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6화 (16/115)

16.

우리는 동이 틀 때쯤이 되어서야 미리 잡아놓은 방으로 돌아갔다. 오래된 방에서는 으레 그렇듯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는 자각할 틈도 없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되었던 대한민국 상위 계층의 삶을 영위하던 유찬희로서는 낡은 민박집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잘 수 있겠어?”

그러는 저도 유찬희와 같은 집에서 살아온 주제에, 유현재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나의 기분을 먼저 신경 썼다. 나는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방에는 침구 두 채뿐이었고, 기껏해야 제대로 수신이 될까 싶은 낡은 TV가 다였다. 어린 시절부터 딱히 TV를 보는 취미는 없었던 터라 둘이 함께 남은 좁은 방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나는 괜스레 어색해서 티 나게 헛기침을 했다. 유현재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지 가지고 온 짐을 정리했다. 여행을 다닌 기억이 없는 건 같았음에도 유현재는 제법 세심하게 물품을 챙겨 왔다. 나는 그걸 신기하게 쳐다보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언제 이런 걸 다 챙겼어?”

“찬희 너 준비물 같은 거 잘 못 챙기잖아.”

“아.”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머쓱해진 나는 유현재가 꺼내는 물건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기본적인 여행 물품 사이에서 특히 구급약품의 비중이 컸다. 유현재가 이걸 챙긴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한 건 유현재가 한 모든 준비의 대상은 나일 거라는 거였다.

“야.”

나는 충동적으로 유현재를 불렀다.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

그리고 뻔한 질문을 했다. 새로운 곳, 새로운 분위기. 아마 나도 그런 것에 감정이 동요된 모양이었다. 유현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외로 담백한 대답을 했다.

“너랑 똑같은 이유.”

지가 뭘 안다고. 나는 웅크린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침묵이 돌더니, 유현재가 내게 바짝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들자마자 유현재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투명한 피부, 살짝 처진 눈꼬리, 자상함이 가득 묻어 있는 입매. 언제든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유현재. 나를,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려 노력하는 유현재. 나는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민망해한단 걸 눈치챘는지 유현재가 작게 웃었다.

“찬희는 생각보다 얼굴에서 다 티가 나.”

“뭐래….”

나는 눈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여전히 유현재의 눈에 가득 담겨 있는 내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유현재가 언제까지고 나를 쳐다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모순된 감정은 아마 한 단어,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엔 조금 부족할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알 수 있었을까? 커다란 도서관, 가득 찬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을 찾아야 하듯 나는 수많은 감정 중에 나의 것과 일치하는 그 마음을 찾아보려 했다. 그렇지만 아홉 번의 삶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별로 배운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유현재와 똑같이 느끼는 이 감정을 올곧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근데 솔직하지 않은 찬희도 좋아.”

하지만 유현재는 나에 비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았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서일까? 아니면 나와는 달리 여전히 세심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걸까. 나는 유현재가 느끼고 말하는 것들이 가끔은 낯설고 신기했다. 나와는 너무 다른 매커니즘의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서 정말 나와 다른 세계의, 언젠간 멀어져버릴 진짜 소설 속 인물일까 봐. 그저 입력된 대로 나에 대한 감정을 느끼는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수없이 겪은 죽음보다도 더 큰 절망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두려웠다. 아, 그래. 내 감정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두려움이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과거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때였다. 유현재가 내 눈을 손으로 가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당한 나는 얼떨결에 끊임없는 사고를 멈췄다.

“그러지 마.”

뭘?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시야를 가리던 손이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뭔가를 할 틈도 없이 유현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에 낯선 온기가 내려앉았다.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상에 더는 없을 것 같은 자상한 입맞춤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온 신경이 한 가지 강렬한 감정을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곧 머리에선 그 열기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상당히 뻔뻔하고 엄청난 짓을 저지른 주제에 유현재는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서야 시스템이 말한 히든 루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다.

*

자고 일어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유현재는 이미 깨끗하게 씻고 내 옆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사람을 옆에 두고 세상모르게 잤다는 게 좀 민망해져 나는 괜스레 머리를 정리했다.

“일어났어?”

유현재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불과 몇 시간 전 새벽에 있었던 그 일을 다시 떠올렸다.

“어… 일어났으면 깨우지.”

“많이 피곤해 보여서.”

내 손으로 채 정리하지 못한 머리를 마저 만져 주면서, 유현재가 다정하게 웃었다. 고작 열일곱 살 주제에. 어떻게 이런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씻는 내내 유현재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고민했다. 이 감정은 급류처럼 쏟아져내린 게 아닌, 서서히 적셔오는 잔잔한 파도였다. 분명한 건 그 지독하게 긴 불행한 삶 중 바로 오늘, 이 불편하고 퀴퀴한 이불 위에서 가장 편안하고 깊게 잠들었다는 거였다. 나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개운함에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맑다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아주 평범한 것을 깨달으며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또렷해지는 정신 사이로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행복해지고 싶다.

나와 아주 거리가 먼 그 단어가, 조금이라도 내 손아귀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이 들었다. 히든 루트라는 것이 내 행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면 아주 과분한 소망도 아니지 않을까?

나는 욕실 문을 열고 나가 유현재 앞에 섰다. 유현재가 몸을 일으켰다. 젖은 머리를 닦아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수건을 든 유현재를 무작정 껴안았다. 물기로 인해 차가워진 내 몸과 달리 유현재는 아주 따뜻했다. 당황해하던 유현재가 천천히 나를 안아 주었다. 시끄러울 정도로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그건 소음이라기보단 나를 진정시켜 주는 안정제 같았다.

“유현재.”

“응.”

“나 행복해지고 싶어.”

유현재가 나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어.”

아주 긴 고통이 이 시간을 위해 해야만 했던 준비 과정이라면, 나는 유현재의 생각과는 달리 제법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유현재의 그 다짐은 아주 듣기 좋은 자장가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지 않은 머리 때문에 유현재의 티셔츠가 푹 젖을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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