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인물 ‘유현재’ 개입 완료!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유현재의 얼굴 옆에 뜨는 글씨를 모른 척했다. 유현재가 설령 과거를 기억한다고 한들, 이 모든 현상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지금의 나조차도 가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하곤 하니까 말이다.
“알겠어.”
“…….”
“…기다리겠다고.”
유현재가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가장 활짝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어서 꽤 낯설게 느껴졌다. 유현재는 웃을 때 눈꼬리가 조금 내려가 순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한때 그 모습을 강아지 같다고 느껴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유현재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었다. 유현재가 뭔가를 기억해내고 있단 사실 하나로 아직까진 나와 유현재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양팔 저울 양끝에 앉아 있는 단 하나뿐인 추였다.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내려간다. 한쪽이 행복해지려면 한쪽은 반드시 불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계는 그 불행을 내 등에 짊어지게 하려 했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기만이자, 일종의 오지랖이었다.
“기억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줘.”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정말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몇 년 간 외면해왔던 희망의 끈을 잡아 보기로 결심했다.
*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칠판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수업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떠올리는 것이라곤 언제 유현재의 기억이 돌아올까 하는 것뿐이었다. 형식적으로 유현재를 괴롭히던 짓도 멈췄다. 이 망할 게임이 업데이트된 이후로 ‘원래’의 유찬희가 해야 하는 행동을 굳이 하지 않아도 내 자유가 보장되었으니까.
유현재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특성화 수업을 위해 이동하며 옆에서 조잘대는 꼬맹이들의 수다를 억지로 들어주고 있었다. 유현재는 딱히 큰 힘이 없어도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조제술 파트를 배우고 있었기에, 나와 반이 달랐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선생님은 불을 끄고 자료 화면을 틀었다. 실습을 할 줄 알았던 아이들은 크게 실망해 불만을 터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찬희 너네 아버지다, 그치?”
한 녀석이 신나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자기네 아빠도 아닌 주제에 왜 저렇게 뿌듯해하는지 모르겠다. 화면에 잡힌 아버지는 실더의 정의와 특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헌터들의 역할이 게이트에 직접 들어가 전투를 이행하는 것이라면, 실더들의 역할은 게이트와 일반 국민들을 격리하고 나아가 국가 자체를 방어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꽤 예전에 찍은 영상이었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조금 더 젊어 보였다. 뒤에 몇 마디의 설명과 함께 전투국 보안과의 전경이 화면에 잡혔다.
「게이트가 생성된 곳에서 반경 1km 이내는 당분간 특별 격리 구역이 된다. 실더들은 특별 격리 구역에 각각 배치되어 시민의 안전을 위해 힘쓴다.」
화면 속 아버지는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영상이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아이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아까 전 내 옆구리를 찔렀던 녀석이 다시 내게 귓속말했다.
“너네 아버지 진짜 멋있다.”
“…음. 그런가?”
“당연하지. 나도 솔직히 헌터랑 실더 중에 진짜 많이 고민했었거든.”
녀석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너희 아버지처럼 두 개 다 할 수 있으면 진짜 좋잖아.”
“두 개?”
“응. 원래 헌터셨잖아.”
나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이내 말을 얼버무렸다. 녀석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다른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가 두 직업을 동시에 하셨다는 것.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이런 ‘특별한 설정’이 있었다면 원작을 알고 있는 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엄청나게 큰 비중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런가?
특성을 바꾸는 것이나 겸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각각의 힘은 각각의 적성에 맞게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예로 유찬희는 실더에서 헌터로 전향 후, 속성이 맞지 않아 몹시 괴로워했다. 결국 이것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폭주해서 죽음에 이르렀다. 후반부에 유현재가 헌터와 실더, 제조술 모두를 혼자의 힘으로 배워낸 것이 큰 이슈가 된 것도 이런 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15년이 되어가도록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게 가장 이상했다. 나는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직접 이 사실을 확인받기로 하고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을 텐데도 아버지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책상 근처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뭔가가 있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책상에는 몇 가지 서류들과 책, 만년필 몇 자루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들은 모두 아버지가 직접 집필한 저서였다. 방어학개론. 이동하는 공간의 개체적 원리. 제목만 봐도 지루할 것 같은 책들이었다.
“애비 책상을 허락도 없이 뒤지는 건 누구한테 배운 버릇이냐?”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니, 문 앞에 외투도 벗지 않은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다가….”
아버지는 대답 대신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바깥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버지의 것인지 모를 찬 기운이 내 발끝을 덮었다. 나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오늘 학교에서 아버지가 예전에 헌터였단 말을 들었거든요.”
아버지가 시계를 풀다 말고 행동을 멈췄다.
“그래서?”
“전 몰랐던 일이라… 그냥….”
“뭐가 궁금한 거지?”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도 두 가지 모두 하고 싶어요.”
아버지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별다른 대답 없이 시계를 책상에 내려놓고, 소매를 걷은 뒤 아버지는 책상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하고 싶은 이유는?”
두 특성을 모두 가지게 된다면, 추후에 부작용으로 폭주해서 죽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라는 대답을 삼키고 나는 대충 둘러댔다.
“그야 훌륭한 인재가 되고 싶으니까요.”
아버지는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심연까지 꿰뚫으려는 듯 서늘한 눈빛을 받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아버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넌 안 된다.”
“왜요?”
나도 모르게 말대꾸가 나갔다.
“수업 시간에 존 거냐? 인간은 두 개 이상의 특성을 가질 수 없다.”
“아버지는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내가 했다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제대로 알아둬라. 난 실더다.”
“…….”
“헌터 따위가 아니라.”
더 이상 대화를 잇지 못한 채 나는 쫓겨났다. 나는 터덜터덜 방으로 걸어 올라갔다. 2층 거실 소파에 유현재가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사춘기는 혼자 빗겨 간 건지, 좋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유현재의 얼굴은 빛이 났다.
“찬희야.”
나는 유현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현재의 표정에서 묘한 설렘이 묻어 있었다. 며칠 동안 얼마나 이 녀석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게 되는 건지.
“나 기억났어.”
“뭐?”
유현재의 목소리는 즐거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정도로 신난 걸 보면 분명 엄청난 걸 생각해낸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얘와 나의 과거엔 저렇게 신날 정도의 에피소드 따윈 없었다. 적어도 지난 일곱 번 정도의 생 동안은.
“이거!”
유현재가 반듯하게 접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찬희 너 편지 좋아했지? 직접 쓴 거.”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아니.”
“어…?”
유현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입을 조금 벌렸다.
“분명 편지를 줬던 기억이 나는데….”
주기야 했지. 근데 읽지도 않고 처박아뒀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주긴 했어.”
“아, 역시!”
“근데 좋아하진 않았어.”
내 말 한마디에 신났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난리 부르스가 났다. 나는 오랜만에 유현재의 귀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동물 귀가 달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읽어 주라….”
“뭐, 이거? 내용도 있어?”
“응. 오늘 학교에서 계속 썼어.”
내가 그 자리에서 펴려고 하자 유현재가 황급히 두 손으로 나를 저지했다.
“아니, 방에서 혼자 읽어.”
“…뭐. 알겠어.”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살짝 어색하게 마주 서 있었다. 이렇게 친근하게 대화하는 게 첫 번째 삶 이후로 처음이라는 걸 깨닫자 더더욱 방금 전 상황이 무안해졌다.
“음. 찬희야.”
“어, 어.”
유현재가 먼저 운을 띄웠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잊어버렸던 시간 동안엔 우리가 친했었어?”
이번엔 대답하지 못했다. 친했다고 말하기에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에도 이상한 것들투성이었으니까.
“넌 어땠던 것 같은데?”
“어….”
유현재가 잠깐 고민했다. 나와 달리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널 꽤 좋아했던 건 맞는 것 같아.”
“…….”
“꽤가 아니라 많이.”
상황보다는 감정들이 계속 떠오르거든. 온통 좋았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유현재가 뒷말을 이어 가는 동안, 나는 이 상황을 천천히 이해하려 노력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열이 가슴에 닿았을 때쯤엔 이미 호흡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난 그렇게 네가 날 싫어하게 하려 발버둥 쳤는데,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