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새 머리가 커졌다고 중학생들은 초등학생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혔다. 모양만 그럴듯한 감옥인 교실에서 권력자가 침묵하는 폭력은 사실상 합법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유현재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괴롭히는 놈들은 유현재가 각성하면 1차 사이다 전개를 위해 쓸려 나가는 조연들일 거였다. 그리고 그 조연들의 수장은 바로 나, 유찬희였고.
나는 교실 뒤편에서 낄낄거리며 유현재를 괴롭히는 양아치 무리들을 모른 척했다. 별 흥미도 없는 문제집에 집중하는 척하는 건 꽤나 고역이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적응이 되고 있었다. 문제는 저 양아치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였다.
“찬희야, 넌 어떻게 생각해?”
무리 중 가장 멍청해 보이는 놈이 내게 물었다. 방금까지 공부하고 있던 거 뻔히 봤으면서 어떻게 생각하냐니. 하지만 나는 이 연극을 망치지 않기 위해 천천히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지으며 빙긋 웃었다.
“윤재야.”
“어?”
“나도 모르는 일을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나는 사실상 이 일을 묵인하며 방관하는 척하는 주동자가 되어야 했다. 원작의 유찬희는 표면적으론 물의 한번 일으키지 않는 착실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노력파였다. 더러운 성질머리를 철저히 감추면서 십수 년을 착한 척해온 거니까.
“야, 찬희한테까지 신경 쓰게 하지 마.”
옆에 있던 조금 덜 멍청한 놈이 멍청한 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흘끗 유현재를 내려다보았다. 터진 입술의 피를 닦으며, 유현재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나도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순간 유현재에게서 기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유현재가 흘끗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건, 모든 걸 다 아는 내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유현재 같았다.
그때였다. 제법 오랫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던 붉은 글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처음보다는 좀 더 무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글씨는 누군가 타자를 치는 것처럼 한 글자씩 생겨났다. 문장이 완성될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태껏 봐온 시스템이란 것의 대사 중 가장 긴 내용이었다.
<훌륭합니다! 당신은 완벽히 세계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참여율을 위해 난이도를 올립니다.
난이도 변경 업데이트를 위해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무엇을 짚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황당한 말투성이였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내 심기를 거스른 건 세계란 단어였다. 도대체 이곳에서 나란 어떤 존재기에 ‘세계’라는 말까지 써가며 행동을 통제당해야 하는 걸까.
<30… 35…… 44………… 50…….>
숫자는 끊임없이 올라갔다. 나는 속절없이 그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67… 78………………… 89…………… 92………………………………….>
100%에 다다를수록 업데이트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하지만 뭔가를 대비하기엔 절대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무력한 마음으로 눈앞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100!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패치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저의 스토리 개입 가능
-세계는 당신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단, 자유의 크기만큼 책임의 무게도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히든 엔딩 추가
-똑같이 보던 시시한 캐릭터는 이제 그만! 흥미진진해 보이는 캐릭터를 골라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세요. 모든 캐릭터엔 크고 작은 비밀이 숨어 있을 거예요.
*세이브 기능 도입
-당신의 지금을 세계가 기억합니다.>
나는 그 글들을 몇 번이고 읽었다. 아주 오래전 몇 번 플레이했던 여타 게임들과 같은 평범한 공지 사항이었다. 그리고 시스템이 사라진 이후에도 수 분을 멍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이곳은 평범한 책 속 세계가 아니다.
심지어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변하기까지 한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충분히 나를 오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찬희야, 괜찮아…?”
내가 바보처럼 굳어 있는 걸 보다 못한 누군가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멍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이제 와서 내가 뭘 더 놀라겠어.
*
시스템은 내게 생각 외의 복병이 되었다. 무섭진 않았지만 제법 귀찮아진 쪽이었다. 예컨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땐 뜬금없이 ‘발표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거나, 길을 걷다 푸드 트럭을 3초 이상 보면 ‘사 드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거나. 처음엔 긴장되었지만 이 결정이 내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최대한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시도 하루 이틀이었다. 결국 며칠 후, 아침에 침대에 누워 있는 도중 ‘기상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를 본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당히 좀 해!”
시스템은 놀리듯이 <해당 게임은 유저의 자유를 보장합니다.>라는 문장을 띄웠다. 이게 자유라고? 그럼, 저 거지같은 선택지를 안보는 것도 내 자유에 해당이 되나? 궁금증을 가지자마자 시스템의 글씨가 싹 사라졌다. 나는 찜찜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갔다.
방을 나오자마자 유현재와 마주쳤다. 원래는 내가 20분 정도 먼저 등교를 하지만 망할 시스템 때문에 기상이 좀 늦어진 탓이었다.
나는 구태여 단둘이 있을 땐 친절한 척하지 않았다. 그게 그나마 덜 가증스러워 보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유현재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찬희야.”
나는 찬희야, 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해 그만 순순히 대답할 뻔했다.
“저번에… 말인데.”
나는 애써 기억 구석에 감추고 있던 그 때 그 일을 떠올렸다. 또다시 기대할까 봐서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거봐. 기대 안 하길 잘 했잖아. 나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곤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몇 계단 내려가지 않고서 불현듯 ‘해당 게임은 유저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시스템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게서 쏟아진 온갖 시시콜콜한 질문들. 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속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 글씨를 띄웠다.
<인물 ‘유현재’에게 개입하시겠습니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나를 달래듯 뒤따라 한 줄의 문장이 더 붙었다.
<해당 세계는 유저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래, 씨발. 너무 잘 보장해 주고 있지. 나는 한껏 조소했다. 하지만 차가운 얼굴과 다르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전과 다르게 이 세계에서 나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그렇다면 더 이상 거지같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유현재의 어깨를 잡아챈 뒤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유현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꽃 존나 싫어해.”
“…….”
“특히 길바닥에서 꺾은 말라비틀어진 꽃이라면 더더욱.”
유현재가 입을 떼고 뭔가를 물어보려 했다. 나는 그 말을 가로채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너, 잊어버린 거 존나 많아.”
유현재의 어깨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유현재가 그 손 위로 본인의 손을 올렸다.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녹아들었다.
“그러니까 기억해내.”
유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 줄 알고 끄덕이는 걸까. 아니, 평생 알 수는 있을까. 나는 뭔가를 더 자세히 말하기 위해 다시 입을 뗐다.
순간 붉은 글씨가 번쩍였다.
<세계는 개연성을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개입을 불허합니다.>
그럼 그렇지. 미주알고주알 다 설명해 주는 걸 봐줄 리가 없었다. 나는 유현재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내 손을 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차분하고 단정하게 유지된 저 얼굴은, 예전의 내가 알던 유현재가 아닌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유현재도 바뀌고 있는 것이었다.
애저녁에 포기했던 감정인 줄 알았는데, 나는 순간 어떤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서운함이었다. 잔뜩 괴롭히는 입장인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나는 내가 다치고 변해도, 유현재만은 그대로이길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당해놓고서 바보같이, 우습게도 정말 그랬다.
그때 유현재가 다시 내 손을 잡아왔다.
“미안해. 찬희야.”
“…뭐?”
“내가 꼭 기억해낼게.”
“…….”
“그러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유현재가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한 사람 같아서. 그 모습이 얼핏 예전의 유현재 같아서.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