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울분에 찬 표정 그 어딘가엔 완연한 죄책감도 깃들어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그냥 나 편하게 살려고 하는 짓이라고 달래 주고 싶었지만 의리파 유현재의 머리엔 들어오지도 않겠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유현재를 툭툭 쳤다.
“표정 풀어. 네가 맞았어?”
유현재는 그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가? 왜?”
“그냥.”
나는 유현재를 끌어안았다. 누워 있는 사람이 잡아당긴 꼴이라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지만 유현재는 별달리 반항하지 않고 천천히 끌려왔다. 품속에 있는 유현재의 몸이 뜨거웠다. 나는 조금 이상하리만치 체온이 높은 그 몸을 감싸 안고 유현재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나보다 강한 게 뭐가 미안해?”
강한 건 미안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유현재는 그랬다. 9년 동안 지내오며 당연히 사람 간의 감정의 교류를 느끼긴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유현재는 ‘주인공’이었다. 그가 강한 건 당연한 거고, 그가 강해야만 내가 산다. 그리고 내가 약할 경우 높은 확률로 나는 그의 적수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약한 걸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래, 그냥 전략적인 싸움인 건데. 하지만 역시 나도 인간인지라 유현재의 감정이 내게 전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놈이 슬퍼하는 건 어쩐지 나도 좀 슬퍼서. 나는 쿨쩍이며 처량하게 코를 닦았다.
“미안하면 더 강해지든가.”
“응.”
“진짜 엄청나게 강해져.”
“응.”
“대답 한번 졸라 빠르네.”
“찬희 네가 부탁한 거잖아.”
정말이지 의리 있는 놈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너보고 사냥개니 뭐니 하는 거야.”
“그럼 할게, 그거.”
“미쳤냐? 오글거려서 싫어.”
나는 퉁명스럽게 유현재를 밀어냈다. 사내놈들끼리 부둥켜안고 훌쩍거리는 건 3분이면 충분했다. 주인공의 멘탈을 케어하는 건 여러모로 힘든 일이었다. 특히 유현재처럼 원작과 아예 성격이 바뀌어버린 경우는. 눈물을 참느라 그런 건지 얼굴이며 귀까지 빨개진 유현재는 뭐 사실… 존나 잘생겼다. 어릴 땐 여자애로 오해받을 만큼 예쁘장하더니 크면서는 완전히 잘생겨졌다. 주인공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유찬희’도 못생긴 건 아니지만 악역답게 인상이 좀 더럽거든.
“그래도 꼭 지킬게. 찬희.”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주인공의 가호를 약속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누구보다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는 아버지답게, 나는 며칠간 등교 금지를 당했다.
유도현이 랭킹 1위를 차지하기 전에도 이 집안은 제법 유수한 랭커 가문이었다. 생명 공학자들은 ‘마나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랜덤하게 적용된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마나는 유전이다. 마치 낭설 같으면서도 정설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대를 이어 가는 랭커들은 모두 비슷한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아버지는 헌터를 은퇴하기 전까지도 1세대 랭커 10위권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나 같은 인간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형을 사랑했고, 신봉했고, 누구보다 맹목적으로 믿었다. 유현재가 이 집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도 그거 하나였다. 유도현의 부탁. 그는 마지막까지 유현재를 지켰다. 부모님이 유도현의 유품과도 같은 그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현재는 나를 두고 등교하면서도 불안한 눈치였다. 가지 않으려는 녀석을 억지로 등교시키고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거, 휴대폰 게임이나 할까 싶었다.
게임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무슨 거짓말처럼 눈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원작의 서술에 따르면 유도현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날카로운 눈매, 나이가 들었어도 각 잡힌 몸. 유도현도 이랬을까 싶었다. 아, 더러운 인상 같은 건 내가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하다.
“오셨으면 깨우시지….”
며칠 전 잔뜩 맞은 터라 굳이 곰살 맞게 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의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아프냐?”
가해자가 묻기엔 너무 어이없는 말 아닌가요. 나는 멍든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점심 먹거라.”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좀 황당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자식을 패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든가 하는 상상 동화 류의 인간은 아니겠지. 어쨌든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인간이었기에, 나는 황급히 원작을 되뇌어 보았다. 크게 달라지는 사건은 없는데.
부엌으로 가니 어머니도 앉아 계셨다. 내 몰골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만 모른 척하는 듯한 뭐 대충 그런 얼굴이었다. 살얼음판 같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아버지는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이 인간이 뭐 연고를 던져 준다거나 하는 신파를 찍진 않겠지, 하고 좀 웃긴 상상을 했다.
하지만 방문을 닫자마자 내게 건네진 물건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이건….”
“언제까지 유현재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거냐?”
정확히 말하면 그놈이 날 쫓아다니는 건데….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루에 한 번만 주사해. 현재 놈한텐 절대 들키지 말고.”
“아버지!”
나는 받은 물건을 내팽개쳤다. 이 인간은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아버지 자식으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죠?”
아버지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식?”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글쎄다. 힘도 없는 자식 놈 뒷바라지할 정도로 좋은 애비는 아니라서 말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진짜 부모도 아니라 별 타격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1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아니, 애초에 이렇게 자식을 패버릇하는 인간에게서 또다시 실망할 거리가 생기다니.
“졸업할 때까지 밥 얻어먹고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라.”
“싫어요.”
나는 발밑에 있는 봉투를 확인 사살하듯 걷어찼다.
“부작용이 무서워서 그런 거냐?”
“그럴 리가요. 아버지 아들이라서 그런 건 안 무서워하거든요.”
아버지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보통 아버지가 아들에게 법을 위반하는 짓을 제안하던가요?”
이 인간이 주사하라고 하는 약은, 엄청난 부작용을 감수하고 마나를 증폭시키는 일종의 스테로이드제의 변형체 같은 약물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뿐더러 선별전에서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최상위급 약물. 아마 원작에서 유찬희가 이것의 알약 형태를 계속 복용했었을 것이었다.
“법?”
아버지가 코웃음쳤다. 뭐 대충 어른들의 세계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단 거겠지. 나는 일단 뻗대기로 했다. 사실 원작에서도 유찬희가 약을 먹는다고 법적인 책임을 물진 않았다. 모두 잘나신 아버지 덕분이었다. 유찬희는 이 약의 힘을 이용해 강령술을 하고 시체를 불렀다. 그리고 약 부작용과 억지로 주입한 유도현의 힘이 충돌해서 반 시체 상태까지 갔다. 한마디로 이 약을 맞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바로 진입한단 거였다.
“그리고 보통의 부모 자식 관계면, 왜 능력을 기르지 않냐고 물어보지 않나요? 친절하게까진 아니라도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살짝 묵례를 한 후,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네 형이 죽은 지 10년이다.”
“그쵸.”
“10년간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유현재에게 아무 감정도 들지 않더냐?”
아버지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하려는 말씀을 알아챌 수 있었다. 엄마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역시 유현재를 더럽게 미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취미를 가지고 계시네요, 아버지.”
“…….”
“죽이고 싶은 놈을 10년이나 거둬 먹여 살리고, 친자식 손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걸 보니까요.”
물론 부모님이 유현재를 내치지 않은 건 유도현의 유언 때문이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네 형은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었다!”
“형의 선택이라고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와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들은 엄마가 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나는 엄마를 지나쳐 방문을 열고 나갔다. 원작의 유찬희가 왜 그렇게 음침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부모는 자신을 복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지, 유현재는 무능력자 주제에 자기보다 뛰어나지.
그리고 그날 오후, 게이트 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연락이 왔다. 재수 더럽게도 우리 집 근처였다. 다음 날 바로 회의를 소집할 것이라 했지만, 어째서인지 몇 명의 남자가 저녁이 되자마자 집을 찾아왔다. 제복 차림에 딱딱한 표정. 딱 봐도 전투부 쪽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복도에 서 있던 나와 유현재를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성질 더럽긴. 나는 일부러 인사도 하지 않고 유현재의 팔뚝을 잡았다.
“현재야.”
방문을 닫으려다 말고 아버지가 유현재를 불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지막한 어투였다. 유현재는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그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마 방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유현재는 얼마 있지 않아 방에서 나왔다.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현재는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늘 평소보다 인상이 차가워 보였다.
“무슨 일이야?”
다급하게 물었지만 유현재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새 무표정을 지우고 다시 씩 웃은 녀석이 내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유현재는 아무리 추궁해도 답을 내놓지 않았다.
“개새끼.”
“갑자기 왜 욕이야.”
“평소엔 말 그렇게 잘 듣더니.”
유현재는 주춤하더니 어깨에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뉴스를 통해 유현재의 게이트 토벌전 참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원작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불현듯 잿빛 배경에서 깜빡거리던 그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세계가 뒤틀리고 있습니다.>