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13화 (13/115)

13.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고 나서야, 나는 유현재가 준 편지가 떠올랐다. 천천히 종이를 펴자 날려 쓴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양이 익숙한 것이, 유현재는 매번 생마다 같은 필체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별 게 없었다. 가벼운 인사와, 쓸데없는 안부와, 학교에서 지금 몰래 쓰고 있다는 멘트. 그리고 마지막 줄에 쓰인 문장.

「가물가물하지만, 어쩐지 네가 자주 울었던 것 같아.」

“아니거든, 누굴 만날 질질 짜는 애로 만들고 있어.”

「…근데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끝까지 읽은 편지를 놓지 못하고 괜히 코를 훌쩍였다.

*

사춘기에 제대로 접어든 시시껄렁한 패거리들이 하는 일이라곤, 학교에 출석만 하면 이곳저곳 참견할 일이 없나 어슬렁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가장 만만한 사람은 대부분 유현재였고, 그건 유찬희라는 존재가 암묵적으로 그를 싫어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티 내고 다녔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패거리들의 대장 격인 수정과 윤재, 삼환은 오늘도 어김없이 유현재의 책상 위에 눌러앉아 그의 물건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요즘 찬희 이상하지 않냐?”

수정의 말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동의가 쏟아졌다.

“어. 우리랑 밥도 안 먹고.”

“유현재랑 대화도 많이 하던데.”

수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추측을 내놓았다.

“둘이 친해진 건가?”

“말도 안 돼. 찬희가 유현재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삼환이 바로 말을 잘랐다. 대놓고 나서서 괴롭히진 않지만 유찬희는 유현재의 가장 아픈 치부를 살살 건드리며 그를 못살게 굴었다. 자신들이 유현재였어도 유찬희가 끔찍하게 싫어질 정도로.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유찬희가 만에 하나 머리에 돌이라도 맞아 먼저 손을 내밀게 됐다 쳐도, 유현재 쪽에서 이렇게 바로 받아들인다는 건 말이 안됐다.

“우리 망한 거 아냐? 둘이 친해지면.”

“야, 유현재 존나 자존심 센 거 봤잖아. 유찬희가 좀 잘해 준다고 쉽게 친해지겠냐?”

윤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신을 괴롭힐 땐 잔뜩 날을 세우다가도, 찬희가 개입되면 바로 온순해지던 그 모습.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면 유현재는 유찬희가 조금이라도 잘해 주면 바로 꼬리라도 흔들 것 같았다.

“그치만….”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찬희와 현재가 나란히 들어왔다. 똑같은 중학생들이었음에도 두 사람에게선 자신들과 다른 느낌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 조심성이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그런 어른 냄새가 났다. 설마 같이 등교한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눈치 빠른 수정이 가장 먼저 유현재의 책상에서 엉덩이를 뗐다.

“찬희야!”

찬희는 가만히 그 애들을 노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늦게서야 대답을 했다.

“안녕.”

세 사람은 동시에 과연 유찬희가 무슨 생각을 하다 인사를 했을지 나름대로 짐작하기 시작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냥 난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외적으로 나는 유현재를 괴롭히던 왕따 주동자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주동자랑 왕따가 소리 소문 없이 둘이 친해져서 돌아다닌다? 분명히 이건 또 다른 소문을 만들 것이었다.

솔직히 꼬맹이들이 뭔 소리를 하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것으로 또 상처받게 될 유현재였다. 지금의 유현재는 나에게 그저 호의적이었지만 여태까지 내가 벌였던 행동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유현재와의 관계가 내 이전 여덟 번의 삶과는 별개의 존재이듯 아무리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해도 내가 준 상처의 무게가 유현재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요컨대 나는 오랜만에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든가 대외적인 이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유현재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나도 가만히 서 있다가 슬금슬금 자리로 향했다.

“저… 찬희야.”

김삼환이 내게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대충 무슨 질문을 할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뭐라 대답해야 할지 준비하진 못한 상태라 나는 조금 흠칫했다.

“응, 삼환아.”

“저, 그게….”

김삼환이 얼굴을 긁적이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먼저 대답을 가로챘다.

“현재 때문이지?”

“…둘이 친해진 거야?”

유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노골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골몰하다 대답했다.

“삼환아.”

나는 최대한 뻔뻔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몰렸다. 당연했다. 내가 나서면 반 분위기는 항상 침잠했다. 나는 이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있을지언정, 전혀 좋은 인간은 아니었단 거다.

“내가 언제 현재랑 사이가 안 좋았어?”

삼환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김수정, 주윤재까지. 모두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괴롭힌 건 너네지 내가 아니잖아.”

누가 봐도 치사하고 재수 없었다. 나는 주제에 또 양심이 찔려 흘끗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개입한 인물 ‘유현재’가 당신에 대한 호감도를 올립니다!>

<당신은 ‘유현재’와 조금 더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현재’ 히든 루트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벨도 없는 놈. 무표정한 얼굴인 주제에 속으론 저렇게 호감도를 올리고 있단 게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선포 아닌 선포는 더럽게 유치한 만큼 중학생들 사이에서 미친 듯이 먹혀 들어갔다. 그리고 종래엔, 소문만 무성했던 유현재와 유찬희가 같이 등하교를 하는 걸 창문으로 구경하기까지 했다.

아, 존나 이거 판타지물이 아니라 인터넷 소설 속인가? 약간 사대천왕 감성도 생각나고. 알고 보니 복잡한 관계인 주제에 한 집에 같이 사는 것 때문에 우리 둘에 대한 소문은 이미 무성할 대로 무성했다. 소문의 내용들은 거의 한 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어린애들의 오글거리는 소문까지 귀담아듣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적지 않은 죽음을 겪어오며 드디어 유현재와 아무 장애물 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시스템 또한 내게 호의적인 말들만 늘어놓았다.

<당신은 유능한 실더의 재능을 가졌군요! ‘유현재’의 오른팔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오른팔 같은 소리하네. 평생 따까리나 하라는 소리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유현재’의 전투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나도 나름대로의 미래를 위해, 특성화 수업에 공을 들이고 있기는 했다. 이 ‘게임’의 자유도가 올라간 이상 이제 진짜 내 삶의 결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전의 삶과 달리 남들처럼 후회 없이 살고 싶었다.

“뭐 해?”

어느샌가 유현재가 문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저렇게 내 방에 찾아온다는 건 뭔가가 생각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유현재가 떠올리는 것은 저번 편지 얘기부터 시작해 죄다 엉터리나 다름없었다. 함께 떡볶이 장사를 했었다느니 (그 어린 나이에 도대체 어떻게?), 바다에서 살았었다느니 (우리는 둘 다 도시 촌놈들이었다.), 졸업을 하고 함께 살기로 약속을 했다느니 (그런 적은 추호도 없다). 죄다 묘하게 사실과 연결이 되면서도 어쨌든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유현재의 ‘기억났어’라는 말을 대충 수다 정도로 넘기기 시작했다.

“들어와.”

유현재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방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내 옆에 앉았다.

“벌써 교복이 작네.”

나는 달랑 들린 유현재의 교복 바지를 보며 말했다.

“바꾼 지 두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러게. 내가 엄마한테 말해 둘게.”

유현재가 웃었다. 정말로, 늘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넌 가만 보면 너무 쓸데없이 웃어대.”

“내가?”

“어. 바보 같아.”

“나 잘 안 웃는데.”

퍽이나.

“이번엔 뭐가 생각났는데?”

내 질문에 유현재가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말이겠지만.”

“알긴 아네.”

“네가 굉장히 아팠었던 기억이 났어.”

“…….”

“피가 났는데. 그 옆에서 내가 막 울고 있고.”

“…아.”

“이것도 사실이 아니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썩 좋지 않은 기억이니 거짓말로 믿고 있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이왕이면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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