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4화 (14/115)

14.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유현재와 함께 학교에 다니고 밥을 먹는 그 시간이 모두 꿈이었다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행복은 사실이었다. 가끔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시스템만 가볍게 무시해 준다면 내 일상은 그냥 다른 사람과 비슷했다.

나는 실더로서 수련을 착실히 이어 갔다. 그건 아버지가 내게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의 대화 이후 아버지는 내게서 겸직과 관련된 말은 절대 꺼내지 못하게 했다. 궁금했지만 미친 듯이 알고 싶은 사실도 아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다.

유현재는 억지로 배우게 된 제조업에도 꽤나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특히 무기와 방어구 등 전투에 관련된 물품을 만드는 데에 소질이 있었는데, 여기에다가 나중에 힘까지 각성하면 정말 먼치킨 그 자체일 거라 생각하니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유현재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끄집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유찬희의 죽음에 준할 정도로 강한 자극이어야만 하는데, 유현재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다채롭지 못했다.

“야.”

“응?”

벤치에 앉아 바나나 우유를 먹던 유현재가 입에 빨대를 문 채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하복을 입을 날씨가 되었기에, 유현재 또한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단정한 검정 머리와 흰 피부는 밝은 계열의 하복과 무척 잘 어울렸다. 나는 잠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고 유현재를 쳐다보다, 버뜩 정신을 차리고 몇 초 정도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 로딩했다.

“넌 여자한테 관심 없냐?”

유현재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멈춘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말없이 계속해서 빨대를 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찬희 너는?”

“어?”

“내가 여자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어?”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불자 커다란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단정히 이마를 덮고 있던 유현재의 머리칼이 조금 흩날렸다. 나는 결국 먼저 눈을 피했다. 그리고 변명하듯 타박했다.

“내 의사가 뭐가 중요해?”

“중요한데.”

유현재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유현재의 손이 내 이마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머리를 정리해 준 손이 있던 자리엔 상쾌한 향이 남았다.

“거짓말 치고 있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유현재는 다 먹은 바나나 우유 통을 그대로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통, 하는 소리와 함께 빈 플라스틱 통이 쓰레기통에 쏙 들어갔다.

“네가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

“거짓말이려나?”

이상한 놈. 나는 괜히 화끈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찬희랑 같은 고등학교 가서 다행이다.”

“…난 지겨운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내가 교실로 향해 먼저 걷기 시작했다. 유현재는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유현재가 내 뒤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그냥 모든 게 안심되었다. 평화로웠다. 내겐 너무나도 잔인하고 지긋지긋한 열일곱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음에도.

*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다음 날 바로 몸을 다쳤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다친 것이었다. 뼈가 아예 부러진 것은 아니지만 금이 갔다고 했다. 나는 졸업까지 남은 수업을 모두 빠져야 했다. 침상에 누워 나는 이쯤 되면 내가 평화라는 단어에 트리거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닌가, 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이 생소한 창 하나를 띄웠다.

<언제 어디서 게임이 끊겨버릴지 몰라요!

-비상시를 대비해 당신은 세이브를 쓸 수 있습니다. (0/3)>

세이브가 사용된다는 전제 자체가 이미 개 같은 일을 당한 이후 아니냐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글씨를 노려보았다. 시스템이 내 또 다른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수 분간 허공과 상대 없는 눈씨름을 했다.

하지만, 지는 건 결국 이 미친 시스템에 의해 여러 번 인생을 종쳐버린 경험이 있던 나였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세이브…… 지랄 마. (물론 세이브와 지랄 마 사이에 긴 텀을 두고 말했다)

<세이브 되었습니다! 당신은 특정 루트에 진입하는 순간 언제든 이 시간으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접속이니, 게임이니 이제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너무나도 불쾌한 이질감이 들었다. 내가 겪는 모든 일과 감정이 고작 컴퓨터 화면 속 캐릭터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소름 끼쳤다.

조금 다운된 기분으로 누워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 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유현재가 올 때가 된 것 같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답장은 빠르게 왔다.

-나 10ㅂㅜㄴ뒤 도착[email protected]!

오탈자투성이 대답에 살짝 기분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왔다. 빨리 오라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누군가의 발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버지는 나를 저지하며 내 앞에 섰다.

“다리는 괜찮은 거냐?”

“네, 다음 주면 깁스 풀 것 같아요.”

겸직에 대한 대화 이후로 아버지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기에 나는 괜스레 어색해했다.

“찬희야.”

“네.”

아버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쩐지 어느 날의 데자뷔 같은 느낌에 나는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눈앞에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스템의 붉은 글자였다.

<분기점에 도달했습니다!>

분기점? 나는 티 나지 않게 눈에 힘을 주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아주 제대로 놀고 있단 생각을 하며, 흘깃흘깃 글씨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대답에 따라 개입한 인물 ‘유현재’ 히든 루트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히든 루트? 물론 처음 언급된 단어는 아니었다. 분명 얼마 전 유현재의 히든 루트가 개방되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몇 번 시도했음에도 시스템은 ‘히든 루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히든 루트가 뭔데. 시스템은 놀리듯 대답했다.

<히든 루트의 정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얼른 풀어주세요!>

씨발 새끼. 진짜 더럽게 짜증 나네. 나는 이 쌍욕이 제발 시스템의 기분을 자극했길 바라며, 아마도 히든 루트의 열쇠가 될 사람인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헌터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뭐냐?”

“말씀드렸잖아요. 훌륭한 인재가….”

“유현재 때문은 아니고?”

돌연 나온 익숙한 이름에 내가 흠칫 놀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제법 사이가 좋다고 들었다.”

“그야 한집에서 살면… 사이좋은 게 낫잖아요.”

아버지가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따위 이유로 친해졌다고? 라는 눈빛. 한마디로 정곡을 찔렸단 말이다.

“네가 헌터가 되고 싶은 이유 말이다.”

“전혀 상관없는데요.”

“언제까지 거짓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아버지의 눈빛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내 모든 삶의 목적에는 유현재가 근거로 있다. 내 삶의 톱니바퀴를 돌게 하는 것도, 죽음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결국엔 유현재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짐작하셨을 리는 없지만, 나는 차마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야 맞긴 한데요,”

“잘 들어라.”

아버지가 내 말을 끊고 명령했다.

“실더와 헌터, 두 가지 모두 겸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말씀하셨잖아요.”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습득할 수는 있지.”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능력이 모두 직업이 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조금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런 내가 영 답답했는지 단정히 매여 있던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그건 너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아. 반드시 내가 필요하지.”

“아버지께서 도와주실 수 있단 거죠?”

“그래. 네가 힘을 기르려는 게 결국 그 녀석 때문이라면,”

그때였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발이 살짝 들어왔다가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나는 그게 유현재임을 바로 알아챘다.

“그렇다면 내 목표와 네 목표는 일치하겠지.”

나는 문 쪽을 쳐다보았다. 저 문 뒤에는 분명 유현재가 숨죽인 채 서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목표. 그건 전 생애를 걸쳐도 비슷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유현재를 절대 해치지 않는다. 없애는 건 더더욱 반대였다. 두 능력을 모두 보유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사망 확률은 분명히 낮아질 테지만, 유현재를 해하려 한다면 어떤 방법에서든 나는 결국 죽게 될 것이었다.

“일치라뇨?”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아버지 쪽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그냥 좀… 멋있어 보여서 겸직을 하고 싶다고 했을 뿐이에요.”

“…….”

“그게 현재한테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을 거고요.”

아버지의 입에선 어이없다는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내 할 말을 제대로 했다. 바깥에 있는 유현재에게 들리도록, 아주 큰 목소리로.

“저는 현재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에서 툭,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뒤를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반쯤 몸을 드러낸 채 우리, 아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띠링 소리와 함께 글자가 떴다.

<축하드립니다! 개입 인물 ‘유현재’의 히든 루트가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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