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4화 (4/115)

04.

“이런 미친놈.”

현재 강북 쪽에 열린 A급 게이트 때문에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되었고, 지금 열리는 게이트는 C급이기에 유현재가 참가해도 큰 무리는 없을 거란 게 기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보호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게이트 토벌에 참가할 수 없었고, 유현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물론 아버지 때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운이 좋으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유현재는 이번 게이트에서 죽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주인공이 죽은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현재가 없어도 세계는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허상 같은 세계는, 주인공이 사라지는 순간 변덕스레 자멸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제야 능력을 수련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무력하게 했다. 때맞춰 유현재가 귀가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내 방으로 왔을 유현재지만, 본인도 찔리는 게 있는지 한참이 지나도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켜 직접 거실로 나갔다.

“유현재.”

거실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있던 유현재가 티 나게 어깨를 움찔했다.

“너 존나 발칙한 새끼더라?”

“찬희야….”

유현재는 평소 자주 짓던 애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니 새끼 인생에 날 맞춘 지가 벌써 10년인데, 스스로 지옥불로 걸어 들어가…? 유현재는 습관처럼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재빠르게 뒷걸음질 친 나는 단호하게 거리를 넓혔다.

“오지 마.”

“강해지기로 했잖아.”

“강해지는 것도 법은 지키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아저씨께서 가도 된다고 하셨어.”

“그러다 죽으면?”

유현재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재능 있는 애들도 갇혀서 못 나오는 게 게이튼데.”

각성하기 전까지는 몸으로 부딪히기만 하는 녀석인데. 크게 다치면 어떡하려고 저러는 걸까. 나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생각 범위 내에 없던 돌발 행동은 충분히 나를 지치게 했다.

“난 안 죽어.”

이마 위로 유현재의 손이 닿았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은 금세 머리의 열을 식혔다.

“네가 그랬잖아. 난 안 죽을 거라고.”

물론 평소에 그런 말을 종종 하긴 했다. 그야 주인공이고, 다 이겨낼 테니까.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자 바보 같게도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난 이 녀석의 이런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툴툴댔던 게 틀림없었다.

“지가 뭔 신인 줄 알아.”

유현재가 웃었다. 바보 같았지만 어쩐지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다.

*

게이트가 생성됐다. 몇 번 타이밍 좋게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마치 허공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미묘하고 기분 나쁘게 생긴 모습이었다. 탑급 길드에서 2급 2명, 중간급 길드에서 3급 여러 명이 왔다. 그러니까, 1급은 유현재 혼자였다는 거다. 말이 1급이지 1급 판정 받은 지 한 달도 안 된 놈. 아무리 C급 게이트라지만 말도 안 되는 분배였다. 유현재는 아직 소속 길드도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구성원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쓸데없이 낯을 가리는 탓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친 후 유현재의 팀이 게이트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뒤 입구는 자취를 감췄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반경 10km 이내에서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일주일가량 지난 후 출구 게이트가 열릴 것이었다. 전투원들은 그 안에 토벌을 마치고 빠져나와야 했다. 출구 게이트가 한번 닫히면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룰이었다.

나는 게이트가 사라진 허공을 한참 쳐다보았다. 동시간대 열린 A급 게이트 때문에, 이곳은 그다지 주목받지도 못했다.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아 목적 없이 도로변으로 걷기 시작했다. 출구 게이트는 어디쯤에 열릴까? 가끔 어처구니없이 고속도로 한복판에 게이트가 열리기도 해서, 랭커들이 기껏 싸우고 와서는 자잘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능력이 있는 다른 랭커들과 달리 유현재는 아직 체술로만 전투를 해야 했다. 걔는 고속도로에서 차도 못 피할 텐데. 괜히 길어지는 걱정에 나는 머리를 헝클였다.

길가에 세워져 있던 차창에 유찬희의 얼굴이 비쳤다. 이젠 거의 적응되었지만, 아무리 봐도 성질 더럽게 생겼다. 원작 소설 작가 놈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악역은 인상 더럽고, 주인공은 존나 잘생겼고. 멈춰 서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보고 있던 자동차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민망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말고, 나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모지리 안녕?”

비싼 선글라스 안쪽으로 재수 없는 눈깔이 보였다. 언제 물을 뺐는지 노랗게 탈색된 머리는 재수 없는 인상을 더 재수 없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웬일로 너희 개가 없네.”

알면서 이 지랄인 거다.

“재수 한번 존나 없네.”

“내 차인 거 알면서 얼쩡댄 거 아니었어?”

차수현. 이 새끼는 원작에 아주 잠깐 출연하는 망나니였다. 2세대 랭커 2위 차혜린의 조카이자, 유찬희와 손잡고 유현재 목을 치려 했던 멍청이 중 한 명. 제 고모와는 완전 반대로 굉장히 다혈질에 성질이 더러워서 원작 유찬희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똥 씹은 표정으로 놈을 무시하고 도로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차수현이 천천히 차를 몰며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덕분에 도로는 엉망진창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뒤에서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가 30초가 넘어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수현을 쳐다보았다.

“안 타면 나 도로로 돌진한다.”

“존나 사는 거 재미없냐?”

“어떻게 알았지.”

차수현이 열린 창문 위에 팔을 걸친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녀석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수현은 열일곱 살부터 스물일곱 겨울까지 미국에서 유학을 한 후, 귀국해 유찬희와 만난다. 집안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알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다. 소설에서는 유찬희가 유현재를 증오하는 걸 알고 차수현이 도와주는 식이었다.

그치만 지금은 이딴 놈이랑 가깝게 지낼 리가 없잖아. 내 눈에 얜 그냥 걸어 다니는 사망플래그다. 게다가 삐뚤어진 사이코인 원작 유찬희와 다르게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성질머리 더러운 놈이랑 친할래야 친하게 지낼 수가 없다. 물론 초반의 차수현은 나름대로 괜찮은 랭커 가문의 아들인 나와 친해지려 했었다.

“찬희야, 놀아 줘.”

“꺼져.”

“사냥개 뒤질까 봐 걱정돼 죽겠지?”

내가 입술을 깨물자 차수현은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여튼, 게이 새끼들.”

차수현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차수현의 말을 무시하고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이 새끼 면상을 갈겨버릴 것 같아서.

“나이 처먹고 할 짓도 없는 새끼한테 듣기 싫은데.”

“찬희는 여전히 말대꾸 잘하네.”

차수현이 콘솔 박스 위를 더듬었다. 한 손으로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뒤 차수현은 내 쪽으로 얼굴을 드밀었다.

“불 붙여 줘, 찬희야.”

“돌았어?”

차수현이 완전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친 새끼. 차가 달리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고도 태평하다. 나는 결국 또 이 새끼한테 휘말려 라이터를 들고 불을 붙여 주었다.

“적당히 놀았으면 내려 줘.”

“유현재 볼 때까지 안 내려 줄 건데.”

“네가 걜 왜 봐.”

“이상하게 난 걔가 조온나 싫더라.”

그거야, 원작에도 니가 유현재를 뒤지게 싫어하니까 DNA에 각인이라도 됐나 보지.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아아, 걔 오늘 뒈지면 찬희는 이 차에서 영원히 못 내리는 건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차수현의 대가리를 세게 후려쳤다. 순간 운전대가 돌아가며 차가 크게 중앙선을 이탈했다. 나는 차수현을 한 대 더 칠 심산으로 주먹을 들었다. 하지만 차수현이 빨랐다. 놈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너무 강한 악력이라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이제야 반응이 좀 있네.”

“…놔.”

“역시 게이 새끼들이라니까.”

차는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근처 도로에 멈췄다. 나는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차수현이 재빠르게 락을 걸어서 내릴 수 없었다. 차수현이 이번엔 계기판 쪽으로 내 머리를 세게 처박았다. 그리고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코웃음이 목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미쳤구나, 진짜.”

“뭐래. 이거부터 놔.”

“네가 왜 이 향이….”

“미친 건 너겠지.”

코 쪽이 뜨끈한 걸 보니, 코피라도 나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못 잊었니?”

의미심장한 내 대답에 차수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형이 그렇게 보고 싶어, 수현아?”

“입 다물어.”

“형이야말로 진짜 죽었는데.”

차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악력이 급속도로 강해지는 걸 보니, 능력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블랙박스 제출해서 이 새끼 고소나 해야지. 나는 차 한가운데 달려 있는 블랙박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너나 내 아빠나, 형. 형. 지겨워 죽겠다.”

“이런 씨발….”

나는 차수현이 힘을 잠깐 푼 순간 빠르게 락을 해제하고 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차수현이 나를 가만둘 리 없었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목덜미를 잡더니, 한순간에 내 몸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걷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차수현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내 등을 발로 천천히 밟았다.

“이래서 너네 같은 애새끼들이 싫은 거야. 잘 해 줄려고 해도 개같이 기어오르거든.”

차수현의 발이 이번엔 옆구리를 강타했다. 몸에서 뭔가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살인자 새끼를,”

다시 한번 퍽,

“씨발,”

또다시 한번,

“뭐가 잘났다고.”

나는 결국 헛구역질을 했다. 유도현의 이름은 차수현의 역린이었다. 이건 원작 소설에 나오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설정값이었다. 차수현이 유찬희와 손을 잡고 유현재를 죽이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

도와주는 사람 없이 얼마간 뒹굴고 있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쩌적거리는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익숙하진 않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 법한 소리였다. 게이트였다. 나는 하필 출구 게이트가 열리는 곳이 이곳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유현재가 저기서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수 초간 게이트에선 인기척 하나 없었다.

“다 뒈졌나 본데.”

차수현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떡하니, 찬희야.”

“지랄 마.”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한번 몸부림을 쳤다. 그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잡고 있던 차수현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순식간에 사방에 피가 튀었다. 차수현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설마 죽은 건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 뒈졌어, 씹새야.”

한 손엔 몬스터의 대가리를 쥔 유현재가 피칠갑을 한 채 차갑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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