

“며칠 묵고 갈 예정이에요?”

“음… 일단 장기투숙하고 싶은데.”

내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미 머릿속에 청소년 비행 드라마 한 편을 재생한 듯, 사장님은 사색이 되었다.

“미성년자 장기투숙은 내가 법에 걸려서 안돼요.”

사장님이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주일 정도만 있겠노라고 사정했고 겨우 방을 배정받았다. 어제 묵었던 방과 같은 방이었다. 짐을 풀자 급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머물 곳을 찾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하니 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방 찾아보자.”

유현재가 나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일이 맞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

하지만 이 불안한 행복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며칠 뒤 방을 구하러 나간 사이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민박집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기 전에 빨리 숙소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기에 이 추위를 뚫고 계속해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사위가 어둑한 바닷가 해안 도로를 걸으며 나는 며칠 전보다 바닷바람이 더더욱 차가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유현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귀마개와 모자, 장갑, 목도리를 줄줄 꺼내더니 내게 하나하나 씌우고 둘러 주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잔뜩 언 혀로 내가 물었다. 추위 때문에 이미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유현재가 마지막으로 귀마개를 씌운 후 뿌듯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유현재는 추위에 잔뜩 언 얼굴조차 웃으니 제법 괜찮아 보였다. 사실 제법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굴욕 없이 잘생겼단 표현이 맞겠지만. 나는 굳이 그 얘기는 해 주지 않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현재 냄새가 났다. 상쾌하면서 차갑지 않은 이상하고 좋은 냄새.

“그냥. 춥잖아.”

유현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아주 어두운 그 도로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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