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나는 몇 주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엄마는 매일같이 눈물바람이었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방으로 찾아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열일곱까지 멀쩡히 살다가 다시 이 시간으로 돌아와 버렸어요. 아무도 믿어 줄 리 없었다.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이성을 되찾을 시간이.
유현재는 며칠째 방문 너머에 앉아 내가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다. 갑작스레 공황 상태에 빠진 내가, 자신 때문에 이리 됐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유현재도 볼 자신이 없었다. 10여 년간 공들여 새로운 유현재를 만들고 바꾸어 놨었는데. 그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도 모자라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
꿈에선 매일 전생의 차수현과 유현재가 나타나 이것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차수현은 내 목을 조르며 신나게 질문했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너는 다시 악몽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될 거고, 그러느니 지금 이렇게 꿈에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나는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했다. 똑같은 10년을 살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강이 꽁꽁 얼어도, 그 아래에 있는 물은 끊임없이 흐르듯 시간은 갔다. 나와 유현재는 다시 1차 랭킹 선별전에 참가해야만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갔다. 날이 아직 조금 추웠지만, 곳곳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광경조차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짜 악몽인 걸까? 열여덟이 되기 전, 나는 또 차수현의 손아귀 아래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결말인 건가.
“…짜니야.”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유현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는 회귀 후 처음으로 유현재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응.”
내가 대답해 준 것에 놀란 건지 유현재가 살짝 손을 떨었다. 그리고는, 내내 등에 감추어 놓고 있던 것을 천천히 꺼냈다. 꽃을 꺾어 서툴게 줄기를 묶은 작은 꽃다발이었다. 내가 받지 않자 유현재는 점점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네가 만든 거야?”
“으응… 화단 써서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꽃을 받아 들었다.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유현재에게서 처음 받아 보는 꽃이었다.
“…고마워.”
유현재는 엄청난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주 밝게 웃었다. 나는 꽃향기를 맡았다. 짙진 않았지만 은은한 풀 내음이 났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응.”
“내가 위험하면 항상 구하러 와 줘.”
“응.”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네가 살려 줘.”
“응.”
단호하게 대답하는 유현재의 표정은 결연한 아기 너구리 같았다. 나는 그게 귀여워서 유현재를 폭 끌어안았다. 여덟 살짜리 아이는 생각보다 더 귀엽고 또 든든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차가 천천히 어느 건물 주차장에 들어섰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각진 건물 외형. 나는 이곳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유현재의 손을 잡고 엄마 아빠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곧 가벼운 검진과 함께 여기 있는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들은, 도살장의 소처럼 각자 등급이 매겨질 것이었다. 나와 유현재가 등장했을 때 감별소 내부가 살짝 술렁였다. 유현재는 시선이 무서운 듯했다. 이 시절, 유현재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 때문에 ‘나’라는 존재에 더 집착했다. 나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적절히 이용했다. 지금은 어떻게 할까. 그대로 가야 할까?
“264번, 유찬희?”
이름이 불렸다. 사방이 폐쇄되어 있는 작은 룸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아주 어두웠고, 기계에서 나오는 불만이 유일하게 시야를 밝혀 주고 있었다. 센서에 팔목 가운데를 댄 채 움직이지 말고 서 있으세요. 살면서 딱 한 번 들었던 기계음이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센서에 팔목을 댔다. 1차 랭킹 선별전은, 순수하게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마나’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매우 간단했다. 나는 측정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 바로 뒷번호였던 유현재도 곧 문 밖으로 나왔다. 유현재는 조금 상기된 듯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열일곱의 강아지 같은 유현재가 생각나 나는 웃었다.
“쪼금 무서웠지? 너무 어두웠어.”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내가 장난스레 대꾸하자 유현재의 귀가 새빨개졌다. 혼자 무섭다고 말한 게 조금 민망한 모양이었다.
“찬희는 참… 용감하구나.”
“별로 그렇진 않아.”
나는 유현재의 손목을 잡고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엄마아빠가 기다릴 주차장 쪽으로 가야 했지만, 그곳에 가면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을 거였기에 피하고 싶었다.
“찬희야, 아줌마 아저씨한테 안 가?”
“나 화장실 가고 싶어.”
“화장실 바로 저기 있는데….”
“거기 화장실 말고 옆 건물 화장실 가고 싶단 말야.”
유현재는 착하게도 버릇없는 내 땡깡을 받아 주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물 문을 열자마자, 아버지와 마주쳐야 했다. 아, 꼼짝없이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생겼다. 착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직접 차 앞에 서 있는 일행에게 데려다 주었다.
“찬희, 혜련이 고모 기억나지? 수현이 형이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 내 뒤에 있는 건 유현재였다. 나는 현재의 손을 붙잡았다. 차수현이 아주 잠깐,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이내 시선을 거두긴 했지만 유현재의 얼굴을 보니 살짝 감정이 북받친 모양이었다.
열일곱의 차수현은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얼음처럼, 차갑고 연약해 보였다. 분명히 차수현의 비밀을 진작에 알고 있었음에도, 그때 봤던 차수현과 지금 보는 차수현은 어쩐지 달랐다. 당연하겠지. 저 새끼는 죽은 사람을 10년간 못 잊었고, 나를 그놈으로 착각했으며, 심지어 죽여버린 녀석이다. 나는 마지막에 차수현이 읊어대던 대사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습관, 말투, 사용하는 향수까지. 차수현이 유도현을 못 잊고 돌아버린 게 아닌 이상 그런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유도현과 같은 습성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내가 원작 소설이랍시고 아는 것은, 결국 이 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기재해 둔 아주 적은 정보일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차수현이 유도현을 좋아했단 걸 안 것도 내가 ‘유찬희’가 되고 나서다. 유현재가 사실은 누구보다 순한 양처럼 유찬희를 따를 수 있단 것도, 아버지가 하나 남은 아들에게 불법 투약을 시키려 한 것도, 결국은 미리 알 수 있던 정보가 아니었다.
“애들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별로 힘든 것도 없었을 텐데.”
“찬희야, 고모야. 고모.”
나는 그제야 차수현 옆에 있던,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 차혜련. 전투국의 핵심 인력을 통솔하는 본부장이자, 살아남은 2세대 랭커 중 원탑을 자랑하는 사람. 머리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차혜련의 목덜미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십여 년 전 S급 게이트를 토벌하고 달고 온 상처였다.
“안녕하세요.”
“찬희는 볼 때마다 크네?”
차혜련이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현재의 손을 잡고 있던 오른손이 조금 흔들렸다. 유현재가 뒷걸음질 친 탓이었다. 우연을 가장해 모인 이 구성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나는 그런 유현재가 안쓰러워졌다.
“현재야.”
“으응.”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몇 개 먹고 남은 곰 모양 젤리 봉지가 손에 잡혔다. 유현재가 단 걸 좋아했던가? 카페에서도 늘 아메리카노는 마시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유현재에게 젤리를 내밀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야.”
유현재는 다 구겨진 봉지를 받고 가만히 있었다. 역시 안 좋아했었던가?
“고마워, 찬희야.”
유현재가 웃었다. 나는 원래도 이 녀석이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절대 악의라곤 가지지 못할 것 같은 이 처진 눈이, 타고나길 악역 캐릭터 같은 내 눈과 너무나도 상반됐기 때문이었다.
선발전이 모두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주차장이 복잡해졌다. 나는 유현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얼른 타자, 차에.”
“응!”
유현재가 젤리를 꼭 쥐고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될 것이다. 이렇듯 유현재는 여전히 착했고, 나는 여기 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차수현은 다른 방법으로 피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사고가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저기 멀리,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발견하고 인식하기도 전에, 주위를 감싸는 모든 것들이 회색이 되었다. 나는 이 장면을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붉은 색 글씨가 눈앞에 나타났다.
<뿌리치시겠습니까? Y/N>
나는 꽉 잡고 있는 유현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뿌리친다는 건, 이걸 말하는 거겠지. 지금의 나한텐 이 작은 손 말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붉은 글씨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다. 깜빡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유현재의 손을 더더욱 꽉 붙잡았다. 내가 왜 뿌리쳐요, 하나밖에 없는 동아줄을.
내 대답을 듣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배경과 글자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유현재와 함께 다시 차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누군가 이쪽으로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터라, 누군지 알 순 없었지만 행색이 초라한 것이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가 이쪽으로 뛰어오는 걸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를 지나칠 줄 알았던 남자가, 빠르게 몸을 틀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눈을 크게 뜨며 천천히 내게 물었다.
“유현재?”
뒤에 있던 유현재가 몸을 움찔하더니 작게 떨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진 몰랐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차 쪽에서 부모님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꽤 용기 있게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던 남자가 돌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이내 배를 뚫고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 초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뒤로 나동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유현재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희야… 찬….”
나는 그제야 죽을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에서 눈물이 나기 전에,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이 개 같은 기분을 두 번이나 느끼는 건, 꽤 값어치 있는 일이겠지.
시력이 사라진 것처럼 시야가 점멸하고, 소리만이 남아서 나를 괴롭히다 이내 사라졌다.
나는 또 유현재에게 죽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